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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Jun 17. 2024

종로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독일에서 자동차 구입하기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 처음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1톤짜리 트럭. 1종 보통면허를 위한 연습이었다. 언젠가 유럽에서 운전을 하게 될 수도 있으니 스틱으로 따야겠다고 야심차게 나선 길이었다. 그건 긍정의 최전선이었다. 반대편에선 아포칼립스의 미래가 번뜩였다. 재난을 피해 도망쳐야 할 때, 찬 밥 더운밥 가릴 시간은 없겠지. 그저 보이는 아무 차나 몰고 떠나야 하지 않겠어? 그리고 그런 상황에선 육중한 차량이 유리하겠지. 2014년의 나는 그런 상상을 하며 트럭의 시동을 켰다. 시동보다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필기, 기능, 주행. 3번의 시험을 단번에 통과했다. 비록 기능시험 중간에 시동을 꺼트리는 위기가 있었으나 침착하게 다시 키를 돌렸다. 얼떨결에 면허증을 쥐었으나 도로 위 실전은 너무나도 무서웠다.


출근길 회사 주차장의 자바라식 철제문을 들이받았을 땐, 비틀의 사이드미러가 우스꽝스럽게 깨졌다. 물론 그때의 나는 회사와 관련된 무엇이든 들이받고 싶어 했으나 이런 물리적인 방식은 위험했다. 급히 운전 연수를 받기로 했다. 5일간의 수업, 그 마지막은 고속도로 주행이었다. 퇴근길 하행선을 타고 만남의 광장까지 가는 길. 시속 50km에도 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선생님의 지시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어쨌거나 주춤주춤 나아갔다. 그렇게 연수가 끝나고 본격적인 운전을 시작했다. 클러치를 밟아가며 기어를 휙휙 바꾼다. 이러다 왼쪽 하체 근육만 발달하는 거 아닌가 싶었던 도심의 출퇴근길. 최적의 효율을 위해 미리 차선을 변경하고, 얌체같이 밀고 들어오는 차에겐 절대 틈을 주지 않던 나.


제법 날렵한 실력을 갖추게 된 건 두 번째 차를 몰면서부터였다. 모닝, 내 오랜 사랑. 연비도 좋고 주차하기에도 좋았다. 재빠르게 치고 빠져도 차체가 작으니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 안에서 나는 많은 일을 했다. 커피를 마시고 빵을 삼키며 팟캐스트와 라디오를 들었다. 모닝은 작은 까페이자 움직이는 가방, 때론 그냥 방. 잡동사니들을 싣고 종횡무진 서울을 누볐다. 혼자 있고 싶을 때, 유난히 마음이 힘들 때. 나는 신호를 기다리며 울음을 훔치기도 하고, 내부순환로의 터널을 지나며 무서운 상상을 하기도 했다. 가끔은 누군가 사고로 완파된 모닝에 대한 뉴스를 들려주기도 했다. 뭐, 그럼 어쩔 수 없는 거죠. 진심으로 한 답변이었는데 상대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이왕이면 한 방에 쾅. 그때의 난 뻘밭에 발을 담근 채 서 있는 마음이었으니.


모닝 다음엔 니로, 그다음엔 스포티지. 카시트를 달기 위해 차의 부피는 커지고 스틱도 오토로 바뀌었다. 내 왼발은 이제 무료해졌다. 앞뒤로 카메라가 생기고 각종 센서들은 민첩하게 반짝였다. 운전은 점점 안락해졌다. 이건 뭐 강변북로를 달리는 흔들의자랄까. 꼬마는 카시트에서 꾸벅꾸벅 잘도 졸았다. 주행이 편안하단 말이겠지, 나는 깊이 안심했다. 클락션은 짧고 날카롭게, 비상 깜박이는 제 때 제 때. 육중한 차체는 부드럽게 나아갔다.


출국 며칠 전 스포티지를 팔았다. 새 주인을 만나 떠나는 차의 뒷모습. 차를 팔면서 우는 사람도 있다는데, (실은 그런 사람과 살고 있다) 나는 눈물까진 나지 않았다. 고마웠다, 잘 가라. 이 정도의 담담함으로 떠나보냈다. 새로 어떤 차를 타게 될 것인가 상상하기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면허증 갱신과 국제면허증 발급만 겨우 해냈다. 이사와 적응. 버스와 지하철, 트램으로 도시를 알아가는 사이 계절이 바뀌었다. 슬슬 운전 생각이 났다. 차를 사긴 사야 하는데 어떻게 사야 하지. 시간이 날 때면 자동차 매장에 들러보았다. 벤츠, 아우디, 폭스바겐. 제일 신이 난 건 꼬마였다. 전시된 모든 차에 오르락내리락하며 열심히 둘러보더니 결론을 냈다. 엄마, 폭스바겐 미니밴을 사자. 하! 미니밴? 물론 멋지긴 하지. 그렇지만 엄마는 조금 더 작은 차를 살래.

스포티지를 판 돈으로 비슷한 급의 차를 살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었다. 알고 보니 한국은 미국과 더불어 차가 무척 싼 나라라고. 독일에서 파는 현대, 기아차도 한국보다 훨씬 비쌌다. 이걸 이 돈 주고 사?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매장들을 오고 갔다. 차를 좋아하는 달과 꼬마는 죽이 척척 맞아 테슬라에서 시승도 하고 왔다. 아무래도 보태보태 병의 기미가 보였다. 나는 적당한 선에서 끊어줘야 함을 느꼈다. 그래서 선언했다. 작은 차가 좋다. 작고 예쁘기론 피아트 친퀘첸토가 최고지만 카시트가 있으니 투 도어는 곤란하다. 길이는 짧아도 되고 높이는 있는 게 좋다. 컬러는 무난한 것으로. 옵션은 가리지 않는다. 후방 카메라와 핸들, 시트 열선만 있으면 된다. 신차나 중고차나 상관없다. 땅땅땅. 이 정도면 굉장히 무난한 조합의 조건이라 생각했는데


이게 영 어려웠다. 일단 차량 구매 시 옵션을 하나하나 다 선택할 수 있었다. 컬러같이 취향과 관계된 것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기능과 관련된 것까지도 다 고객의 선택이었다. 핸들의 버튼, 차량 로고 제거 여부, 로고 색깔, 루프 색깔, 헤드라이트 워셔, 유리 워셔의 열선, 워셔액 경보, 스피커, 라디오, 스마트키, 전동 트렁크, 뒷좌석 유리의 썬팅 정도 등등. 이걸 다 선택할 수 있다고요? 그냥 패키지로 묶어서 넣어주면 안 되나요? 그러니까 깡통으로 타겠다 하면 진짜 엔진과 핸들, 문과 의자만 있는 깡통으로도 탈 수 있다는 거다. 반대로 이것저것 다 끼워 넣으면 체감상 우주선도 가능한 거고.


게다가 수족냉증인 내게 중요한 핸들과 시트 열선은 이 나라의 보편적인 옵션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 조건에 부합하는 차를 찾기가 더욱 어려운 상황. 게다가 매장의 딜러들도 한국처럼 본격적으로 달려들어 세일즈를 하려는 기색이 없었다. 일단 일요일엔 영업을 하지 않거니와, 원하는 사양을 설명해도 이에 맞춰 출고하려면 몇 달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싸지도 않아! 우리의 차량 구매 여정은 점점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냥 가까운 매장 가서 전시된 차 아무거나 몰고 나오고 싶다. 이래서 1종 따두길 잘했군. 어쩐지 고객에서 도둑으로 바뀌려는 지점에서 달이 괜찮은 차를 찾았다고 했다.


폭스바겐의 소형 suv. 회색 약간 섞은 베이지에 카메라를 비롯한 안전 옵션과 핸들, 시트에 열선도 있다. 시트 조절은 수동으로 해야 하고, 뒷좌석 썬팅은 안 되어있다. 제법 단정하고 귀여운 모델로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런데 매장이 라이프치히 근처다. 차량 구매를 위해 방문하는 고객을 위해 호텔 1박도 제공한다는데 그곳까지 갈 짬을 또 어찌 낼 것인가. 다행히 탁송 서비스가 있다. 그럼 이걸로 하자! 차차 일이 풀리기 시작한다. 대금을 지불하고 차량과 번호판도 등록한다. 번호판의 맨 앞은 국가명으로 독일은 D로 시작한다. 그다음은 도시나 지역명. 프랑크푸르트는 F다. 그 뒤가 개별적인 번호로 이건 자기가 정할 수 있다. 영문과 숫자를 조합해 보다 머리를 스친 것은 종로, 내 운전의 기원. 그래서 내 번호판은 사직동의 우편번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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