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이 아닌 발전을 위하여
얼마 전 회사 선배 둘과 밥을 먹었다. 둘 다 신입때부터 알던 사이로, 음으로 양으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준 분들이었다. 회사에서나 일상에서나 내게 모범이 되어 준 좋은 분들이다. 그들은 나의 새로운 출발도 진심을 다해 응원했다. 책이 나왔을 때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휴직 때도 종종 불러 응원해 주었는데, 복직하고 이래저래 바쁘게 지내다 보니 꽤 오랜만에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선배 중 한 분은 다양한 사이드 프로젝트를 즐기는 분이었다. 재능이 많아 회사에서 썩기 아까운 선배였다. 요리도 잘하고, 사진도 잘찍고, 게다가 글도 잘 쓰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트렌드도 잘 알아 차렸다. 선배의 활동에 크고 작은 자극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에 대해 느끼는 약간의 질투심이 나를 움직이게 만든 것도 없진 않지만 그의 활동이 내게 좋은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선배가 최근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얼마 전 그가 내 글을 보고 댓글을 남긴 것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사실 이날 저녁 약속을 잡은 것도 그 댓글 때문이었다. 그 댓글에서 선배가 최근 여러 고민을 하는 게 느껴졌고 나도 비슷한 고민을 하던 터라 만나서 “수다”를 떨고 싶었다. 그렇게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선배가 하는 고민을 좀 더 심도 있게 듣게 되었다. 회사에서 사람이 문제인건가 싶었지만 선배는 (물론 사람의 문제도 있었지만) 오히려 다른 부분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내게 “자기 주도성”에 대한 화두를 꺼냈다. 그는 사색을 하고 또 일기를 쓰면서 자신이 왜 힘든지에 대해서 고민했다고 한다. 물론 힘들다는 감정이 단 하나의 이유로 발생하진 않겠지만 그가 계속해서 고민하다 보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힘들다는 것을 깨달핬다고 한다. 팀장의 위치까지 오른 그였고, 회사에서도 중요 부문에 있었기에 우선 의아했지만 이야기를 들을 수록 그럴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부서는 CEO의 입김에 좌지우지되는 게 많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팀장이 뭔가를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한다. 그게 선배를 힘들게 했다. 스스로가 꽤나 무기력하게 느껴졌달까?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제어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얼마나 되느냐가 일의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데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낄 수 있었다.
선배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기적으로 나의 경우를 돌아보게 되었다. 남의 고민을 듣는 자리에서 내 생각을 한다는 게 다소 미안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라 스스로를 위로하며, 내 상황을 돌아봤다. 다행히 나는 선배의 고민에서 자유로운 편이었다. 부서에서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영역이 많았다. 마케팅을 하면서 이런 저런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데 팀장도 나의 활동을 존중해 주었고, 다행히 부장은 내가 하는 일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임원들도 전체적인 숫자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새로운 시도들에 대해서는 크고 굵직한 것들 아니면 관심이 없어 내가 하는 시도들에 대해서 통제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재미나고 새로운 일이 전체 일의 20%도 안되는 수준이지만 그만큼의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어 새삼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회사에서 집중받는 부서가 아니라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주요 부서가 아니라 서글프다고 느꼈던 감정이, 동전의 양면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감사하다는 마음까지 올라왔다. 참, 사람의 마음이 이리 간사할까?
더불어 누군가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것보다 내가 스스로 찾아서 일을 하는 것에 더 큰 보람을 나 스스로 느끼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사람의 성향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복직을 하고 나서 이런 자기 주도적으로 일을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더욱 여실히 알게 된 느낌이다. 예전에는 회사에서의 성공이나 승진이 중요했다면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게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성공이나 승진에 대한 마음을 비워서 진짜 중요한 것을 찾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얼마 전 회사 동료와 밥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쩌다 보니 나 혼자 떠든 느낌이었지만 최근 일을 하면서 나의 달라진 태도에 대해 속 생각을 털어 놓을 수 있었다. 예전에는 누군가의 인정이 정말 중요한 가치였는데, 최근에는 그것에 대해 크게 연연하지 않게 된 것 같았다. 100% 초월했다고 하기에는 여전히 인정 욕구가 강한 편이지만 확실한 건 예전보다 그 욕구가 많이 누구러졌다는 점이다.
반면 얼마나 발전하고 있느냐가 지금의 나에게는 중요하게 다가오고 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어 간다는 가치로 나를 바꾸고 살았는데, 그게 회사 일에도 적잖게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하나라도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상황이 참 좋다. 물론 회사 생활의 80%는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는데 할애하고 있지만 20%라도 긍정하는 부분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자유로이 선택한 임무를 향해 분투하며 성장하기 위해 시간을 보낼 때, 우리는 더 나은 성취를 이루게 된다. 동일한 시간을 투입해도 더 많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충분한 지렛대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목표를 찾고 이루려 분투하는 순간 우리는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직업의 종말 중에서>
안정적인 직업의 개념이 모호해진 요즘의 시대에 자주 등장하는 화두가 "성장"이다. 그리고 그 성장의 바탕에는 얼마나 그 일을 자기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느냐가 놓여 있다. 물론 회사 일이라는 게 내가 주도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회사는 사장과 임원의 의사 결정을 따라야 하는 구조니까.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의 순간이 있다면 좀 더 자기 중심으로 판을 만들어 가는 노력은 필요해 보인다. 그게 꼭 오랫동안 직업을 영위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속에서 일이 주는 성취감이 더욱 높아질 수 있다는 것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이 본질적으로 재미 없다고는 하지만 100% 재미없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몇 퍼센트 안되는 재미가 나를 움직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