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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 대기권

가브리엘 포레와 그의 작품들

by 김정은

NASA에 따르면 약 500만 개의 소행성과 혜성이 매일 지구와 충돌한다고 합니다. 다만, 그 크기가 작아 지구 대기권을 지나는 동안 대부분 타서 사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할 뿐이지요.


우주에서 바라보면 지구는 파랗고 동그란 자신의 모습 위로 은은하게 아우라를 뿜어 냅니다. 마치 슈퍼히어로가 만들어내는 보호막처럼 수백 킬로미터 높이로 지구 주위에 펼쳐져 있는 대기권은 투명해서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공간이지만 실은 공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덕분에 안으로는 지구에 사는 생명체들을 지켜주고 밖으로는 우주에서 날아오는 소행성의 작은 파편이나 우주선의 잔해로부터 지구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대기권은 마치 외부의 세균이나 먼지로부터 인체를 보호해 주는 1차 방어선인 피부처럼 지구를 지키는 첫 번째 물리적 방어벽인 셈입니다.


그런 대기권을 보며 '사람의 마음에도 이런 물리적 장벽이 한 겹 정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의도 하든 의도치 않든 타인이 내게 보낸 상처의 말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 도달하기 전에 마음을 싸고 있는 대기권에서 활활 타서 사라져 버린다면 평생 상처받을 일이 없을 테니까요. 사람들로부터 쉽게 상처받는 스스로가 못마땅했던 지난날의 철없는 공상이었지요.


사람들 속에서 나 역시 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주고 또 받는 일련의 파장을 만드는 일 같습니다. 살과 뼈로 된 육체를 가진 한, 날카로운 것에 쉽게 베이고, 무거운 것에 뼈가 부러질 수도 있는 물리적 한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연약한 육체 속에 담긴 마음도 어쩌면 쉽게 베이고 부러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늘 상처 입어 피 투성이인 채로 울고 있는 스스로의 약함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질문이 떠오르는 건 어찌할 수 없습니다. 다치기 쉬운 내 마음은 누가 또는 무엇이 보호해 주는 것일까. 나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일 뿐인 걸까. 신은 인간에게 약한 육체와 마음만 주시고 모른 채 하는 사디스트 이신가...라고 말이지요.






마음에도 대기권과 같은 공간이 있다는 것을 프랑스의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가 아주 오래전에 알려 준 적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마음속 공기가 다 빠져 납작하게 눌려 있다가도 어느 특이점의 순간이 되면 호수 속 물고기의 부레처럼 마음도 크게 부풀어 오릅니다. 팽창된 공간 속에 공기의 입자 같은 무수한 생각과 말들이 떠다니긴 하지만 평소와 다른 것은 바로 음악의 입자들입니다. 소리의 파장들이 마음속 공간으로 마구마구 밀려들어오면 수 천, 수 만개의 파장이 중첩되며 더 큰 울림을 만들어 주지요. 그 울림들은 마음속 대기권에 가득 차 어느 순간 내 영혼의 수호자가 되어 줍니다. 방어막이 됩니다.


한국의 1세대 거장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연주하는 가브리엘 포레의 피아노 소품집을 교보문고 핫트랙에서 우연히 집어 들었던 때가 2006년이었습니다. 포레의 <파반느>, <시실리안느>, 그리고 <꿈을 꾼 후에>와 같은 작품을 좋아했지만 포레의 음악을 본격적으로 들어 본 적은 없었습니다. 더구나 빛바랜 듯 창백한 블루톤으로 아련하게 허공을 응시하는 백건우의 모습이 담긴 음반 표지가 어찌나 인상적이었는지 다른 음반을 제쳐두고 고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포레의 피아노 소품만을 엮은 음반이 많이 나오지 않던 때라 레퍼토리 역시 귀하기도 했고요.


포레의 피아노 소품 <3개의 무언가, 작품번호 17-3>를 시작으로 <발라드>, <즉흥곡 1번>, 4개의 뱃노래(바카롤레)와 5개의 야상곡(녹턴), 2개의 전주곡(프렐류드) 등 13곡의 피아노 음악을 처음으로 듣던 날,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어쩐지 평생을 찾아 헤매던 그런 친구를 만난 기분이 들었어요. 가브리엘 포레가 만들어 준 음악은 제가 좋아하는 식물들로 가득 찬 비밀의 정원과도 같았지요. 아... 세상에는 이런 음악이 존재하는구나.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손길... 그 손길을 가진 한 친구... 그리고 그 친구의 손을 잡고 비밀의 정원을 산책하는 듯한 이 평화롭고도 낭만적인 관계를 사람으로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로구나, 음악이 그저 감동과 공감만을 선사하는 예술이 아니로구나, 살과 뼈가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어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로구나... 포레는 그렇게 제게 다정한 손을 내밀며 다가왔지요.



가브리엘 포레, <3개의 무언가 중 op. 17-3>

https://www.youtube.com/watch?v=45CdhbiM1j4&list=PL3dfM3fCkhmdGQ6Wh1WwrMIe3gYu0BJUi&index=1






가브리엘 위르뱅 포레(1845-1924)


이름조차도 우아한 가브리엘 포레는 그의 이름을 꼭 닮은 아름다운 음악을 만든 19세기 프랑스 작곡가입니다. 1845년 프랑스의 남부 파미에르에서 태어난 포레는 9살 때 파리의 니데르마이어 교회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중세 르네상스 종교음악과 바흐, 하이든을 공부했어요. 또 <동물의 사육제>로 잘 알려진 카미유 생상의 제자가 되어 베를리오즈와 슈만, 리스트, 바그너 등의 음악을 접하게 됩니다. 백건우의 앨범에 담긴 <세 개의 무언가>는 포레가 음악학교를 재학 중이던 1863년에 만들었다고 해요. 몽환적이지만 가볍지 않고 중후함마저 느껴지는 이 곡을 어떻게 17세의 소년이 만든 것인지 놀랍기만 합니다.


스무 살이 된 청년 포레는 피아노, 화성학, 작곡, 대위법에서 수석으로 졸업하고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합니다. 1865년에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꿈을 꾼 후에>를 만들었지요. 가슴이 뜨거웠던 청년 포레는 1870년 프로이센 전쟁에 자원입대하여 전쟁이 끝난 후 1873년 다시금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자가 됩니다. 특히 그의 즉흥연주는 당시에 꽤 유명했다고 합니다.


1874년에는 스승이었던 생상이 수석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는 마들렌 성당의 보조 연주가로 취직하기도 합니다. 한 번은 생상 자신이 교수로 있던 음악원에 공석이 생기자 포레를 교수직에 추천했지만 그의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동료들이 반대하여 무산됩니다. 이후 지방의 음악 감독관으로 지내다가 1896년 <타이스의 명상곡>으로 유명한 마스네를 대신해 파리 음악원의 작곡가 교수가 됩니다. 포레의 유명한 제자로는 라벨, 드뷔시, 퀴클랭 등이 있습니다. 1905년 파리 음악원장이 된 포레는 음악원의 심사직을 외부 인사로 바꾸는 등의 개혁을 단행하기도 했지요. 청각에 문제가 생긴 후 1920년에 음악원장직을 사임하고 4년 뒤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포레는 클로드 드뷔시보다 앞서 현대 프랑스 음악의 기초를 닦은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드뷔시나 라벨만큼 혁신적이지는 않지만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의 클래식 강국에서 접할 수 없었던 프랑스 특유의 부드럽고도 세련된 음악 세계를 보여주고 있지요. 우아하면서도 따스한 서정이 가득해서 그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세상이 마치 부드럽고 매끄러운 실크로 이뤄진 듯한 기분마저 들어요. 그런 감촉이 느껴지는 그의 음악은 화풍으로 치면 화가 퓌비 드 샤반느의 작품 같달까요.


퓌비 드 샤반느 <해변의 처녀들>



포레는 기악곡보다 가곡 위주의 성악곡과 합창곡을 많이 작곡했습니다. 가곡은 약 100여 곡을, 가장 많이 작곡한 악기인 피아노 곡은 40여 작품이 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가곡인 <꿈을 꾼 후에>는 스무 살의 포레가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한 아픔을 로맹 뷔신느의 시에 곡을 붙인 작품입니다. 한때 사랑이라는 꿈을 꾸었으나 그만 꿈에서 깨고 난 상실의 아픔을 애절하고도 우아하게 묘사하고 있지요. 현재는 가곡 버전보다는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가 첼로와 피아노 연주용으로 편곡한 버전이 더 많이 연주되고 있는 듯해요. 저도 이 곡을 처음에는 첼로 연주로 먼저 접했다가 훗날 가곡인 것을 알았습니다.



꿈을 꾼 후에



당신의 모습에 이끌린 잠에서

나는 황홀한 신기루의 행복한 꿈을 꾸었네

은은한 당신의 두 눈동자

맑고 공명한 그대의 목소리

당신은 새벽에 떠 오르는 하늘에서

나타났어요

당신이 나를 부를 때에 나는 지구를 도망쳐

그 하늘빛에 당신에게로 달려갔지요

하늘은 우리를 위하여 구름을 제치고

신비로운 광채들로 우리를 감싸 안았지요

아, 아, 잠에서 깨어난 이 슬픔이여

당신을 외쳐 부릅니다 오! 그 밤이여

나를 당신 곁으로 돌려주오

돌아오라 돌아오라

신귀한 밤에 당신의 모습이여...



가브리엘 포레, 꿈을 꾼 후에 https://www.youtube.com/watch?v=1ChPymdJ7Tc




<꿈을 꾼 후에>가 워낙 유명한 작품이긴 하지만 포레가 만든 최고의 성악곡(정확히는 합창곡)으로 저는 <레퀴엠>을 꼽고 싶습니다. 천사들이 합창을 한다면 바로 이런 소리가 아닐까 싶을 만큼 그의 레퀴엠에는 인간 세상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성스러움과 천상의 아름다움이 가득합니다. 음과 음들이 층으로 쌓여 만들어 내는 텍스쳐(texture)가 얼마나 부드럽고 유려한 지 듣고 있노라면 인간의 목소리로 이런 화음과 음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포레는 죽기 20년 전에 청각을 잃게 되면서 자신의 내면에 더욱 침잠하게 됩니다. 레퀴엠은 바로 이 청각이 상실되었던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귓가로 들리는 소리에 의존하는 대신 자신의 상상 속 음들로 만들어 낸 것이기에 보다 순수하고 고귀한 음들을 창작해 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마치 베토벤처럼 말이지요. 이럴 땐 예술가들에게 결핍이 꼭 저주는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술은 결핍이 주는 고독을 자양분 삼아 더욱 성숙되는 것 같거든요. 하지만 그 과정을 치러내는 예술가들은 속으로 피를 흘리며 지금도 고통을 감수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포레는 성악곡 외에도 수 십 개의 피아노 독주곡과 여러 편의 실내악곡, 관현악곡과 오페라 등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기악곡으로는 <파반느>와 <시실리안느>가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졌습니다. 플루트가 리드하는 <파반느>는 로코코풍의 궁전이 떠오르면서도 라벨의 <볼레로>도 연상됩니다. 묵직하고 깊은 첼로의 음색과 피아노의 경쾌한 아르페지오로 시작되는 <시실리안느>는 단조가 갖는 어둡고 슬픈 멜로디와는 달리 경쾌한 춤곡 특유의 박자가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파반느>와 <시실리안느> 만큼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하프 연주곡인 <즉흥곡(op. 86)>과 <바이올린 소나타 1번>, 첼로 연주곡인 <엘레지>, 그리고 피아노 3중주 등 다양한 실내악곡... 종국에는 포레의 작품 대부분을 추천하고 싶어요. 그의 작품을 전부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들어본 작품 가운데 실망시키는 곡이 한 번도 없었답니다.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작곡가들이라고 해도 모든 작품이 다 제 취향일 수는 없지요. 그런데 포레만큼은 유일무이하게 들어본 모든 작품 모두 다 마음에 쏙 드는 작곡가입니다. 그래서 저는 포레에게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내적 친밀감을 강하게 느낍니다. 만일 타임머신이 만들어진다면, 마흔세 살의 포레에게 방문하여 그에게 이렇게 외치고 싶어요. "반갑다! 친구야!"






가만 생각해보니 내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을 맛보았을 때, 내 취향을 백 퍼센트 반영하는 소설을 읽었을 때, 내 무지를 일깨워주는 지식과 통찰을 만났을 때, 내 가치관과 잘 맞는 벗을 만나고 또 내 평생을 맡겨도 좋을 반려자를 만났을 때, 내 목숨을 다해 지키고 사랑할 아이를 만났을 때 그리고 영혼을 관통하는 아름다운 음악을 만났을 때마다 내 마음속 대기권이 조금씩 조금씩 확장되어 왔던 것은 아닐까 싶어요. 세상에 처음 발을 내딛고 살아가면서 미처 그런 것이 있는지 조차 몰랐다가 행운처럼 다가온 우연한 만남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 켜켜이 쌓여 어느샌가 저를 든든하게 보호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세상에는 아름다운 음악이 너무 많아서 평생을 찾아들어도 고갈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브리엘 포레가, 또 수많은 클래식 음악이 제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음악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내 도처에 둥둥 떠 다니고 있어서 빠르게 걷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이면 이내 귓가로 아름다운 주파수가 흘러 들어옵니다. 음악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굳이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존재하는 음악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만 하면 됩니다.


여전히 펼쳐야 할 페이지가 많이 남은 소설처럼 저는 지금도 세상이 너무 궁금해서 다음 장으로 어서 넘겨보고 싶습니다. 세상에는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아름다운 것들이 사막의 모래알만큼이나 쌓여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즐겁습니다. 소풍날의 보물 찾기처럼 아름다운 음악을, 아름다운 것들을 매일 찾아낸다면,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기꺼이 반기고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 아닐까... 나지막이 읊조려 봅니다.







P.S 좋아하는 포레의 작품들 가운데 몇 개 추려봤습니다. 글 벗님들 가운데 취향에 맞는 곡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브리엘 포레, 레퀴엠 https://www.youtube.com/watch?v=08GyEGqBC70


가브리엘 포레, 파반느 https://www.youtube.com/watch?v=HhiVuIRw4tM


가브리엘 포레, 시실리안느 https://www.youtube.com/watch?v=U5Y0uQLgriA



가브리엘 포레, 즉흥곡 https://www.youtube.com/watch?v=QBTfLAy8RPc



가브리엘 포레, 엘레지 https://www.youtube.com/watch?v=G5gh1dksNNc



가브리엘 포레, 장 라신느의 찬가 https://www.youtube.com/watch?v=NzUMfVpugq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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