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이 하는 거면 나도 못할 건 없습니다.
우리 회사는 SAS라는 통계 프로그램을 쓴다. 이 통게 프로그램을 다룬다는 것은 엄청난 도구를 활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원하는 데이터를 조건에 맞춰 뽑고 이를 마케팅에 적절히 활용하느냐도 얼마나 SAS를 잘 다루느냐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마케터로서 이 프로그램의 역할이 중요하다. 하지만 진입장벽이 큰 것도 사실이다. 프로그램을 잘 다루는 사람들이야 별 거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처음 접해본 사람들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세계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신입사원 시절부터 데이터를 다룰 일이 많지 않았다. 은행에서 카드사로 이동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광고, 신사업 등을 주로 했기에 데이터에 대한 니즈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고 나서도, 나에게는 SAS란 존재는 귀찮고 성가신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존재 자체가 불쾌하게 느껴졌다. SAS를 잘 다루는 사람들이 일종의 기득권처럼 여겨졌다고 해야 할까? 쉽고 편하게 "Drag & Drop"으로 요구 조건을 쉽게 정리하면 데이터가 뚝딱뚝딱 나오는 프로그램도 요즘 (해외에는) 많다던데 언제까지 어려운 쿼리를 돌려가며 데이터를 뽑아야 하나란 생각도 들었다. 이런 장벽 때문에 우리 회사가 "이모양 이꼴"이라며 말도 안되는 논리로 회사에 욕도 해댔다. 이유는 하나였다. 내가 SAS를 돌리지 못하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누군가에게 부택해야 하는 아주 "애매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렇게 누군가를 탓하고 욕하며 피하기만 했는데 SAS를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이번 상반기 인사이동 때문이었다. 젠장할 HR부서라고 욕도 했지만 이미 시위를 당긴 활이었고 엎지러진 물이었다. 사유는 이랬다. 다양한 데이터를 뽑아야 하는 우리 팀의 상황상 데이터를 잘 다루는 직원이 둘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다른 부서로 가게 된 것이었다. 두 명의 대리가 데이터를 만지며 일을 하고 있었는데 한 명이 빠지고 나니 남아 있는 한 명에게 일이 가중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남아있는 대리는 하루 종일 데이터를 뽑아냈다. 데이터 공장에 취직한 사람처럼 말이다.
그 와중에 팀에게는 이런 저런 미션들이 떨어졌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새로운 이벤트를 기획해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데이터가 필요했다. SAS를 돌려서 나오는 그런 데이터가 말이다. 하루 종일 공장에서 데이터 주물을 만들어 내는 힘든 상황의 대리에게 마케팅을 위해서 새로운 데이터를 뽑아 달라고 말하는 게 아주 민망하고 애매한 상황이 되었다. 물론 아주 민망해 하며 부탁했지만 상황이 별로였다. 이게 다 SAS를 쓰는 회사 탓이었다.
어렵겠지만 조금이라도 배워서 대리의 부담을 덜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케터에게 데이터를 다루는 일은 필수라는데, 내가 대단한 마케팅을 하는 건 아닐지라도, 데이터를 주물럭거리기라도 해야겠거니 싶었다. 물론 대리 하나가 나가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고민도 안했겠지만 어쩔 수 없는 환경이 나를 "해야 하는" 상황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첫 진입장벽이 너무나 높았다. 욕을 열 번도 넘게 한 듯 하다. SAS프로그램에 접속하기 위해 사전에 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다른 산이 나를 가로막는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회사의 다양한 데이터를 다루는 일이니 보안을 위해서 몇 개의 허들을 둬야 하는 게 당연한 것일텐데 당시는 귀찮고 짜증날 뿐이었다. 상황도 짜증나는데, 과정도 힘겨우니 진도는 더디게 나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해야만 한다는 그 압박감이 그것을 견디게 만들기는 했다. 어쩔 수 없으니 욕은 하면서도 꾸역꾸역 프로그램 설치까지 하게 되었다. 겨우 겨우 산을 넘어 SAS 입구에 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입구 앞에서도 한참을 헤매야 했다. 쿼리라는 것을 만들어 데이터를 뽑아야 하는데, 뭐가 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교육이라도 받으면 괜찮을까 싶었지만 코로나로 이런 것들도 개점휴업 상태였다. 어쩔 수 없었다. 하면서 익히는 수밖에. 다행히 대리가 바쁜 와중에 이것 저것 도와주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쿼리도 주고 안되는 것들을 수정도 해 주었다. 덕분에 몇 개의 데이터를 SAS라는 "어려운" 프로그램을 통해 뽑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번 해보고 나니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렉 되었다. 패턴이 눈에 보였고, 내가 원하는 데이터를 뽑아내는 방법이 대충 눈에 그려졌다. 물론 완벽하게 데이터를 주무를 수는 없지만 흉내내는 수준은 따라할 수 있게 되었다. 하다보니 레고 블록 조립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여러개의 레고를 조합해서 그것을 연결하면 하나의 작품이 나오듯이 SAS에서 추출하는 데이터도 비슷했다. 우리 팀에서 쓰고 있는 쿼리의 조합을 달리하면 내가 원하는 데이터들이 "대충"은 나오는 구조였다. 연결하는 법만 배우면 의외로 쉽게 나왔다. 강원국 작가님께서 글쓰기는 레고 조립과도같다며 문단을 쓰고 그것을 조합하는게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데이터를 뽑는 일도 비슷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이런 이치일라나?)
한 달정도 데이터를 다루면서 SAS라는 프로그램에 조금은 친숙해졌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SAS 프로그램을 쓰기 어려워 하는 동료에게 어떻게 하면 이 프로그램을 잘 활용할 수 있을지 내가 새롭게 배운 것들에 대해서 전수해주기도 했다. (어쩌면 그 분이 나보다 더 잘 알 수도 있을텐데 어찌됐든)
복직을 하고 일하는 게 힘들고 짜증날 때도 있지만 새로운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는 건 나에게는 참 감사한 일이다. SAS 프로그램을 다룰 수 있게 되어서 좋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이면에 스스로가 정한 한계를 극복한 것도 내게는 유의미한 작업이었다. 내가 선을 긋고, 나는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 중에 의외로 어렵지 않은 것들도 많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피해 왔던 일들이 못 하는 게 아니라 안했던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남들이 하는 거라면 굳이 겁먹고 못한다고 뒷짐 질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잊고 있던 내 인생의 좌우명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이런 저런 고민이 들어 청소년 상담센터에 전화를 걸어 며칠 동안 무료 상담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상담원 분께 들었던 말 한 마디가 학창시절 내게 좌우명이 되었었다. 그리고 얼마 전 이 말을 지인의 블로그를 통해 다시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SAS를 새롭게 배우면서 이 말의 의미를 다시한번 새겨본다. 그리고 다시 내 인생의 좌우명으로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