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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간MD Mar 03. 2022

[아버지의 서재] 와인이야기 - 미처 못한 이야기

원문의 앞부분에 등장하는 '와인의 역사' 이야기인데요, 너무 길어 아껴뒀던(?) 내용입니다. 문단의 앞부분에 소제목을 덧붙여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우연히 발견된 음료, 와인

이 지구 상에 인류가 처음 출현한 시점을 약 300~350만 년 전으로 추정하는데 포도나무는 인류 탄생 훨씬 전인 약 700만 년 전부터 있어 왔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포도는 열매를 맺었고 익은 열매는 떨어져 나무 밑에 쌓이고 포도알 속의 당분이 발효하면서 포도주가 만들어졌다. 지구 상에 등장한 인류는 최초 사냥과 함께 열매와 곡식을 채집해서 먹거리로 삼았다고 예상되는데, 자연스레 웅덩이와 나뭇잎 사이에 고인 액체를 맛보았을 테고 그들은 이 액체를 마시면 평소에 못 느끼는 기분을 느낀다는 사실과 함께 이 액체를 만들어 마시게 되었으며, 마시면 취하는 이 신비로운 음료는 곧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 되었다. 이렇듯 최초의 와인은 인간이 의도하여 만든 음료가 아니었다. 


종교의식에 사용되며 확산된 와인

포도주 즉 와인은 오로지 포도만을 사용해 만드는 음료이며 포도 이외에 다른 물질은 첨가하지 않는다. 단지 와인이 병 속의 산소와 접촉해 식초로 변하는 것을 막고자 와인을 병입 하여 봉할 때 산화방지제로 아황산염(Sulfite:SO2) 가스를 첨가하는데 이는 와인의 신선도를 유지하고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고 코르크를 빼는 순간 공기 속으로 증발한다. 1907년에는 ‘와인’은 포도 또는 포도즙만을 발효시킨 음료라는 법적 규정이 만들어졌다. 와인은 19세기 초에는 식품으로 취급하였는데 1820년에 알코올 성분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기호품으로 분류되기에 이르지만, 그 이전에는 위스키 같은 증류주에만 알코올이 있다고 알았지 순수한 자연 음료인 와인에 알코올이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고, 이로써 와인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변하여 식품에서 기호품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편 와인은 오래전부터 음용되었으나 기독교와 함께하며 전 세계로 전파된다. 실제 와인은 기독교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제사의식의 필수품으로 종교적인 의미와 함께 사용되었다. 인류가 수집과 채취로 연명하던 시대에는 종교가 없었다고 짐작되나 인간이 사냥을 시작하면서부터 자신들과 같이 살아 움직이는 존재를 죽여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얻고, 이때 흘러나오는 피가 인간의 피와 같은 붉은색이며 죽고 죽임을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지전능한 존재인 신을 믿게 된 것이라고 종교의 기원은 밝히고 있다. 이로써 인간을 대신하는 동물을 재물로 하여 동물의 피와 같은 붉은색인 포도주를 함께 바쳤던 것이다. 그래서 와인은 기독교보다 훨씬 이전 메소포타미아 시대에도 이미 종교적 색채를 지니고 있었으며 와인의 붉은 색깔뿐 아니라 그 자체로서 죽음과 부활을 연상하여, 가을에 시들기 시작한 포도나무가 겨울이 되면 마치 죽은듯하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소생해서 싹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부활의 상징으로 신비롭고 종교적인 의미로 자리하였다.


성서에 실린 와인 이야기

성서에 언급된 와인에 대한 이야기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약성서 창세기 9장에서 최초로 와인에 취한 사람을 ‘노아’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와인으로 인해 인류의 죄악인 근친상간이 벌어진 이야기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들에게 벌을 내려 불탄 소돔과 고모라에서 살아남은 자가 이스라엘 민족의 선조인 아브라함의 조카 롯 Lot과 그의 두 딸이었다.(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되었다.) 아이를 낳아줄 아내가 없는 롯으로 인해 가문의 후손이 끊어질 형편을 우려한 두 딸이 아버지 롯에게 술 Wine을 먹여 취하게 하고 차례로 잠자리에 들어 낳은 큰 딸의 아들이 모압족의 선조인 모압이고, 작은 딸의 아들이 암몬족의 조상인 벤암미이다. 또한 신약성서에도 와인이 자주 언급되는데, 갈릴리 가나 Cana/Kava의 결혼식에 초대받은 예수가 포도주가 떨어져 손님을 대접하지 못한다는 어머니 마리아의 말을 듣고 항아리에 채운 물이 와인으로 변하는 기적을 베풀었음이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포도나무에 비유하며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니라.”라고 했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한편 와인이 기독교에 절대적인 존재가 된 것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이 떡 Bread은 내 몸이요 이 포도주 Wine는 내 피니라.”라고 언급하여 와인은 기독교 세계에 없어서는 안 될 불멸의 음료가 되었다.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에 또한 와인은 종교적 의미를 지녔다. 그리스인들은 와인의 신 ‘디오니소스’를 로마시대에는 와인의 신 ‘바쿠스’를 숭배하였다. 여기에 기독교의 전파와 함께 포도재배가 가능한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고 신대륙 발견과 식민지 시대의 개막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퍼졌다. 아시아의 중국과 일본은 기독교 선교사에 의해 와인이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상업적인 이유로 확산되었다. 고대 이집트 또한 기원전 3,000년대에 재위한 스콜피온 1세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에서 수백 개의 와인 단지가 발견되었고, 1922년 발굴된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36개의 와인 단지가 묻혀있었는데 기원전 1345년 산, 1344년 산, 1340년 산 등 와인의 빈티지(포도를 수확해서 와인을 제조한 연도)와 포도 경작지, 양조자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기원전 2,000년 전부터 재배되기 시작한 포도는 고대 그리스 시대인 기원전 3세기에 이미 와인 제조가 산업화 단계에 있었으며, 흙으로 빚어진 두 개의 손잡이가 달린 암포라 Ampora에 저장하였고 1천 리터 정도 크기의 크라테르 Krater라는 커다란 단지에 부어서 물을 섞어 마시는 일상적인 음료로 자리하였다. 백 명이 모이면 백 가지 의견을 말한다는 그리스에서는 물을 탄 와인을 마시며 밤이 새도록 토론과 대화를 즐기는 심포지엄이 유행하였는데 심포지엄이란 말 또한 그리스어로 ‘함께 마신다(Sym 함께+Pocium 마신다)’라는 뜻으로, 맛과 향을 즐기며 서서히 취하는 과정을 즐겼던 것으로 여겨진다.


도시의 확장을 등에 엎고 확산된 와인 문화

로마 또한 인구 10만의 조그만 도시국가가 기원전 300년경엔 100만 명에 이르는 도시로 팽창하면서 그리스로부터 유입된 와인 수요 또한 폭증하였다. 로마인 1인당 하루 0.5리터의 와인을 소비하여 1년 소비량이 1억 8천만 리터에 이르렀으며 이는 현재 와인병이 0.75리터임을 감안하면 2억 4천만 병에 이른다. AD79년에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매몰된 폼페이에 당시 주점이 200개가 있었으며 이곳 폼페이는 로마제국에 있어 가장 중요한 와인 거래 항구였음에 와인 무역 거점이 사라지고 와인 품귀현상으로 가격이 폭등하자 너도나도 와인 생산에 뛰어들어 와인은 몇 년 지나지 않아 공급과잉으로 가격이 폭락하기에 이르러 더 이상 로마에 포도밭 개간을 금지한다는 ‘도미티아누스 칙령’이 AD92년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원래 로마인들의 주식은 곡물과 치즈, 야채로 끓인 죽이었으나 AD2세기경 빵으로 바뀌게 되는데 ‘젖은 음식’인 죽에서 ‘마른 음식’ 빵으로 바뀌며 와인 수요가 폭증하기에 이른다. 이렇듯 와인은 고대 로마인의 주식이자 약이며 문화이자 종교로써 사랑받는 음료로 자리하였고 교양인들은 와인에 물을 타서 마시는 게 일상적 매너였다. 한편 서로마 멸망 후 동로마로 분할된 비잔틴 제국에서도 일상의 와인문화가 지속되었고 와인에 후추, 계피, 허브 등 향신료를 첨가한 와인이 유행하여 비잔틴(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중동지역에 향신료 무역이 성행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와인 산업의 발전과 오늘의 와인

AD1,000년경 4천만 명 정도의 유럽 인구가 1,300년에는 8천만 명으로 2배가량 늘어나면서 와인 소비량도 늘어났고 특히 기독교의 전파와 함께 수도원과 교회를 중심으로 와인문화가 전 유럽에 퍼지게 되었다.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와인이 생산된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기독교 세계와는 달리 반이슬람 세력과 전쟁을 치르며 종교를 지키고 포교를 위하고, 게다가 마호메트가 음주를 금한 후로 와인문화가 소멸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로마시대부터 포도 생산지로 유명했던 보르도와 부르고뉴의 와인 생산이 크게 늘었고 또한 프랑스 루이 7세의 왕비였던 엘레오노르 Eleonore가 이혼 후 노르망디 대공인 헨리와 1152년 재혼하면서 당시 잉글랜드가 노르망디 공의 지배를 받고 있었음에 따라 헨리가 영국 왕위에 오름을 계기로, 와인이 거의 생산되지 않는 영국으로 보르도 와인이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백년전쟁이 발발하여 영국은 와인을 보르도 대신 스페인 리오하 Rioja에서 수입하게 되었고 강한 태양빛으로 인해 보르도 와인보다 색도 진하고 맛도 강한 스페인 와인이 널리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스페인 와인보다 색이 밝고 맑은 보르도 와인을 ‘클라레’라고 불렀는데 이 말이 전해져 지금도 보르도 와인의 애칭으로 통하고 있음은 앞부분에서 전술한 바 있다. 이렇듯 유럽에서는 중세에 와인은 빵과 함께 주식으로 자리 잡았고, 잦은 전쟁과 함께 군대에서도 빠뜨릴 수 없는 주요 보급품이 되었으니, 이는 전쟁터의 식수를 신뢰할 수 없음에 따라 식수의 오염에 따른 전염병을 막아주고 에너지 공급은 물론 군사들에게 용기를 주고 사기를 드높여 주는 마법의 음료로 자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가 와인산업에 높은 세금을 매기자 장삿속 밝은 네덜란드인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와인 수입원을 바꾸었고 포도주에 와인을 증류한 브랜디를 넣어 알코올을 강화한 와인을 대량 수입하였으며 이렇게 해서 스페인의 셰리 Sherry/Jerez와인과 포르투갈의 포트 Port/Porto와인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17세기에 이르러 코르크 마개는 와인산업에 대혁명을 불러왔다. 실상 그리스 시대에도 코르크나무와 송진을 이용해 암포라를 밀봉하여 와인이 상하는 것을 막아왔었는데 이 코르크나무가 와인 병마개로 화려하게 부활하여 와인의 장기보존과 숙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으며 또한 프랑스의 상파뉴 등에서 발포성 와인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탈리아는 사실 고대 로마시대부터 포도농사가 시작된 와인의 종주국이며 유럽 제1의 와인 생산 국가이다(포도생산 1위는 스페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전쟁으로 인해 와인문화 또한 척박해져서 적극적인 시장이 형성되지 못함에 따라 프랑스 와인과 경쟁할 처지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870년 통일을 계기로 이탈리아 와인의 고급화라는 캠페인을 시작함을 계기로 싸구려 와인이라는 오명을 벗고 오늘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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