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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일기] 잡일이 아니라 문제를 찾는 중입니다.

진정한 기획은 잡일이라는 현장에서 나온다.

by 최호진

요즘 회사에서 하는 일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내가 뭘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회사 안에서의 일들이 힘들거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복직을 하고 하는 일에 재미를 붙이고 있는 중이었는데 '내가 일을 잘 하고 있나'라는 회의감이 밀려왔다. 내가 하는 일들이 잡스러워 보였다. 회사 생활을 한 지도 벌써 15년이 훌쩍 넘어가서 20년차를 향해 가고 있는데 하고 있는 일이 3,4년차 때 했던 것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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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회사에서 나의 하루 목표는 정시 퇴근이다. 해야할 일은 정해져 있기에 퇴근 시간을 맞춰야 한다는 압박감을 갖고 하루 종일 부산스레 움직인다. 그러다 보니 일과 중에는 꽤 바쁘게 지내야 하는데 가끔씩 퇴근 길에 내가 뭘 했나 싶어 허무할 때가 있다. 분명 바쁘게 보냈는데 뭐 하나 제대로 한 것 같지 않은 찜찜한 기분이랄까?


특히 요즘 내가 하는 마케팅이란 일이 좀 그런게 많은 듯 하다.(아직 마케팅의 일이 뭐다라고 말하기에는 아직 모르는 게 많아서 확실히 말은 못하겠다) 말이 좋아 마케팅이지 고객을 끌어 오기 위해 새로운 프로모션을 기획하고 설계하는 일은 전체 일의 10%도 채 안된다. 그렇게 기획한 일을 진행하기 위해 홈페이지에 올릴 내용을 정리하고 고객들에게 발송할 SMS 문구를 만들어야 한다. 타겟 고객들도 설정해야 한다. 그 외에도 고객센터 등에서 오는 각종 문의도 응대해야 하고, 프로모션이 다 끝난 후에 경품을 지급하고, 세금 처리를 하고, 예산 결재도 올려야 한다. 일련의 과정들이 꽤나 많은데 상당수의 일들이 단순 반복적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하루 종일 바쁘다. 하나씩 일을 쳐내느라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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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혁신의 하나로 RPA라는 것이 금융사의 화두로 단순 반복적인 일들을 소프트웨어 형태의 로봇이 대신할 것이라고 하던데, 지금 하는 일들이 분명 단순 반복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로봇이 대신하긴 어려워 보였다. 중간 중간 사람의 손을 타야 하는 판단의 업무를 로봇이 대신할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반복적인 일을 로봇이 대신하게끔 하기 위해서는 한 번의 정리 작업과 그것을 어떻게 바꿔갈 수 있을지 고민도 필요한데 그 고민을 지금의 상황에서 스스로 하기란 꽤나 어려워 보인다. 당장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쳐나가는데 급급한 상황에서 기존의 프로세스를 바꾸려는 상당한 노력이 꽤나 지난한 작업같아 보여 힘들지만 잡일을 반복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찌됐든 내가 하는 단순 반복적인 일이 꽤나 오랫동안 계속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떻게 하는 게 일을 잘 하는 것일까?


내가 뭘 하고 있지라는 고민은 내가 일을 잘 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고민으로 이어진다. 일을 하면서 기획하는 일과 일련의 프로세스로 따라오는 일들을 한꺼번에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A부터 Z까지 일 중에 어디까지는 차장인 내가 하고 그 다음부터는 대리에게 맡기는 것도 모양새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안돼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왕왕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이 일을 하고 프로젝트별로 담당자를 정해서 일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게 효율적이지 않을지라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서도 각자가 발전하면서 일을 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과연 그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한다. 연차가 올라가면서 해야 할 일들이 따로 있기 마련인데 매일 일에 치여 사느라 큰 그림을 못 보는 것은 아닌가 라는 우려가 들 때도 있다. 최근 팀에 6개월차 신입이 투입되면서 그런 고민이 커졌다. 과연 신입에게 어떻게 일을 주는 것이 맞을까라는 생각도 들었고,그 과정에서 선배인 내가 어떤 도움을 주는 게 맞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적어도 신입에게 내가 하는 잡일을 "떠넘기는" 일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하기 힘들어 하는 일을 그 친구라고 기꺼이 하기 쉽지 않을테니.


그런 과정에서 나이가 들면서도 잡스러운 일들을 해야 하는이유를 한 권의 책을 통해서 찾을 수 있었다.


문제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얼마 전 회사에서 진행하는 북러닝 연수과정에서 7월 책으로 <브랜드 마케터들의 하는일>을 읽게 되었다. 배달의 민족, 스페이스 오디티, 에어비앤비, 트레바리 출신의 마케터들이 그들이 마케터로서 일하는 것들에 대해 담은 책이었는데 아직 다 안읽었지만 책 초반부부터 마케터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물론 그들의 마케팅이 우리의 그것과 사뭇 달라 괴리감도 느꼈지만 회사에서 적용할 생각꺼리들도 많아 보였다. 그 중 배달의 민족 출신의 (지금은 퇴사한 걸로 알고 있다) 이승희 씨의 마케팅에서 중요한 것에 대한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마케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달라요. 아이디어에 집중하지 않아야 해요. 문제찾기가 우선입니다. 아이디어는 발상이 아니라 연상이에요. 문제 설정에 뒤따라 나오는 생각의 더미일 뿐입니다.” (브랜드 마케터의 일 , p,.48~49)


마케팅이 새로운 아이디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문제찾기가 우선이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잡일들이 문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꽤나 쓸모 있는 일들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크게 뇌를 쓰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단순히 생각없이 하는 일이 아닌 사람들이 불편해 하고 그 속에서 필요한 것들을 찾아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니 그 일들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볼 수 있었다.


실제로 최근 잡일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하고 프로모션의 방향을 바꾼 일도 있었다. 회사 일이라 세세하게 말할 수 있지는 못하지만 특정 행사를 진행하는데 있어 고객들에게 캐시백을 주는 룰에 있어 불편함이 민원으로 자주 접수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작 당시에는 분명 좋은 취지로 만든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지금은 그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는 듯 해 보였다. 과감하게 프로세스 룰을 바꾸고 비용이 더 들더라도 부당함 없이 일을 처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콜센터의 문의에 응답하고 고객들에게 경품을 주는 일들을 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내가 직접 그 일에 뛰어 들어보니 문제가 더 뚜렷하게 보인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보니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하고 있는 일의 상당수가 잡일이지만 그것이 내가 만들어 내는 하나하나의 근간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면 지금 하는 일이 그냥 단순반복 업무로 그치지는 않겠거니 싶었다. 뭐든 내가 어떻게 그 일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유체이탈은 하지 말자고요

최근 얼마 전에 회사에서 TFT문서 하나가 떴다. 우리 부서와도 관련이 있는 일이라 기획 초창기 부터 보고서를 열심히 보곤 했는데 TFT 문서에 흥미로운 점이 보였다. 보고서를 쓴 사람과 TFT 문서를 만든 사람은 TFT구성원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게 나에게는 꽤나 웃프게 보였다.


TFT 문서에 아는 후배 이름이 있어 어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물어봤다. 후배는 본인이 그 TFT에 들어간다는 것을 전날에서야 알았는데 그 때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았다고 한다. 보고서도 처음 봤단다. 그러면서 그 부서에서는 이런 일이 종종 있다고 했다. 기획하는 사람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이 따로 움직인다고 한다. 후배는 한 마디 말도 덧붙였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거죠. 말하자면 유체이탈?"


여전히 회사는 기획하는 사람과 실행하는 사람을 구분한다. 그리고 기획하는 사람의 기획력을 높게 평가하지만 실행하는 사람의 실행력은 크게 존중하지 못하는 편이다. 물론 누가 인정을 받느냐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겠지만 진짜 큰 문제는 그렇게 해서는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획한 사람이 실행을 염두에 두긴 어려울 것이고, 실행을 하는 사람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유체이탈" 업무방식이 아닐까 싶다. 기획과 실행을 구분하기 보다는 그것의 시너지를 고려해서 같이 가야 하는 게 맞는 듯 싶다. 물론 실행 과정에서 따라오는 일련의 크고 작은 일들이 귀찮게 느껴지긴 하겠지만 그것들이 진짜 문제를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일을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유체이탈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가장 유효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내가 뭘 하고 있나라는 회의감에서 얼른 벗어나야겠다. 알고보면 하기 싫어 했던 푸념이라고 솔직히 인정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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