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관순 Oct 01. 2023

별빛이 흐르던 뒷간의 추억

18-07

  

신분당선이 개통되면서 산행코스가 청계산으로 바뀌었다. 우리 같은 장노년층이 신분당선을 많이 이용했다. 청계산 입구역에 내려 화장실에 들르면 저마다 한 마디씩 구시렁댔다. 전철역 화장실이 사치하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고속도로 휴게소도 멀쩡한 화장실을 다 뜯어고쳤다. 그래서인지 한국 하면 화장실에 ‘엄지 척’하는 외국인들이 그리 많다고 한다. 딸의 말대로 화장실 콤플렉스가 있는 세대라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990년대  MBC가 기획 시리즈물로 제작 방송한 ‘그때를 아십니까?’는 잊힌 우리네 옛 생활 문화를 구석구석 살갑게 살려내 “맞아, 그땐 저렇게 살았지.” “그래, 어떻게 저 시절을 살았나 싶어. 꿈만 같아.” 모두들 한 마디씩 하면서 옛정서에  빠져들곤 했다. 그 시절을 함께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고 녹슬지 않는 그림판으로 기억 속에 간직되어 있다.    

  방송에서 보듯 ‘뒷간‘ '변소'로 불렸던 우리의 재래식 화장실은 전설 속 먼 이야기가 아닌,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우리들의 친숙한 일상의 공간이었다. 아침마다 동네 공중변소 앞에 줄을 서던 기억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생생하게 떠올릴 테니까. 겨울이면 똥탑을 쌓고, 여름에는 똥통에 빗물이 들어와 한 덩이 눌 때마다 엉덩이를 쳐들어 올려야 했던 기막힌 사연들... 경험이 쌓일수록 요령도 늘지만, 딴생각을 하다가 순간의 타이밍을 놓치는 날이면 어김없이 튀어 오른 똥물이 엉덩이에 주사를 놓았다. 그리 멀지도 않은 시절의 '웃고픈' 기억들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때를 슬퍼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좋든 싫든 우리가 살아온 삶이었고, 삶은 추억이 되고 화석이 되어 그리워지는 것이니까. 뒷간에서 변소로, 다시 화장실로 진화하면서 도시 곳곳에 우중충하게 들어서 있던 재래식 공중화장실이 사라지고, 이젠 전철역마다 깨끗한 현대식 화장실이 시민의 편의를 대신하고 있다. 겨울에는 온수가 나오고 비누, 건조기가 있고 칸칸이 화장지도 비치해 놓았다. 서울에 배낭여행을 온 어느 외국인이 그랬단다. “이곳에 살림을 차려도 훌륭하겠다고!”. 누구에게도 개방하는 한국 화장실 문화처럼 친절한 나라가 있을까. 유럽을 여행하다 화장실 고충을 겪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가히 세계 화장실 문화의 1등 국가라 해도 손색이 없겠다.     


  어린 시절, 시골의 외갓집 추억은 뒷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방학 때마다 외가에 가는 일은 설렘이었지만 화장실을 생각하면 걱정이 앞섰다. 마을의 한 아이가 똥독에 빠졌다는 소리를 들은 후로는 고민이 더 깊어졌다. 멀찍이 울타리 구석에 위치한 것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뒷간마다 귀신이 있다는 외삼촌 얘기가 있은 뒤로는, 밤에 용변 보는 일이 공포스러웠다. 설상가상으로 설사를 만난 날 밤에는 고통은 더 클 수밖에. 등불을 든 외할머니를 앞세우긴 해도 판때기에 다리를 벌려 뒷간에 앉는 일부터는 오롯이 나의 몫이었으니까. 할머니가 비쳐주는 흐릿한 불빛에 두 발을 올리는 것부터 바싹 신경이 쓰였고, 다리를 벌려 앉기 무섭게 코부터 틀어막았다. 

“할머니?” 

“오야, 예 있다. 걱정 말고 일 잘 보래.” 

“할머니 가면 안돼!”     

  나는 중간중간 할머니를 불러서 어둠 속 무서움을 달랬다. 

  철이 들어서야 ‘뒷간과 처갓집은 멀리 둬야 한다’라는 것을 알았고, ‘똥은 꼭 집에 와서 누라’라고 하신 할아버지의 말 뜻을 헤아리게 되었다. 똥은 단순한 배설물이 아닌 농작물의 성장에 꼭 필요한 농촌의 귀한 천연 비료라는 것을 안 후로는 다급하지 않으면 집에서 일을 보려고 애를 썼다. 오줌은 오줌대로 오줌통에 누었다. 뒷간의 ‘뒤’는 방위로 북녘에 해당한다. 북녘은 어둡고 음습해 가급적 생활공간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뒷간에는 심술이 고약한 뒷간 귀신(廁間神)도 있다는 말에 이래저래 화장실 고충은 클 수밖에 없고, 설상가상으로 설사까지 겹친 밤이면 최악의 상황을 불렀다.     

  이러한 고충이 요강을 부추겼다. 요즘 젊은 세대에겐 낯선 단어일 것이다. 본 적도 없을 테니까. 뼈대 있는 양반집은 요강을 전담하는 ‘요강 담사리’라는 종을 따로 둘 만큼 요강은 생활의 편의 도구였다. 요강은 본래 소변 전용으로, 마님의 나들이에 챙겨야 할 필수품이었다. 궁궐에서는 대소변 공용으로 ‘매우(梅雨) 틀’이란 특제 요강을 사용했다. 학자들은 경복궁에 적어도 28개소의 뒷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양의 거리마다 똥냄새가 진동할 수밖에…. 하지만 농촌에서는 ‘똥재’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한 사발의 밥은 주어도 한 삼태기 똥재는 주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생겼을 정도니까. 똥재는 농사에 필요한 양질의 천연비료였다. 똥 시장이 열리는 수원에서는 똥재 가격이 상품 한 섬에 30전, 중품 20전, 하품 10전에 거래되었단다. 이처럼 뒷간은 현대식 화장실에는 없는 완벽한 리사이클링의 천연 유기농 비료를 생산하는 곳이었다. 수질오염 문제를 남긴 서구의 수세식 화장실과는 차원이 다른 자연친화적 설계였다. 일본은 배설자의 신분에 따라 등급을 매겼다고 한다. 금테 두른 똥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상품은 귀족의 똥재이고 다음이 공중변소, 그리고 상민, 범죄자 순으로 값을 매겼다고 한다. 합리적으로 가격을 매겼다고 생각되는 것이 '섭생(input)'에 따라 '분뇨(output)'의 품질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뒷간의 추억은 외갓집을 떠올릴 때 들춰지는 단골 메뉴였다. 오늘은 고향 친구들과 만나 어쩌다 변소 얘기가 나와 한바탕 웃었다. 저마다 시골집 뒷간에 얽힌 사연들을 쏟아내면서 청계산 산행을 즐겁게 해 주었다. 아득한 옛이야기지만, 외할머니 댁 뒷간에서 큰 일을 해결하고 나와 바라본 밤하늘도 잊지 못할 풍경이다. 온 하늘에 보석을 뿌려놓은 듯 반짝이는 별들…. 쏟아지는 별빛에 소름이 돋던 아름다운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우리는 슬프게도 그런 밤하늘을 잃어 벼렸다. 불빛에 가리고 탁한 대기에 가려서 총총하게 빛나던 별들이 하늘에서 사라졌다. 별들의 추억은 그래서 더욱 진하고 애잔하게 남는다. 이미 까마득하게 멀어져 간  옛 일인데도 주마등처럼 스쳐간 그 별밤이 유난히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러한 밤에는 고향 밤하늘을 생각하며 눈을 감는다. 그리고 뭇별이 살아나기를 기다린다. 서서히 희뿌염한 기억 속을 헤치고 하나둘씩 별들이 살아난다. 저마다 명징한 빛을 쏟아내면서 하늘 가득히…. (15.1) 

이전 06화 옹이가 있던 자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