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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일일기

Ich mag Lila..

난 보랏빛이 좋아..

by 한량

날씨가 변화무쌍하다. 비가 쏟아졌다가 무지개가 떴다가 해가 쨍쨍하더니 차가운 바람이 불어닥친다. 하루에 4계절이 다 있는 느낌이다. 사람들 옷차림도 그러하다. 반팔과 반바지부터, 패딩에 모자까지. 지구는 성실히 공전하고, 그래서 하루하루 깊어지는 날들이다. 발코니의 화분들도 그렇다. 바질과 부추는 작은 꽃을 틔웠다. E님이 주신 깻잎은 여전히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며, 꼬마가 초여름 수확한 콩을 다시금 심은 화분에선 꽃망울이 맺혔다. 콩 2알이 17알이 되었고, 그중 10알을 다시 심었으니 이번엔 과연 얼마나? 이모작이 가져다줄 미친 복리의 은혜랄까. 꼭 밭두렁 과자처럼 생긴 옥수수 씨앗은 쭉쭉 자라더니 요즘 좀 시들해졌다. 잎의 끝부분이 마르고 대도 퍼석퍼석해졌다. 살아는 있는 거니? 하고 처진 잎을 들추다가 깜짝 놀랐다.


부들부들한 줄기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기울었다. 줄기엔 옅은 회색의 알갱이들이 달려있고, 그 안에 든 길쭉한 모양의 낱알들은 누가 봐도 쌀이나 뭐 그런 종류로 보인다. 아무리 봐도 옥수수는 아니다. 난 분명 옥수수를 심었는데 이건 뭐람. 그나저나 익은 벼일수록 고개를 숙인다니! 진짜 그렇네! 가을 햇살 아래서 번짓수가 안 맞는 감탄을 하고 만다. 그리고 이제껏 뻐꾸기 둥지를 돌봐온 듯한 머쓱함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아, 이 계절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지극히 가을다운 메타인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쨌거나 꾸역꾸역 독일어 공부를 하고 있다. 진도를 나가면 나갈수록 가파른 협곡을 헤매는 느낌이다. 하하, 이제 이건 알겠어! 하고 나면 새로운 낭떠러지가 나타난다. 더듬더듬 단어를 꿰어 맞출라치면 드높은 절벽을 마주한다. 얼마 전 독일에 오신 지 9년 차 되었다는 분과 잠깐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독일어 과외를 받다가 이건 아니지 하며 때려치웠다는 부분, 지금 내가 그 부분을 공부하고 있다. 단어의 관사와 격에 따라서 수식하는 형용사의 형태가 달라지는 대목. 그러니까 '검은 치마'와 '검은 치마를'에서 '검은'의 철자가 달라진다는 거다. 쓰면서도 헛웃음이 아니 나올 수 없다. 결국.. 모든.. 단어의.. 관사와.. 격 변화를.. 다.. 외워야.. 하는.. 거다.. 지금껏 지독하게 외면해 왔지만 맞닥뜨린 진실은 변함없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뻔뻔함도 갖추게 되었다. 일상생활에서 내가 받아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발음이나 어순이 조금 틀려도 뭐, 난 외국인인데? 어쩔 거야? 난 한국어 진짜 잘하거든? 의 기세도 필요하다. 스스로 세운 독일어 목표의 첫 번째인 음식 주문, 물건 사기 등을 위해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이 필요하다. 인사,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기, 세부적인 디테일을 설명하기, 결제 방법 말하기, 감사 인사. 이걸 그냥 통으로 외워버리는 거다. 그래서 나는 까페에 들어가 눈을 마주친 직원 앞에 서서 마음을 다잡고 입을 달싹인다. 참고로 까페는 작고 아늑하고 유서 깊어서 남몰래 단골이 되어버린 까페다. 연설을 하기엔 몹시 적절치 않은 장소이기도 하다.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예요. 나는 탄자니아 루부마 원두 500g을 원해요. 분쇄하지 않은 홀빈으로 주세요. 비닐백 말고 종이봉투에 담아주세요. 다른 건 필요 없어요. 카드로 계산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이 정도의 단방향적 기세라면 어린이 웅변대회가 따로 없다. 직원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 원두의 무게를 재기 시작한다. 그제야 참은 숨을 몰아쉬는 나. 이건 아주 성공적인 예시다. 대부분의 경우는 이렇다. 머리로 만든 문장을 힘차게 내뱉기 시작한다. 보통의 대화처럼 상대가 독일어로 되물어오는 순간 뇌가 정지한다. 내 난감함을 감지한 상대가 '잉글리쉬 베터?'라고 물어오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스, 플리즈 라고 대답한다. 철썩철썩 파도처럼 밀려드는 씁쓸함과 쓸쓸함. 포말같이 부서지는 부끄러움은 모두 내 것이다. 부정할 수가 없다.


그래도 계속하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 A2를 목표로 하면 A1 정도는 될 것이고, B2를 준비하다 보면 B1엔 자연스레 이르지 않겠어? 자신의 무지함과 마주하는 건 영 부담스럽고 버거운 일이나 그 어쩔 줄 모르는 당혹함을 위해 책을 편다. 연필로 모르는 단어에 줄을 긋고-그래서 모든 페이지가 권사님의 성경 같아졌다-, 빈칸 하나를 메우기 위해 잠든 뇌세포를 동원한다. 거기엔 식탁에 책과 노트를 펼쳐놓고 깊은 주름을 만들고 있는 모습이 꼬마에게 뭐라도 좋은 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음흉함도 숨어있다. 그럴 때면 꼬마는 쓱 다가와서 내게 퀴즈를 내곤 한다. 독일어로 고슴도치가 뭐게? 독일어로 기린이 뭐게? 독일어로 보라색이 뭐게? 몰라.. 모른다고.. 그저 난 보랏빛이 좋다고.. 넌 도라지꽃 알아? 황순원 아냐고..


이럴 때 3차원적 한계는 오히려 도움이 된다. 미래를 알지 못한 채, 그냥 꾸역꾸역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 그 무딘 노력의 끝이 어디일지 모르기에 어렴풋한 상상이라도 해야 한다. 상상 속 나는 제법 날카롭다. 어수룩한 구석이라곤 없달까. 그런 나는 이런 일들을 잘 해낸다. 횟감용 생선을 치밀하게 주문하기, 날씨에 관해 지독한 농담하기, 라디오 들으며 피식피식 웃기, 광고 보면서 정확하게 현혹당하기-지금은 별다른 광고 효과가 없다-, 나아가 독일소설 원어로 읽기까지. 그래서 다시 책을 편다. 일말의 기대도 없이 공부하기엔 여긴 너무 보랏빛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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