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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일기] 재택근무를 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적응하는 모습이 좀 씁쓸하기도 합니다.

by 최호진

본사 전직원들은 재택근무에 들어갑니다


안타까운 소식이 들렸다. 회사에 확진자가 발생했단다.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확진자수가 증가하더니 그 여파가 회사에까지 미치고 말았다. 난리가 났다. 회사 코로나 대응반 직원들은 빠르게 위기 상황을 헤쳐 나갔다. 해당부서 직원은 모두 검사를 받아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불똥은 나에게도 튀기고 말았다. 그 부서에 잠시 서류를 받으러 갔을 뿐인데 접촉자라고 나도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물론 국가에서 정한 기준은 아니었고, 회사에서 정한 기준이었다. 오버하는 거 같았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안전이 중요한 상황이니.


확진자가 발생한 날과 그 다음날 본사 건물에 근무하고 있는 전 직원은 재택근무로 전환했고, 이후부터 팀별로 3개 조로 나뉘어 재택근무에 들어가게 됐다. 복직한 지 얼마 안돼 업무 파악 중이던 나도 재택근무에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난생 처음 재택근무를 하게 됐다. 재택근무를 한다는 게 어떨지 가늠은 되지 않았지만 조금 편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코로나로 정신없고, 무서운 상황이긴 했지만 집에서 편하게 근무하면서 적당히 놀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눈치 볼 사람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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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택일 첫 날. 피씨를 켰다. 회사에서 안내한 방법대로 회사 시스템에 들어갔다. 회사에서 접속한 피씨 환경과 동일했다. 내가 저장했던 문서들도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클라우드의 힘이다. 어디서든 인터넷 접속만 할 수 있으면 동일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게 된다. 회사 직원들과의 사내 메신저도 가능했다.



편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불편했습니다. 마음이...


첫 날은 계획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눈치 볼 사람도 없었고 핑계도 충분했다. 코로나 검사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마음을 집중하기 어려웠다는 구실도 있었다. 실제로도 그랬고. 간단하게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고 진짜 해야 할 일은 미루고 놀았다. 다행히 급박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들은 없었기에 괜찮다 생각했다. 하지만 아쉬운 게 하나 있었다. 놀아도 피씨 앞에서 놀아야 했다는 점이었다. 회사에서 나를 어떻게 감시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회사에서 재택근무자의 피씨 접속 시간을 일일이 확인한다는고 하던데 그게 마음에 쓰였다. 소문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지 알 수 없었지만, 소심한 마음에 직원들과 사내 메신저로 채팅이나 하며 피씨 앞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날의 재택은 속된 말로 "개꿀"이었다. 출퇴근 신경도 안써도 되고 적당히 놀면 되니 안 좋을 수가 없었다.


둘째날도 가벼운 마음으로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검사 결과가 나오면 (오전에 나온다 했다) 점심 시간에 달리기를 할 요량으로 씻지도 않고 근무에 들어갔다. 누가 볼 것도 아니었으니 굳이 씻지 않아도 되었다. 편안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그런데 피씨를 켜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갑자기 마음 한켠에서 불편한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회사에 왔으니 월급값을 해야 하지라는 책임감 같은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남의 눈치가 보여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마음이 그랬다. 뭔가 죄를 짓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회사에서 매일 일만하는 모범 회사원도 아니었는데 집에서 그러고 있으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이래도 되나 싶었다.


점심시간에 한강에 나가 힘차게 달렸다. 1시간 안에 뛰고 와서 샤워까지 마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평소보다 급하게 속도를 내서 뛰고 왔다. 뭐든 복잡할 때 달리기만한 게 없다. 집중해서 달리기만 하고 오니 머리가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새로운 마음으로 샤워까지 마치고 다시 피씨 앞에 앉았다. 개운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으니 내가 뭘 하는 게 편안한 것인지 알게 됐다. 업무 폴더에 있는 엑셀 파일을 열고 만지던 숫자를 정리하고 보고서를 한 줄 한 줄 써내려갔다. 퇴근 시간인 6시까지 후다닥 시간이 흘러갔고 덕분에 나를 불편하게 했던 미묘한 감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하루 하루 재택근무 경험치가 높아질수록, 나의 적응도도 올라갔다. 좋은 점도 발견할 수 있었다. 혼자 앉아 일을 하다보니 집중력이 올라갔다. 덕분에 오랫동안 묵혀왔던 일도 (물론 수정이 필요하겠지만) 1차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었다. 막히는 부분에 대해서 주변 동료들과 논의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입으로 일하는 시간이 많은 나에게는 한계가 있는 환경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회사에서 일하는 것과 재택근무로 일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시대의 뜻밖의 상황에서 경험한 재택근무는 충분히 값진 경험이었다.


한편으로 씁쓸한 마음도 들었다. 이렇게 다시 직장인 모드로 전환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휴직의 시간이 그리웠다. 어쩌겠어. 당분간은 직장인 모드로 살아가야 할 거 같은데 적응이라도 하는 나의 모습에 감사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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