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에서 주인공 엘리자베스가 아마도 딱 저와 같은 마음이었을 겁니다. 잘생기고 훤칠한 데다 백작 가문의 인척이고 굉장한 부자이기도 했던 다아시는 그의 오만한 태도로 인해 첫 만남에서부터 엘리자베스의 눈 밖에 나고 말지요. 지성적이지만 자존심이 센 엘리자베스는 그에 대한 평가를 첫인상으로 결정지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를 평생 혐오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저 역시 그의 오만하고 자의식 과잉인 태도 때문에 처음 보자마자 정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여러 번 그에 대한 선입견을 무너뜨리려 노력했지만 그와 대면할수록 오만한 첫인상은 공고해져만 갔어요. 악순환이었지요. 그와 나 사이에는 깊은 골이 생겨 그 후로 수 십 년간 화해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렀습니다. 그가 누구냐고요? 바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입니다.
클래식 매거진을 발행하면서 <황제>에 대해 글을 쓰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황제>는 드물게도 참 좋아하지 않는, 솔직히, 싫어하는 클래식 작품입니다. 베토벤 작품을 원래 선호하지 않기도 하지만 특히 <황제> 만큼은 유독 냉담한 편입니다.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에 느낀 첫인상을 베토벤의 <황제>를 처음 들을 때 똑같이 느꼈습니다. 저와는 달리 엘리자베스는 오해를 풀고 다아시와의 사랑에 골인했지만 왜 그런 해피엔딩은 소설에서나 가능하잖아요.
캐나다에 와서 아쉬운 2가지가 있는데 바로 BTS와 임윤찬의 공연을 놓친 겁니다. 한국에 있었더라면 두 아티스트의 무대를 어떻게든 노력해서 갔을 겁니다(임윤찬 공연에 여러 번 가신 모두맑음 작가님... 너무나 부럽단 말입니다ㅠ.ㅠ). 임윤찬의 경우 반 클라이번 콩쿠르 이후 몇 차례의 미국 공연이 있긴 했지만 티켓이 모두 일찌감치 매진되는 바람에 손 놓고 구경만 해야 했지요. 비록 캐나다에 인접한 미국이라도 그의 공연장까지는 비행기를 타야 할 만큼 물리적 거리도 워낙 멀었습니다. 그러니 두 아티스트들의 음반 발매만을 오매불망 기다렸습니다. 감사하게도 BTS는 <yet to come>과 제이홉의 <jack in the box> , 진의 <the astronaut>, 그리고 최근 발행한 남준의 <indigo> 등 앨범을 4개나 내줬습니다. 하지만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음반 발매는 오랫동안 요원했지요.
그러던 중 드디어! 유니버설 뮤직에서 12월 8일 임윤찬의 공연 실황 음반을 발매하였습니다. 제가 예측한 대로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을 통해서 말이죠! (저의 예측은 아래의 글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그런데! 앨범의 주요 곡이 베토벤의 <황제>였습니다. 그의 레퍼토리 선정에 다소 실망감을 느꼈어요. <황제>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순위에서 단골로 1등을 하는 곡입니다. 유명 피아니스트의 연주회에서도 단골 레퍼토리지요. 아무리 유명한 피아니스트라 해도 음반을 발매할 때는 판매량을 당연히 고려해야 하겠지요. 그런 고려 없이 자신의 음악적 성취나 업적만을 전시하려는 연주가는 음반사 입장에서 이기적일 수 있으니까요. 저는 음반 산업 측면에서 레퍼토리 선정을 이해하기로 하였습니다만 실망스러운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번 앨범에 대한 임윤찬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마음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베토벤이 꿈꾼 유토피아, 그가 바라본 우주를 청중에게 전하고 싶었어요
임윤찬 피아니스트 역시 <황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작년까지 말이죠. 그에게 <황제>라는 작품은 그저 화려하고 자유롭기만 한, 베토벤의 또 다른 피아노 협주곡 4번만큼의 감동은 없다고 생각했다가 올해 연습실에서 이 곡을 연습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표현하더군요.
"(코로나19라는) 인류에게 큰 시련이 닥친 뒤에 이 곡을 연습하다 보니.. 베토벤이 꿈꾸는 유토피아, 그가 바라본 우주가 이렇지 않을까라는 느낌을 받고 이 곡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어쩐지 그의 말에 일말의 기대감이 생겨났습니다. 아, 이 연주가라면 나의 '오래된 고집불통', '낡아빠진 자존심', 그리고 '허영심이 첨가된 편견'을 깨 부셔 주겠구나! 그런 확신을 받았습니다. 그 어떤 피아니스트도 나를 완벽하게 설득하지 못했는데 그라면 나를 이겨 줄 것 같았습니다. 내 고집을 꺾어주고, 내 인식을 바꿔줄 것 같았지요. 열아홉의 소년이 느낀 베토벤의 유토피아, 베토벤이 그린 우주가 한껏 궁금해져 버렸어요.
루드비히 반 베토벤(1770~1827)
베토벤이 <황제>를 작곡한 1809년은 베토벤이 머물고 있던 오스트리아에게는 시련의 해였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 빈을 점령했던 것이지요. 게다가 난청이 더욱 심해져 베토벤 개인에게도 악제의 날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이렇게 활기차고 대범한 곡을 만들었던 것이지요. 어쩌면 오스트리아의 핍박에 항거하려는 베토벤 나름대로의 결연한 의지였을까요.
<황제>라는 부제는 베토벤의 친구이자 피아니스트 겸 출판업자 요한 밥티스트 크라머가 출판을 위해 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보통 곡의 부제는 작곡가의 사후에 붙여지는 경우가 많은데 <황제>의 경우에는 베토벤이 살아 있던 당시에 막역한 친구가 붙인 것이기에 베토벤도 이 부제에 동의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당시의 시대 배경을 고려하면 <황제>라는 제목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이런 뒷 이야기를 부정하는 전문가들도 있다고 합니다.
대개의 피아노 협주곡처럼 총 3악장으로 이루어진 <황제>는 첫 시작부터 피아노의 카덴차*가 도입되어 당시로서는 독특한 형식을 가졌습니다. 이런 대담한 시도는 훗날 슈만과 리스트, 차이콥스키, 그리그 등에도 영향을 주어 음악 시작 도입부터 피아노가 강렬하게 연주되는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러나 베토벤 당시까지의 피아노 협주곡들은 오케스트라의 전주가 한참 진행된 이후에야 피아노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 <황제>를 일컬어 베토벤 피아니즘의 절정, 피아노 협주곡의 왕자라고들 평가합니다.
* 카덴차 : 협주곡에서 사용되는 카덴차는 협주하는 악기(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가 악보에 적힌 악상이 아닌 연주가의 즉흥으로 편곡하여 자유로이 연주하는 것을 뜻함. 하지만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처럼 <황제> 역시 카덴차는 작곡가들이 제시하였기에 실제로 즉흥연주는 아님. 피아니스트가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뽐낼 있도록 하는 구간이기도 함
저는 원래 <황제>의 이 카덴차 부분을 참 싫어했습니다. 베토벤이 배치한 트릴의 구간도 싫어했고 갑자기 대포처럼 빵 터지는 오케스트라 부분이 싫었습니다. 군대 행진곡 같기도 하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개선장군 같은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이는 1악장 전체를 늘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제껏 제가 들어온 <황제>의 1악장은 덩치도 크고 근육도 많은 마초적인 남자가 자신의 힘을 마구 과시하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선량하고 지혜로운 황제가 아닌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독재자가 연상되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지나치게 많이 연주되지만 대부분의 연주가 비슷비슷해서 지겹기도 했지요.
그래도 제게 <황제>는 놀라운 작품이라고, 너무 미워하지는 말라고 저를 지속적으로 설득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체코 출신의 오스트리아 피아니스트 알프레도 브렌델입니다.
베토벤의 마초이즘을 덜어내고 학구적인 느낌의 서정적인 연주를 보여주는 브렌델은 그나마 베토벤과 저의 간격을 메꾸어주는 고마운 피아니스트입니다. 그가 연주하는 <황제>는 끝까지 인내하며 듣게 됩니다. 그리고 이번 <황제>를 연주한 임윤찬에게서 브렌델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우선 손. 브렌델과 임윤찬의 손은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얄상하고 길쭉한 손이 아니라 투박하고 두툼해서 피아니스트와는 잘 어울리지 않지요.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들은 대부분 이 솥뚜껑 아니 아니 꼭 친정어머니 같은 정겨운 손을 가졌습니다. 피아노를 칠 때 두 손이 동그랗게 모아져 손 끝으로만 치기 때문에 손목의 움직임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일까. 미스 타건이 거의 없고 다섯 손가락의 균형이 동일하며 소리를 날카롭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부드러운 구간에서는 물 흐르듯 부드러우면서도 소리는 투명하지요. 이 손을 가진 피아니스트들의 음색은 온화한 특징이 있고요.
다음으로 철학적인 연주가 그렇습니다. 브렌델과 임윤찬의 연주에서 저는 음악에 대한 깊은 사색을 많이 느낍니다. 이 사색이 개인적인 감성이나 감정으로만 그치지 않고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분석하여 자신만의 철학이 바탕이 되는 음색을 펼쳐 보입니다. 음악과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고, 작곡가에 대한 신뢰가 있는 겁니다. 임윤찬에 비해 브렌델이 보다 더 온화하고 부드럽지요. 브렌델의 베토벤은 제게 차분함과 여유를 줍니다.
알프레드 브렌델(1931~)
임윤찬의 연주는 보다 역동적이고 젊습니다. 아무래도 나이 차이가 워낙 많으니까(브렌델은 1931년생으로 만 91세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요. 임윤찬의 황제에는 가장 좋아하는 베토벤 해석가 브렌델의 장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어찌나 놀랐는지 몰라요. 임윤찬에게서 브렌델을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었거든요.
그와 동시에 임윤찬 만의 에너지가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그가 피아노로 발산하는 에너지는 신체가 뿜어내는 물리적 힘과 조금 다릅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들 가운데는 덩치가 무척 좋은 분들이 많습니다. 미켈란젤리는 워낙 거구여서 피아노가 작아 보였지요. 라흐마니노프와 리히테르도 거구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타건은 강철 같았습니다. 폭발적이었고요.
아시다시피 임윤찬은 덩치가 작은 편입니다. 타고난 신체 조건이 만들어내는 근육의 힘만으로는 그의 에너지를 설명하기 어려워요. 그의 파워풀한 타건은 단순히 근육에서 나오는 힘이 아닙니다. 이를 그저 열정이라고도 표현하기에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순수한 열정 그 이상의 무언가가 그의 연주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의 투지와 비슷한 걸까요. 덩치가 좋은 유럽이나 남미 선수들에 비해 체격 조건이 불리한 우리나라 대표팀 선수들은 전후반 90분을 오로지 깡으로, 끈기로, 투지로 달립니다. 그리고 그 의지가 가끔 기적을 만들기도 하지요. 이번 월드컵처럼...임윤찬에게서도 이런 기적을 만들어내는 투지, 강한 의지를 느낍니다.
나... <황제>... 좋아했냐...?
결론적으로 저는 임윤찬에게 완전하게 설득당해 버렸습니다. 그의 <황제>를 듣고 난 후 <황제>는 더이상 제가 그동안 느낀 오만하고 과시욕 넘치던 그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오만방자하게만 보였던 피츠제럴드 다아시의 영혼이 실은 누구보다 진실되고 따듯하다는 걸 깨달은 엘리자베스 베넷처럼, 저도 저의 고루한 편견을 드디어 깰 수 있었습니다. 다른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찾아 들었더니 놀랍게도 편견이 더이상 저를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다른 연주들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정말 대단한 겁니다. 임윤찬은 자신의 연주만을 제게 설득한 게 아니라 베토벤의 작품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한 것이지요.
임윤찬은 <황제>를 제목 그대로인 '황제'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제국을 거느리고 영토를 넓히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그런 권력 계층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카덴차는 희망을 품고 드넒은 대양을 항해하려는 젊은 선원의 노래 같았어요. 그의 트릴은 단지 양념처럼 꾸밈음이 아니라 본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였습니다. 그는 마치 이렇게 노래하는 듯 했어요.
"나는 비록 진짜 황제는 아니지만, 세계를 향한 순수한 호기심으로 즐거이 탐구하리라, 탐미하리라, 찬양하리라, 그러는 동안만큼 나는 세계를, 아니 세계를 품는 나 자신을 정복한 진정한 황제이리라"
무엇보다 임윤찬과 협연한 광주시향(광주시립교향악단)의 합이 최고였습니다. 광주시향은 현악기들의 소리가 중첩되어 묵직하면서도 약간 날것의 텍스쳐를 들려주었는데 숭어처럼 팔딱거리는 임윤찬의 연주와 너무나 잘 맞아 떨어집니다. 관악기들의 절제감도 좋았습니다. <황제>의 전반적 뉘앙스를 '과시'가 아닌 '희망'으로 만든데에는 관악기의 역할이 가장 컸지요. 또한 전체적인 곡의 속도감이며 음의 고조도 제 취향에 딱 맞았습니다.
음반 명가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단지 임윤찬이기에 녹음한 것이 아님을 알겠더군요. 홍석원 지휘자는 이번에 처음 알게되었습니다만 시원시원한 그의 지휘가 베토벤과 결이 참 잘 맞는 것 같아요. 두 사람은 이미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통해 처음 만났습니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 이전의 연주여서 일까, 임윤찬의 해석이 반 클라이번 때보다 호로비츠 버전에 좀 더 치우쳐져 있더군요. 단 몇달만에 곡을 누구의 버전, 누구의 색깔이 담긴 해석이 아닌 임윤찬 고유의 해석으로 만든 것에 놀랐습니다. 얼마나 지독하게 훈련을 거듭하고 고민했을지도 말이죠.
예술을 즐기고 향유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기대감'이 아닌가 합니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미지의 아름다움을 가져다 줄 무엇을 기대하고, 편견을 깨고 좁았던 인식의 넓이를 보다 더 확장시켜 줄 그 누군가를 기대하는 것 말이죠. 그런 무언가, 누군가와 조우하면 그저 행복해 집니다. 마치 소설에만 가능하리라던 해피엔딩을 만난 것 처럼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