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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경아 Nov 11. 2018

아무도 욕하지 않았다

내 안에 소심하고 약한 아이 하나가 자꾸만 나를 비난한다.



[#] 노래를 듣고 떠오른 이야기로 만들어진 미니 연재소설입니다. 참고로 지금 외롭고 웃긴 가게에서는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이라는 노래가 흐르고 있습니다.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 노래 듣기♪


중절모 할아버지가 오셨다. 영선은 할아버지를 누구보다 반갑게 맞았다. 요즘 통 볼수가 없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오시니 영선은 진심으로 반가웠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요즘 통 오시질 않으셔서.”

“노인네가 어딜 가긴. 그냥 몸살이 좀 있어서요.”

“감기 걸리셨구나. 조심하셔야 돼요. 요즘 감기 독해서. 유자차 있는데, 그걸로 드릴까요?”

“아니, 난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왔어요.”

“하하, 네. 커피 둘, 설탕 둘, 프림 둘 맞으시죠?”     


할아버지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선은 전기 주전자로 물을 끓이고, 일명 다방커피를 준비했다. 아주 가끔 임 사장이 공짜로 믹스커피를 찾기는 하지만, 영선 가게에선 중절모 할아버지만을 위한 특별한 메뉴, 다방커피가 다.     

 

[사진출처]http://gurugyul.tistory.com/299


중절모 할아버지를 처음 만난 건 약 1년 전 추운 겨울날이었다. 영선이 화장실을 가기 위해 가게 문을 나서려는데 한 할아버지가 영선의 가게 앞에서 쭈뼛쭈뼛 거리고 있었다. 영선은 가게로 나가지 않고 할아버지를 가만히 지켜봤다. 할아버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눈치 빠른 영선은 가게 문을 열고 할아버지에게 먼저 웃으며 인사했다. 그러자 중절모 할아버지가 빨간 귀를 문지르며 쑥스럽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영선의 친절함에 용기를 얻었는할아버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가게로 들어왔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할아버지를 위해 영선은 뜨거운 커피를 바로 내렸다. 뜨거운 김이 폴폴 나는 아메리카노 커피를 할아버지에게 가져다 드리나서야  영선은  화장실에 다녀왔다. 다시 가게로 돌아왔을  영선은 할아버지의 커피 잔을 보고 할아버지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할아버지는 아예 커피를 마실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그저 커피 잔을 앞에 두고 창밖 구경만 열심히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지금 시간에 커피 드시기가 좀 그렇죠? 우유라도 따뜻하게 데워 드릴까요?”

“아이고, 아니에요. 그냥 이런 걸 마실 줄 몰라서.......”

“혹시, 그럼 다방 커피는 어떠세요?”     


영선은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영선 할아버지는 어린 영선이 타드리는 인스턴트커피가 제일 맛있다며 항상 영선이 만든 커피만 드셨다. 커피 둘, 설탕 둘, 프림 둘. 맛이 없을 수 없는 비율이었지만, 다방커피를 맛있게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 물의 양조절이 중요하다는 것을 어린 영선은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영선은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재주가 있었던 모양이다. 영선은 극구 사양하는 중절모 할아버지를 위해 오랜만에 다방커피라고 불리는 인스턴트커피를 정성스레 만들었다. 미안해 어쩔 줄 몰라하시던 할아버지도 영선이 탄 다방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금세 얼굴이 환해졌다. 그 후로 할아버지는 주로 손님이 없는 한가한 시간에 영선 가게에 들러 다방커피를 마시곤 했다. 물론 중절모  할아버지는 임 사장처럼 공짜로 믹스커피를 얻어 마시는 뻔뻔한 손님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커피 값을 받지 않으려는 영선을 위해 항상 테이블에 아메리카노 커피 값을 가지런히 두고 가셨다.   

   

     

중절모 할아버지는 오늘도 다방커피를 드시며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영선은 그런 할아버지의 얼굴이 평소보다 많이 야위어 보여 걱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걸음도 예전 같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손님들의 음료를 만드는 와중에도 영선은 계속 할아버지가 신경 쓰여 할아버지에게 어디가 불편하신지 물어볼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바쁜 일이 끝내고 겨우 한숨을 돌리려는데, 할아버지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멋진 중절모를 살짝 들어 올리며 영선에게 이제 가보겠다는 인사를 했다. 영선은 다음을 기약하며 가게를 나서는 할아버지를 배웅했다.      


사실 영선은 평소 나이 드신 손님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반말을 하거나 무리한 요구들을 뻔뻔하게 하는 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절모 할아버지는 그런 분들과 전혀 달랐다. 모든 면에서 배려 있고 조심스러운 분이셨다. 오히려 너무 조심스러워서 안쓰럽고 안타까울 정도였다. 영선은 그런 중절모 할아버지가 느릿한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지금 가시면 또 언제 볼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더듬더듬 건널목을 건너는 것을 보고 나서야 영선은 할아버지가 앉았던 테이블을 치우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평소와 같이 할아버지가 앉았던 테이블 위에는 커피 값이 조신하게 놓여 있었다. 그런데 평소와 다른 것이 하나 보였다. 어설프게 두 번 접어 둔 종이쪽지였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내일 요양원으로 가게 돼서 앞으로는 맛있는 커피 못 마실 것 같아 마지막 인사 남겨요. 자주 생각날 거예요. 커피 둘, 설탕 둘, 프림 둘 넣은 맛있는 커피./     


영선은 시야가 우유 거품처럼 뿌옇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더듬더듬 테이블을 겨우 치우고 영선은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랜만에 자신을 위한 달콤하고 맛있는 다방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커피 둘, 설탕 둘, 프림 둘. 스푼으로 커피 물을 휘휘 저으며 영선은 생각했다. 이제 영선에게 다방커피는 맛있는 커피가 아니라 그리운 커피가 되었다고.          



#노래소설 - 그 겨울의 찻집(조용필)  

   

 언제나처럼 오늘도 마땅히 할 일 없이 집을 나섰다. 한 걸음도 허투루 쓰지 않는 아침 출근길 사람들의 발걸음 속에서 박자를 놓친 내 어색한 발걸음은 자꾸만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는 바삐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는 나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내 손자 손녀가 아닌데도 대부분 그렇게 부른다. 그렇게 사람들은 듣는 사람 심정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편한 데로 그렇게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렇게 모두의 할아버지가 된 나는 꽤 고립되고 외로운 사람이다. 특히 몇 년 전 아내가 죽은 후로는 더욱더. 오늘도 나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그것이 내 며느리를 위한 최선의 배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배려 덕분에 나는 아직까지 자식들과 함께 살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픈 일이지만.     


 어쨌든 나는 오늘도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평소대로라면 나는 지금쯤 노인복지센터로 향하고 있어야 했다. 나 같은 사람들은 대개 그런 곳에서 하루 종일 넘쳐나는 시간을 꾸역꾸역 보내니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평소 엄두도 내지 못했던 작은 모험을 해보려고 한다. 바로 젊은 사람들이 자주 간다는 원두커피 집에 들어가 보는 것이다. 물론 나같이 나이 먹은 사람들도 그런 곳에 자주 드나드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런 일이 참 낯설고 부끄럽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젊을 때는 해야 하는 일이 많아 괴로웠는데, 나이를 많이 먹고 나니 하면 안 될 것 같은 일들이 많아졌다. 특히 소심한 노인네의 지레짐작은 참 많은 을 금지시킨다. 하지만, 이제 그럼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어제 복지센터에서 보여준 “버킷리스트”라는 영화 때문이다. 암에 걸린 노인네 두 명이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들을 하다가 죽는다는 영화였다. 뭐 젊은 사람들에겐 별 것 아닌 이야기 같아 보여도, 노인네들에겐 그런 이야기가 늘어진 엿가락처럼 가슴에 척 달라붙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도 어젯밤 내 작은 골방에서 나만의 버킷리스트를 적어 보았다. 처음엔 별 거 없을 줄 알았는데, 적다 보니 어느새 한 페이지를 다 채웠다. 일단, 그중에서 내가 평소에 못해 봤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추렸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지금이라도 당장 해보려는 것이다. 그중 가장 빨리 할 수 있는 일은 젊은 사람들이 다니는 커피 집에 가서 커피 향과 함께 멋진 분위기를 마시는 일이었다. 비록 자판기 커피밖에 마실 줄 모르는 늙은이였지만, 이상하게 그 사소한 일이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커피숍 안으로 들어섰다. 어색한 마음에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잠시 커피숍 상황을 지켜봤다. 지켜보니 커피를 직접 계산하고 직접 가져가서 먹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어젯밤 연습했던 말을 되새김질했다. 그리고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종업원 앞으로 다가갔다.    

 

“아메리카노 커피 주세요.”

“어디서 드실 건가요?”

“네?”

“여기서 드실 건가요?”

“아, 네.”

“그럼, 머그잔으로 드리겠습니다. 사이즈는요?”     


난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왜 그렇게 꼬치꼬치 묻는 걸까? 잠시 망설이는 사이, 종업원 아가씨의 눈썹 한쪽이 씰룩 올라간다. 분명 짜증이 나는 얼굴이다.  

   

“뭐든 상관없어요.”

그럼 레귤러 사이즈로 드릴까요?”     


이번에도 잠시 생각하려다가, 종업원 아가씨의 눈썹이 움직이기 전에 얼른 대답해야 할 것 같아 그냥 네라고 대답했다.     


“레귤러 사이즈로 머그컵에 드릴게요. 4,100원입니다”     


준비했던 5,000원을 내어 주니, 종업원은 다시 현금영수증을 할 건지 할인카드 적립을 할 건지 꼬치꼬치 묻는다.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종업원이 무심하게 내게 900원을 건넨다. 내 손에 900원의 동전이 떨어지자 식은땀도 함께 떨어진다. 그리고 얼마를 기다렸을까? 엉거주춤한 자세로 계산대 주변을 배회하다가, 저쪽 끝 쪽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아메리카노 한잔 나왔습니다.”     


내가 주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행동이 이상하게 느려진다. 허둥지둥 그곳에 다가가니 종이컵에 사약 같은 커피가 두둥실 떠 있다. 그 무시무시한 놈을 쟁반 위에 들고 아슬아슬 자리로 돌아오는 길…… 벼락같은 소리와 함께 무언가 뜨거운 것이 내 손을 뒤덮었다. 내가 사람들이 줄 서서 주문하기를 기다리는 바로 그 앞에서 그만 엎어지고 만 것이다. 가게에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나는 뜨거운 손보다. 뒤통수가 더 뜨거웠다. 종업원 하나가 걸레를 가지고 달려왔다. 내 손을 닦으며 괜찮은지 연신 물었다. 실제로 주변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그들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갔다. 하지만, 내 머릿속엔 사람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저 할아버지 이런 곳 처음 왔나?’ ‘아, 할아버지 이런 곳엔 왜 오신 거야?’ ‘저럴 거면 그냥 집에 계시지……’ 종업원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창피함에 쫓겨 밖으로 나왔다. 뜨거운 손과 낯 뜨거운 얼굴 때문인지 바깥바람이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진다.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커피숍이 나를 보지 못하는 곳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커피숍이 보이지 않는 모퉁이를 완전히 돌고 나서야 한숨을 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무도 내게 무어라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안에 소심하고 약한 아이 하나가 자꾸만 나를 비난한다. 커피 한잔도 제대로 주문 못하는 쓸모없는 노인네라고.    

 


그렇게 정신 줄을 놓은 채,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노인 복지센터 건물이 눈앞에 보였다. 센터 앞에 있는 자판기 커피 한잔을 뽑아 들고 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도전은 무참히 실패했다. 지금 기분으론 커피숍 앞을 지나가는 것조차 어려울 것 같지만, 완전히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얼음처럼 단단하고 차가운 바람이 뜨거운 커피를 무심하게 식히듯 내 하찮은 도전도 언젠가는 내 못난 부끄러움을 녹일 수 있을 테니.



다음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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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내리는게아니라타는것

#할아버지부디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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