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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가희 Apr 17. 2019

당신도 혹시 걱정인형입니까?

카르페디엠? 카르페디엠!

한때 선배들이 나에게 붙여준 별명은 '걱정인형'이었다.

걱정인형은, 과테말라에서 걱정이나 공포로 잠 못 드는 아이가 편안히 잠들길 기원하며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선물하는 전통 인형이다. 걱정은 모두 인형에게 털어놓고 편안히 쉬라는 의미의 선물. 그렇다면 그 이야기를 묵묵히 품고 있는 그 인형은 세상의 수많은 고민들을 모두 끌어안고 있는 것일까. '걱정인형'이라는 나의 별명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나는 그 걱정인형만큼이나 걱정이 많은 아이였다. 늘 돌발상황의 연속인 방송 일을 하면서, 일이 안 풀릴 때는 주체하지 못할 불안감이 얼굴에 단번에 표가 나는 타입이었고, 일이 잘 풀릴 때에도 그 다음에 다가올 난관에 대해 미리 걱정을 늘어놓는 아이였다.

내일 해야 할 일을 수첩에 정리하느라 잠들지 못했고, 내일 입을 옷을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잠들지 못했다. 운이 좋게도 일이 끊이지 않아 거의 쉰 적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늘 계속, 더, 일해야 한다는 불안감 때문에도 잠들지 못했다.

20대 때는 빨리 서른이 되고 싶었다. 서른이 되면 당연히 번듯한 집도 생기고 형편도 나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드디어 그렇게나 동경해왔던 서른이 되었는데도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나는 또다시 다가올 마흔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걱정의 연속이었다.

얼마 전에는 크루아상 샌드위치를 먹다가 나의 걱정력(?)에 대해 깨달은 적이 있다. 접시 위에 샌드위치를 올려놓고 먹기 좋게 나이프로 미리 잘라두었는데, 그건 철저한 계산 속의 나눔이었다. 배가 고픈 상태에서는 빵만 먹어도 맛있기 때문에 어떤 조각은 빵만 잘라두었고, 그다음 조각은 햄과 채소가 조금 섞이게, 그다음 조각은 조금의 빵과 햄 그리고 치즈까지 적절하게 섞어 최상의 맛을 느낄 수 있게끔 만들어 놓았다. 배가 부를 때에 빵 부분만 먹게 되면 너무 맛이 없을 것 같다는 걱정이 들어 나름대로 머리를 쓴 거다.

그런데 나는, 먹다 먹다 배가 불러서 결국엔 최상의 조합으로 만들어 둔 마지막 조각을 먹지 못하고 버리게 되는 억울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엄마가 콩밥을 주면, 먹기 싫은 콩부터 모아서 한 입에 꿀꺽 먹고서는 그 뒤론 여유롭게 흰쌀밥을 먹었다. 때때로 엄마는 '너 콩 되게 좋아하는구나!' 하며 콩을 한 주걱 더 퍼주어서 나를 울상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어릴 때부터 자주 이런 일을 겪어왔지만, 나는 늘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다가올 시간들에 대한 걱정. 어쩌면 그것은 나의 성격이자 습관이었다. '걱정'으로 인해 꽤 많은 시간을 낭비하며 살았다.

지금의 나는, 유난히 길었던 겨울이 지나가고 비로소 따스한 봄이 왔는데도 이 봄이 너무 빨리 지나가버리는 건 아닐까. 금세 여름이 오고 또다시 더위에 시달려야 하는 건 아닐까. 현재의 봄을 만끽하지 못한 채로 걱정의 날들을 보내고 있다.


세상엔 왜 이렇게 걱정해야 할 일이 많은 걸까.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아이들의 감성을 일깨우기 위해 모험적이고 자유분방한 수업을 감행하는 키팅 선생에게 교장은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에게 예술에 대한 꿈을 심어주지 마세요. 베토벤이 되지 못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우리의 걱정은 어쩌면, 최고가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실패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후에 다가올 실패의 아픔을 줄이고자 도전하지 않거나, '어차피 난 안 돼'하고 미리 단정 지어버리곤 한다.

청춘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파야만 하고, 후에 내가 좋아하는 흰쌀밥을 먹기 위해 실은 죽어도 먹기 싫은 콩 한 줌을 한 번에 삼키는 고통을 감당해야만 하는 것. 우리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아파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전혀 예측하기도 힘든 내일을 살고 있는 것일까.


이러다 진짜 인형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카르페디엠(현재를 즐겨라)은 영화에만 존재하는 이상일지도 모르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앞으로 살아갈 날들 중 현재의 내가 가장 아름다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걱정과 두려움으로 낭비해버리기엔 너무나 아깝고도 눈부신 아름다움. 인형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

봄에는 그저 봉긋이 피어오르는 꽃을 보며 참 예쁘다는 생각을 하고, 여름에는 작열하는 태양에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그것이 오늘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


그러니 걱정은 베개 밑 인형에게 잠시 부탁하고, 그저 오늘을 상쾌하게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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