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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 수집가 Aug 18. 2021

엄마, 이거 먹어도 돼요?

내겐 너무 어려운 채소, 가지

난 아직도 가지가 보내는 바이탈 싸인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가지가 그렇게 몸에 좋다고 한다. 하루 다섯 가지 색깔의 채소를 먹으면 좋다는데 밭에서 나는 채소로서 가지 같은 색감을 가지는 채소는 없다. 과일도 블루베리 정도다. 그리고 지금이 제철이다. 그럼 먹어줘야지.


그런데 내게 가지는 너무 어려운 채소다. 누가 만들어 놓은 반찬으로서의 가지는 친숙하지만 밭에서 따온 생명 그대로의 가지는 너무 낯설다.


일단 어떤 상태가 먹어도 되는 상태인지 잘 알기 어렵다. 상추나 깻잎은 삭으면 먹지 않는다. 케일이나 브로컬리나 파는 노란 잎이 생기면 버린다. 감자는 싹이 나면 버리고 고구마는 썩어서 저 열대과일 리치의 맛이 나면 먹지 않는다. 그밖의 양파, 마늘, 부추 이런 것들은 상태나 냄새 등 시각과 후각으로 먹지 말라는 신호를 비교적 분명하게 보내오지만, 짙은 보라색의 신비로운 색감을 지닌 가지는 채소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내겐 너무 과묵한 편이다. 게다원체도 오이나 당근 같은 열매로서의 생기가 없다. 가지의 바이탈 싸인, 활력징후는 늘상 그렇고 그런 듯했다.


어제 냉장고에서 꺼낸 가지가 그랬다.

이 녀석은 일주일 전쯤 친정의 앞마당에서 두 개 뚝 따온 가지다. 주택 생활을 하시는 친정 부모님 댁에 들르면 언제나 채소들이 사시사철 다르게 텃밭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올 여름의 주인공은 가지와 방울토마토와 언제나 그랬듯 고추, 오이가 차지하고 있었다.

현관문에서 마당문까지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엄마는 내 손에 뭔가를 하나씩 들려 주셨는데, 그 중 하나가 마당에서 막 탐스럽게 살이 오르고 있던 가지 두 개였다. 엄마는 그 가지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뚝, 따서 내 가방 안에 넣어 주셨다.


가지를 어떻게 먹을까?


몸에 좋은 가지, 그날 저녁 반찬으로 선택되었다. 나는 비교적 나물과 구황작물류를 좋아하지만 같이 사는 남자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삼겹살과 함께 구워 식탁에 놓았더니 인기리에는 아니지만 서너 젓가락이 분주하게 오갔다.

그리고 남은 한 개의 가지는 내 기억 속에 잊혀져 갔고, 일주일도 넘은 오늘에서야 냉장고 비닐 속에서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에게 항의를 시전하고 있는 가지를 꺼내게 된 것이다.


미안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가지를 살폈다.

한쪽 부분이 조금 움푹 들어갔는데, 그게 양파나 감자처럼 썩었다는 걸 의미하는 건지 그저 약간 시들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썰어나 볼까 하며 칼로 몇 등분을 하는데 그 속은 더욱 가관이었다.



저 불규칙한 점들은 뭐지?
으, 왜 색깔은 또 빨개?
왠지 더 시들시들한 것 같아.
가지가 원래 그렇긴 하지만.


이럴 땐 방법은 하나뿐이다.


엄마, 이거 먹어도 돼요?


엄마를 호출한다. 시간은 오후 6시 2분, 엄마도 한창 저녁 준비로 바쁘실 때지만 가지의 식용 가능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 나는 조금 더 다급하다.

1분 만에 답을 주신 엄마의 카톡을 보고 나는 그야말로 풍선처럼 빵 터질 수밖에 없었다.



엄마도 모르는 게 있다니. 아니, 내가 방치한 가지의 상태가 그만큼 안 좋았던 건가?

먹어라, 또는 버려라 판관의 명쾌한 판결을 기다리는 내게 또다시 과제가 주어졌다.



우리 엄마는 참으로 초지일관 반응도 무심하다. 카톡 대화 문장으로 엄마 찾기 대회 같은 게 있다면 나는 우승할 자신이 있다. 우리 엄마의 '봐서'는 내가 가장 어려워 하는 말이다. 결국 그날의 가지는 '봐서' 상태를 확인하기 어려운 나로 인해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졌다.

(이건 엄마에게 비밀에 부쳤다. 주신 가지를 그냥 버린 게 죄송하기도 하고, 먹어도 되는데 버린 건 아닌지 가지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언제쯤 가지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될까?

우리 엄마를 주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오히려 쉽지 않듯,

내 평생 가장 합당치 못하고 어색한 호칭이 주부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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