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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 수집가 Oct 14. 2021

사랑은 말로 하세요, 연필로 쓰지 말고

부모와 아이가 모두 행복한 무심(無心) 육아 네 번째 이야기

4. 사랑한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사진처럼,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확실한 한 컷의 기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나는 과묵한 부모님 아래 2남 1녀 중 둘째로 자랐다. 그게 큰 문제는 아니었는데 어린 시절 많이 읽은 전래동화의 영향이었는지 폭주하는 상상력 때문인지 나는 자주 내가 부모님의 친자식이 맞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갖기도 했다. 그러다 사춘기에 도달하자 과연 엄마 아빠는 나를 사랑하는 걸까? 하는 깊은 의구심을 느꼈다. 백일장에서 장원을 해서 기쁜 마음으로 상장을 휘날리며 대문을 열어도 부모님은 그저 별말 없이 '아이고...' 하시며 벙긋 웃으실 뿐이었다. 삼 남매 중에 가장 공부를 잘해서 상을 받아와도 항상 오빠와 남동생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셨다. 나는 그게 참 속상했고 강한 인정 욕구 앞에서 자존감도 떨어졌다. (그때는 자존감이라는 단어도 쓸 줄 몰랐겠지만) 유달리 표현이 적은 부모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던 내가 부모님과의 일을 샅샅이 떠올리며 사랑의 증거를 찾다가 문득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떠오른 모습이 있었다. 바로 아빠가 나를 무릎에 앉히고 동화책을 읽어 주던 평범한 기억이다.


참으로 과묵한 분이었지만 아빠가 무릎에 나를 앉히고 세상에 없는 다정한 음성으로 책을 읽어 주었던 그 평범한 기억은 아, 나도 사랑받았었구나 하는 분명한 증거로 그 이후 세상을 살아가는 자존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직장에서 누군가의 몹쓸 핍박을 받을 때도 왜 이래, 나 우리 엄마 아빠 소중한 양념 딸이야를 마음속으로 외치고 나면 기분이 좀 풀렸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그 시절 부모님의 과묵함과 고됨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어쨌든 나는 사랑받는다, 그 확신은 한 개인에게 생각보다 훨씬 아주 많이 중요하다.


나는 부모님 딸이다. 나 역시 표현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그렇지만 바람이 있다면 내 아이도 엄마와의 이 많은 시간들을 평면적 기억이 아닌 입체적 추억으로 되새기며 '사랑의 증거'가 모인 두툼한 사진첩 같은 어린 시절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다. 살면서 외롭고 힘들고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일 때 들춰보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그런 사진첩 말이다.


이때 핵심은 구체적이고 정확한 표현으로 그 사실에 확신을 준다는 것.


엄마는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이
너를 낳은 일이야!
엄마가 퇴근하면서 빨리 아들이랑 놀아야지
하면서 왔지!
우리 아들은 엄마의 비타민 같아.
엄마가 교장 선생님 때문에 엄청 화가 났었는데
아들 덕에 풀렸어!


위 표현들은 때로 사실에 위배된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잘한 일이 아이를 낳은 것임은 확실하지만 퇴근하면서 빨리 아이와 놀아야겠다고 설레며 현관문을 열기란 쉽지 않다. 내 아이가 내게 비타민 같은 존재는 맞지만 때로 그 아들 탓에 화가 더 치솟기도 한다. 그러나 열에 한 번일지라도 사실은 사실이다! 감정이란 다수결이 아닌 농도와 밀도이므로 그 횟수에 괜한 저울질을 하지 않는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의 길 가운데에서 가끔은 육아가 너무 고되어 혼자만으로 삶이 가득 찼던 그 순간이 그리워진다. 그러나 또 분명한 것은 그 힘겨운 속에서도 문득 유난히도 아이에 대한 사랑과 감사가 물밀 듯 치밀어 오르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일에 치인 엄마가 차린 반찬 없는 밥을 야무지게 한 술 떠서 그 작고 예쁜 입으로 오물거릴 때, 먹고산다는 일이 이 작은 아이에게 얼마나 숭고하고 가슴 짠한 일인가 생각한다. 학원이나 학교를 데려다주면 문 앞에서 꼭 한 번씩 엄마를 바라보고 웃어주고 몸을 돌릴 때, 나는 갑자기 그 헤어짐이 너무나 아쉽다. 잠깐 아이 어깨를 감싸 안았을 뿐인데 새끼 강아지처럼 내 품에 자기 얼굴을 격렬히 파묻을 때, 너는 정말 세상에 하나뿐인 내 편, 내 핏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나는 그 순간의 기분과 감정을 흘려보내지 않고 가장 구체적이고 정확한 표현으로 아이에게 전달한다. 말하지 않으면, 그때의 나처럼 슬픈 탐정이 되어 사랑의 증거를 수집하는 외로운 사람이 될지 모르니까.




[덧붙이는 글] 부모와 아이가 모두 행복한 무심(無心) 육아 네 번째 이야기로 마무리를 합니다. 어쭙잖은 글 속에 '행복'과 '무심'이라는 단어를 감히 넣어 보았습니다. 오늘도 아이와 하루를 살아내는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마음으로 경의를 담아 안부를 전합니다.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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