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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에너지

장한나가 연주하는 하이든, <첼로 협주곡 1번>

by 김정은
마흔네 살에 다시 대학 신입생이 되었습니다!



저는 두 곳의 대학에서 역사와 화학, 생명과학을 공부했습니다. 첫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면서 지나치게 사변적인 역사철학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어 사고의 균형을 잡고자 화학을 복수전공했습니다. 졸업 후 잠깐 일을 했지만 과학에 매료되었던 터라 다시 대학에 들어가 생명과학을 공부했고요. 원래는 졸업 후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연구원이 되고 싶었는데 여러 사정으로 포기하고 스물여덟에 지금의 직장에 들어왔습니다. 거의 이십 대 내내 공부만 한 셈이지요. 그렇게 공부를 하고도 캐나다 유학길에 올랐으니 저도 참 어지간한 것 같습니다...


보통 3월에 새 학기가 시작되는 우리나라와 달리 캐나다는 9월에 첫 학기가 열립니다. 코로나19 때문에 한동안 캐나다 대학 대부분 온라인으로만 강의가 진행되었다가 이번 가을부터 대면 강의로 바뀌었습니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 학생증을 발급받기 위해 캠퍼스에 처음 간 날, 교정과 건물에 다양한 인종의 학생들이 모여 있는 모습에 대학생이 된 실감이 나더군요. 내친김에 학교 서점에 들러 대학 로고가 박힌 후드티도 하나 샀습니다. 그런데 큰 아이가 제 후드티를 보더니 자기 스타일이라며 냉큼 입어보는데 그만 양보하고 말았답니다. 10대인 아이가 40대인 저보다 백배는 더 잘 어울려서 말이죠.


25년이 지났지만 첫 대학교에서 맞이한 신입생 시절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개강하기 전 2월 말, 학교 학생회에서 주관하는 오리엔테이션이 원주에 위치한 리조트에서 3박 4일간 열렸는데 그때부터 대학생활이 어찌나 재밌었는지 몰라요. 처음 보는 동기들과 선배들이 서먹하고 어려웠지만 몇 시간 지나니 금세 친해지게 되었지요. 특히 밤을 새우며 술을 마시고 게임을 하고 나면 그렇게 사이가 좋아질 수 없었답니다. 그 시절이 다시 오지는 않겠지만 '그땐 그랬지'라며 회상할 수 있는 추억이 있어 참 다행입니다.




젊음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어찌나 대단한지 이곳 캐나다 런던 전체에 활기가 가득합니다. 런던에는 팬쇼 칼리지 외에 웨스턴 대학이라는 유명 대학이 하나 더 있습니다. 지금의 캐나다 총리인 트뤼도가 웨스턴대 출신이기도 하지요. 런던은 규모가 작은 중소도시인지라 평소에는 차분하고 조용합니다. 토론토에 오래 살다 런던으로 이사 온 이집트인 친구가 런던의 첫인상이 꼭 좀비 도시 같아 무서웠다고 하더라고요. ㅎㅎㅎ 그런데 새 학기가 되고 또 대면 강의로 전환되면서 좀비 도시 같던 이곳이 전 세계에서 모여든 젊은이들로 인해 북적북적거려 이제야 사람 사는 곳 같습니다. 무생물처럼 표정 없는 장소에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는 건 역시 나무와 풀, 다람쥐, 그리고 사람과 같은 생명체인가 봅니다.


강을 거슬러 오르는 송어 떼처럼, 단단한 땅을 뚫고 솟아오른 봄날의 새싹처럼, 생의 에너지를 자신뿐 아니라 주위에 가득 불어넣는 이 젊은이들을 보고 있자니 지금은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는 천재 첼리스트 장한나가 연주한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1번>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약동하는 젊음의 에너지를 하이든만큼, 또 장한나만큼 잘 나타낸 이도 없을 겁니다.



요제프 하이든(1732~1809)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은 1732년 오스트리아의 로라우에서 12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마차 바퀴를 만드는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귀족 저택에서 일하던 하녀 출신이었습니다. 음악가 집안 출신은 아니지만 하이든의 아버지가 음악을 무척 사랑했다고 합니다. 아들이 음악에 재능을 보이자 멀리 떨어진 도시에 사는 음악 선생에게 보내 성악과 바이올린, 하프시코드를 배우게 하지요. 하지만 당시의 도제식 교육 때문에 하이든은 스승의 온갖 잡일을 다하느라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해요. 그래서 체구도 왜소했답니다.


10대 시절 빈에 위치한 성 스테파노 대성당의 소년합창단에서 활동하기도 한 하이든은 변성기 이후 합창단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낮에는 귀족들의 음악 선생님으로, 밤에는 세레나데 악단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합니다. 스무 살 무렵에는 당시 꽤 유명했던 작곡가 니콜라 포르포라에게 잠깐 작곡 수업을 받은 후 작곡가가 되기로 마음을 굳히고 독학으로 작곡 공부에 매진합니다.


가난한 음악가로서 근근이 살아가던 하이든에게 드디어 본격적인 음악가로서의 문이 열립니다. 1757년, 모르친 백작 집안의 전속 악장이 되면서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했고, 1760년 에스테르하지 가문으로 옮긴 후 이곳에서 30년간 전속 악장으로 일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수백 편의 작품을 만들게 되면서 프랑스, 독일 등으로 그의 명성이 퍼져 나가게 되지요. 또 모차르트와 교류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이든은 꽤 꾸준하고 성실한 작곡가였던 것 같습니다. 교향곡만 106곡을 작곡했고 현악 4중주 68곡, 피아노 3중주 43곡, 피아노 소나타 55곡, 그 외 피아노 독주곡과 가곡 등 750여 곡을 만들었습니다. 하이든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은 아무래도 '장학퀴즈'의 오프닝 곡이었던 트럼펫 협주곡이 아닐까 싶어요. 빰~빰~빰~빰 빰빰빰빰빰~~ 요 한 소절만 들어도 다들 '아~ 이곡!' 하며 무릎을 탁 치실 겁니다. 독일의 국가도 하이든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하이든은 성품도 좋았던 것 같습니다. 온화하고 친근한 성격 때문에 별명이 '파파 하이든'이었다고 해요. 또 은근하게 유머감각도 있어 그가 만든 '놀람 교향곡'은 오늘날에도 콘서트장에서 연주되면 졸던 청중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는 경우가 꼭 생깁니다. 자신의 연주 시간에 어떤 귀족이 늘 꾸벅꾸벅 졸아 이 곡으로 깜짝 놀라게 해줬다고 해요. 또 자신의 작품인 <고별 교향곡>을 하이든이 초연할 때 제4악장 중간부터 단원이 하나 둘 빠져나가도록 지시합니다. 진짜 고별을 고한 것이지요. 당시의 고용주인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휴가를 통 주지 않아 하이든이 단원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지시했고 결국 휴가를 따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하이든은 비슷한 시기의 작곡가인 바흐나 모차르트, 비발디와 베토벤 등에 비하면 존재감이 덜한 편입니다. 솔직히 저도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 하면서도 하이든의 작품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이든의 작품 수가 워낙 방대하기도 하고 제가 초기 고전시대의 음악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해 지금도 하이든을 그다지 선호하지는 않습니다만 단 한 곡만 예외입니다. 바로 <첼로 협주곡 1번>이지요. 이 작품 최고의 명연주자로 저는 첼리스트이자 지휘자인 장한나를 꼽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우연히 TV에서 방영되는 장한나의 공연 실황 연주를 보고 저는 그녀에게 그리고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에 그야말로 뿅~ 반하게 되었습니다. 빨간색 드레스를 입고 연주하는 장한나는 저보다 훨씬 어린 소녀였습니다. 연주 당시의 그녀의 나이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아마도 15세 정도) 그녀가 연주하는 하이든 첼로 협주곡을 듣고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장한나는 12세에 이미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으로 세계적인 명 지휘자 주세페 시노폴리와 함께 협연한 적 있습니다. 시노폴리와 함께 협연한 이때는 어린이답게 노란색 퍼프 드레스를 입고 연주하는데 이 당시의 연주도 도저히 열두 살이란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훌륭했습니다만 같은 곡으로 10대 중반에 한 연주는 제 기준으로 '넘사벽'이었습니다. 하이든의 이 곡을 장한나만큼 제 뇌리에 각인시킨 이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아요. 십 대만의 그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와 천재의 패기, 그리고 곡 자체가 가지는 긍정성이 대단한 시너지를 일으킨 것이지요.


1982년생인 장한나는 세 살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여섯 살에 첼로를 접하게 됩니다. 피아노는 자신의 악기가 아님을 일찌감치 알았다는 영특한 이 소녀는 첼로를 배운 지 4년 만에 <월간 음악>에서 주최하는 전국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고 열한 살에 줄리어드 음대 특별장학생이 됩니다. 그리고 다시 1년 만에 제5회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콩쿠르에서도 최우수상을 받으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되지요. 그녀의 첼로 스승 역시 세계적인 첼로 거장 미샤 마이스키입니다.


첼로로 승승장구하던 장한나는 2001년 명문 음대가 아닌 하버드대학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합니다. 지휘자 시노폴리가 그녀에게 위대한 음악가가 되려면 인문고전을 공부해보라고 권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2007년부터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녀가 지휘를 시작한 이유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첼로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의 수는 제한되어 있다. 나는 더 많은 음악들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해보고 싶다'라고 설명합니다. 장한나는 카타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거쳐 현재는 노르웨이의 트론헤임 관현악단을 이끌고 있습니다. 또 올해 9월부터는 독일의 함부르크 심포니에서 수석 객원지휘자로도 활동을 시작했지요.


음대가 아닌 하버드대로 입학하던 때부터 자신만의 음악과 인생철학이 확고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후 탄탄대로인 전문 첼리스트의 길을 포기하고 지휘자로 도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하이든의 작품으로 데뷔한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로구나 싶었습니다.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1번>에는 젊은이 특유의 자신감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하이든이 이 곡으로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이보게, 젊은이!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네! 이왕이면 과거보다 더 긍정적으로, 더 씩씩하게, 더 자신 있게 살아가시게나"


바로 눈앞에 펼쳐진 '잘 아는 길, 가기 쉬운 길'이 아닌 '잘 모르는 길, 어려운 길'을 택한 그녀의 도전과 용기에 그녀의 연주만큼이나 크게 감동받았습니다.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은 늙지 않을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운 에너지인 '열정'을 가진 사람은 나이 불문하고 모두 젊은이라 부를 수 있으니까요.

지휘 중인 장한나, 저보다 세 살 연하지만 언니라고 부르고 싶네요. 나보다 멋지면 언니임




저는 요즘 야구모자를 쓰고 후드티를 입고 검은색 백팩을 메고 버스를 탑니다. 그리고 강의실에 들어가 수업을 듣습니다. 이런 차림새가 썩 어울리는 나이는 아니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서 나이 든 티를 내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노력 중이지요. CPU 자체가 올드한 사양이라 수업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제가 역사학도였을 때 60대의 만학도 선배님과 함께 공부했던 적이 있어요. 대학교 2학년이 시작되자 강의실에 어떤 할아버지가 와 계시는 겁니다. 하지만 엄청 멋진 분이었습니다.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포마드로 정리하고, 흰 와이셔츠에 감색 정장을 입고 반짝반짝 윤이나는 검정 구두를 신은 은발의 노신사였지요. 교정에서 마주치면 학생이 아니라 교수님처럼 보이던 그 선배님은 집안 사정으로 2학년을 마친 후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년 퇴직 후 못다 이룬 배움을 위해 40여 년이 흐른 후 복학하신 겁니다.


그 선배님과 저는 꽤 잘 어울려 다녔습니다. 강의 시간에 열심히 적은 노트를 빌려드리기도 하고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시즌이 되면 예상 문제와 예상 답안을 작성해서 드리기도 했습니다. 제가 원래 오지랖이 넓기도 하고 나이 드신 분들 대하는 걸 어려워하지 않았거든요. 제가 2학년을 마치고 휴학하게 되면서 그 이후로 선배님 소식이 끊겼지만 아마도 졸업을 하셨던 걸로 기억납니다.


그런데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제가 선배님께 꽤 괜찮은 후배였다는 걸 말이죠. 이번에 배우게 된 제 전공 수업에 수많은 외국 학생 중에서 저 말고 한국 유학생이 딱 한 명 더 있습니다. 스물두 살의 예쁘고 살가운 아가씨인데요. 저는 처음에 나이 든 아줌마에게 관심이 있겠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는 게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이 동기님이 살갑게 인사해주는 겁니다. 그리고 심지어 제가 수업에서 이해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저 이거 어제 밤새서 완전히 마스터했어요. 제가 다 가르쳐드릴게요'라고 웃으며 말하는데 지상에 내려온 천사처럼 보였습니다. 아, 나도 그 40년 연상의 선배에게 이렇게 좋은 후배였겠구나 싶어 그때 도와드리길 참 잘했다고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날 이후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운 에너지 리스트에 '열정' 앞에 '배려'를 적어 넣었습니다.






장한나가 연주하는 하이든 첼로협주곡 1번 https://www.youtube.com/watch?v=8WLIDa9U9Ug


장한나의 첼로 연주와 지휘자로서의 모습은 그녀의 유튜브 공식 채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c/HanNaChangMusicOfficialYouTubeChannel


장학퀴즈로 기억하시면 저랑 같은 세대! 요즘 세대는 오징어게임으로 이 곡이 각인된 듯 하네요 ^^ 하이든의 트럼펫협주곡 제3악장https://www.youtube.com/watch?v=CfkxYAsZsX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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