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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경아 Nov 18. 2018

녹지 않는 눈

야속한 그대 어깨 위에 내려앉은 봄눈



[#] 노래를 듣고 떠오른 이야기로 만들어진 미니 연재소설입니다. 참고로 지금 외롭고 웃긴 가게에서는 '루시드폴의 봄눈'이라는 노래가 흐르고 있습니다.

루시드폴의 봄눈 노래 듣기♪



사거리에 새로 생긴 빌딩 1층에 드디어 새로운 카페가 들어왔다. 영선은 그 카페 주인이 진상 손님이라는 사실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카페가 오픈하는 날 부동산 임 사장은 영선 가게에 들러 실시간으로 카페 상황을 중계해 주었지만, 영선은 손톱만큼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영선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흥이 떨어졌는지 임 사장도 상황 중계를 흐지부지 멈췄다. 역시 무관심이 답이던가? 시끄럽게 혼자 떠들던 임 사장이 혼자 풀이 죽어 가게를 나가고 난 뒤, 영선은 가게 음악 볼륨을 조금 높였다. 그제야 영선은 한가롭게 카페 창밖 구경을 할 여유가 생겼다.    


낙엽이눈처럼쌓이는계절


무언가 아주 바쁜 사람들처럼 가을이 아무렇게나 벗어 놓고 간 낙엽들이 거리 여기저기에 쌓여 있었다. 그러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그나마 남아 있던 이파리들이 봄날 벚꽃 잎처럼 휘날리다 또 바닥에 차곡차곡 쌓였다. 마치 한 겨울 함박눈처럼. 최선을 다해 가을임을 증명하는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영선은 생각했다. 가을 낙엽보다 봄날 떨어지는 꽃잎이  더 애달픈 것 같다고. 낙엽은 봄날에 태어나 소나기 같던 한여름을 겪으며 열매가 열리는 것도 보고 마지막까지 고운 단풍으로 물들다 떨어지지만 봄날의 꽃잎은  피어나자마자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순간에 조용히 아스러지기 때문이다.    


 “우유 배달 왔습니다.”     


카페 문이 열리면서 우유보다 하얀 얼굴의 우유배달 청년이 들어왔다. 영선은 깜짝 놀랐다. 청량한 우유배달 청년 머리 위에 가을 낙엽 하나가 깃털처럼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영선은 인사 대신 청년의 머리에 피어 있는 낙엽을 아무 말 없이 떼어 주었다.   

  

 “앗, 감사합니다.”     


귓불이 빨개진 우유 배달 청년은 쑥스러운 듯 꾸벅 인사를 하고 늘 찾아가던 냉장고에 뽀얀 우유팩을 차곡차곡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영선의 창백한 귓불도 아무도 모르게 단풍처럼 붉어졌다.

     

우유배달 청년이 가게를 나가고 난 뒤, 영선은 우유배달 청년 머리에 꽂혀 있던 낙엽을 테이블 위에 두고 가만히 바라본다. 볼품없는 낙엽이 벚꽃 잎처럼 화사하게 보이는 기적을 경험하며 영선은 자기도 모르게 배시시 웃는다. 그러다 영선은 자신을 아프게 했던 어느 봄날의 기억에까지 도달하고 다. 덕분에 영선의 얼굴은 다시 볼품없는 낙엽 빛깔로 변한다. 아픈 상처는 그렇게 물에 젖은 낙엽처럼 달라붙어 꼼짝달싹도 못하게 만든다. 영선처럼 사랑하기 힘든 어떤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낙엽보다애달픈


#노래소설 - 봄눈(루시드폴)     


선배가 돌아왔다!

처음에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너무 놀라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돌아왔다는 것도, 내게 전화를 먼저 했다는 것도 모두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선배와 만날 약속 장소와 시간뿐이었다.     


선배와 만나기로 한 날은 이번 주 토요일 오후였다. 4월의 화창한 토요일 오후, 그렇게 나는 꿈에도 그리던 선배와 만나게 된 것이다. 만나기로 한 시간은 오후 2시였는데, 새벽부터 내 몸과 마음은 너무 들떴고 뭔가 모르게 분주했다. 그러다 문득, 선배와의 약속 장소가 석촌 호수 근처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지금쯤 석촌 호수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원래 입으려던 갑갑한 옷을 벗어던지고 벚꽃과 어울리는 하늘하늘한 시폰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벚꽃이 봄눈처럼 날리는 그 길을 선배와 함께 걷게 될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이야, 영선 여전하네.  그동안 잘 지냈지?”     


선배도 여전했다. 웃을 때마다 눈가에 보이던 귀여운 주름도, 다정한 목소리와 말투도 모두 예전 그대로였다. 하지만 벌써 30분째 선배의 유학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선배가 하필이면 왜 내게 전화를 했는지가 궁금해졌다. 혹시 잊어버린 걸까? 4년 전 유학을 앞둔 선배에게 고해성사하듯 내뱉었던 나의 초라한 고백을. 아니다. 그는 원래 그렇게 무심한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 그 선배가 내 앞에 앉아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다니. 나는 혹시 꿈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그의 맘 속 어딘가에 내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착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회사생활은 어떠니?”     


선배가 드디어 내 안부를 물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내 개인생활이 아니라 회사생활을 집요하게 물었기 때문이다. 점점 내 대답이 빈곤해지자, 선배는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결론적으로 선배의 말은 그렇게 힘들게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한국에 돌아와 일자리를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그렇게 무언가 쫓기듯 초조해 보이던 선배가 내게 물었다.      


 “혹시, 너희 회사에는 팀장급 디자이너 티오가 있니?”     


선배는 내게 자신을 우리 회사에 추천해 줄 수 없냐고 묻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전혀 예상 못했던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닥으로 끝도 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선배가 내 고백을 받고도 아무 말 없이 유학을 떠나 버렸을 때 보다 더 속상하고 창피했다. 설마 선배는 내가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자신의 취업이 그만큼 간절했던 걸까? 이제와 그 이유가 무엇이든 달라질 게 없었다. 그저 혼자 설레고 마음 졸였던 내가 한심할 뿐이다.


 “미안해요, 선배! 약속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야 할 거 같아요.”     


그러자 선배도 기다렸다는 듯 마무리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행히 선배가 먼저 계산서를 잡았다. 그리고 성큼성큼 앞서 계산대로 걸어갔다. 나는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계산까지 해야 했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정말 사라져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야속한그대어깨위에내려앉은봄눈


선배를 따라 계산대로 걸어 나오는 길....... 카페 창밖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벚꽃 잎이 봄눈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그러다 계산대에서 커피 값을 계산하고 있는 선배의 어깨 위에도 벚꽃 같은 하얀 봄눈이 내려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벚꽃 잎만큼 희고 커다란 비듬 조각들이 살포시 내려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어쨌든 봄날은 봄날이었고, 봄눈은 봄눈이었다.



다음화에서 계속...


#낙엽보다슬픈봄눈

#늦가을떠올리는봄날의기억

#그대어깨위에무겁게내려앉은아픈기억

#루시드폴

#봄눈의다른의미

#가을보다봄날이더아련한이유

#봄바람

#3인칭관찰자시점

#당신의봄날은안녕하십니까

#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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