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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관순 Oct 01. 2023

부치지 못한 우표

18-08

   

  시간이 한가할 때는 뭔가를 꺼내 뒤적거리거나 정리하는 습관이 있다. 옷장, 책장, 사진첩 하다 못해 신발장이든 눈에 꽂히는 대로가 대상이다. 내 나름 의미가 있다고 보관해 두었을 텐데 나이가 들수록 가치의 경중이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어제의 귀했던 것이 오늘에 무용해지고 별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건 나잇살 때문일 것이다. 일흔이 되면서 되도록 버리는 일에 익숙해지자고 다짐했다. 지금은 고물상처럼 끌어모았던 것들을 하나씩 내보내는 시간이라 생각하면서…. 

  물품별로 'S·A·B' 등 세 등급으로 분류했다. 모두 나와 인연이 있는 것들이다. 농밀한 기억이 있는, 나와 끝까지 함께 옆에 두고 싶은 S급을 제외한, 남은 물품은 해마다 중고차 연식처럼 값이 떨어져 차례차례 폐차에 이르는 식으로 버려졌다. 버릴 때는 나만의 가벼운 작별 의식을 가지며 나와 함께 한 시간에 감사한다. 오늘은 필요 없는 사진을 버리려고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사용하지 못한 새 우표가 42장이나 바인더에 들어있는 것을 보았다. 넣어두고는 까맣게 잊고 지내온 것이다. 30년을 잠자고 있는 대한민국 우표…. 편지 쓸 일이 없는 세상이 되기 전에 다 사용했어야 했는데, 내 게으름 때문에 42통이나 되는 미 발신 편지가 발생한 것 같아서 우표 보기가 미안했다. 어쩌다 이 많은 미아를 만들었을까? 생각하니 민망함까지 더해진다.


  우표 한 장이면 전국 어디든 마음을 실어 보내던 나의 젊은 날이 있었다. 붙인 모양에도 마음이 담긴다고 해, 봉투 상단 왼쪽 모서리에 사각이 반듯하게 우표를 붙여서 창구에 디밀고 나올 때의 기분은 숙제를 마친 아이처럼 양 입꼬리가 올라가던 기억이 정겹게 떠오른다. 매월 용돈을 받을 때마다 많지 않은 용돈에서 그 달치 우표부터 샀던 학창 시절을 생각하면 꽤나 편지 쓰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편지를 자주 썼으니 오는 편지도 많을 수밖에는. 

  거의 사나흘 간격으로 편지가 도착했다. 그 바람에 3년 늦게 군에 입대해 최전방에서 보낸 졸병 생활이 수월하지 않았다. 편지로 인해 겪는 수난 때문이었다. 봉투에 쓰인 글씨체가 곱상한 것은 늘 개봉 흔적을 남겨 내 손에 들어왔다. 그것처럼 자존심 상하고 화가 나는 일은 없었다. 그때는 정말 치받는 증오로 피가 거꾸로 돌게 만들었던 선임 병장이었는데, 세월이 지난 지금 생각하면 빙그레 웃음부터 나온다. 나에게 아름다운 추억 하나를 선물해 준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편지는 ‘설렘’과 동의어다. 설렘은 보낼 때보다 받을 때 배가 되었다. 기다렸던 편지가 대문 우체통에 들어 있을 때, 답장을 받을 때, 그 기쁨은 편지만이 내게 안기는 특별한 선물이 되었다. 제대 후 대학에 복학하면서 많이 불렀던 노래, 어니언스의 ‘편지’도 내게 주는 편지의 낭만이었다. “하얀 종이 위에 곱게 써 내려간 너의 진실 알아내곤 난 그만 울어버렸네...” 편지만은 꼭 만년필로 썼다. 형님이 독일 출장을 다녀오면서 몽블랑 만년필을 선물로 받은 후로는 편지지와 만년필은 늘 함께 다녔다. 겉멋이 들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정성과 존중을 담아 고급스럽게 편지글을 쓰고 싶어서였다. 사각사각 종이 위에 미끄러져 나가는 만년필의 촉감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편지를 쓰다가 글귀가 막히면 창밖을 한참 내다보고, 그러다 상이 떠오르면 다시 또박또박 글을 이어갔다.

    사연은 내 것이어도 신경 쓰이는 건 늘 자간과 행간을 살필 상대 얼굴이었다. 편지가 잘 써지는 날엔 글자 획에도 내 손의 미세한 떨림이 남아 있었다. 팔을 다쳐 한동안 편지를 쓰지 못할 때는, 우체국에 들려서 편지를 부치는 손들을 보기도 하며 생각했다. 편지가 얼마나 가슴 뛰게 하는 것이며, 사연을 띄워 보낼 데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쁨인가를. 게다가 설렘으로 기다릴 눈동자를 떠올릴 수 있다면, 그처럼 탐스런 행복이 어디에 있을까? 나 혼자만의 달콤한 꿈을 꾸곤 했다.     

  우체국에 들려 가슴에서 편지를 꺼내고 우표에 침을 발라 붙일 적에 혀끝에 감도는 그 알싸함이란…. 우표 맛은 그때마다 다 다르게 느껴졌다. 그러나 끝내 안타까운 것은 답장을 부르지 못한 내 편지의 행방이었다. 받고도 답이 없는 건지, 어디로 잘못 배달되어 미아가 된 건 아닌지. 물을 곳이 없으니 애먼 입술만 깨물었다. 한동안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전화가 귀했던 시절에 편지가 갖는 공간은 무한대였다. 지금은 편지 자체가 전설처럼 되고 말았지만, 그때는 편지 한 통에 온 우주를 담을 수 있었다. 편지를 쓰며 갖는 감정이 그랬고, 받은 편지에서도 그런 걸 느끼며 나만의 상상을 즐겼다.      


  내겐 아직도 다 읽지 못한 편지가 남아 있다. 43년 전 받은 어머니 편지가 그랬다. 본가에서 첫 딸을 얻고 살림을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제주도로 여행을 가셨던 어머니가 보내셨다. 아직도 또렷하게 남은  ‘1977.10.10.’ 자 우체국 소인…. 어머니는 유약한 돌배기 손녀가 걱정이 되셨던 모양이다. 아기 몸에 좋다는 벼 윗동 이삭을 잘라 깨끗이 씻고 다듬어 한지에 싸 보내면서 당부하신 편지 글이었다. “착한 어멈 보아라. 다녀간 지 수일이 되어 두루 궁금하구나”로 운을 뗀 편지는 어린 며느리에 대한 당부가 절절히 넘쳤다. ‘모나미 153’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글자 한 획 한 획에 물안개처럼 흐릿하게 어머니 얼굴이 흐른다. 아직도 그 사랑의 깊이를 더듬고자 몇 년에 한 번은 꺼내 보는 못다 읽은 편지이다. 때로는 아련하기도 했다가 아득하기도 한 어머니 사랑. 편지만큼 사람들 가슴에 영롱한 다리를 놓아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소통 수단이 많아 귀한 줄 모르지만, 유일한 소통수단일 때의 편지에는 정성이 있고 마음이 있고 사연이 있었다. 아직도 마음에 부쳐야 할 편지가 있고, 못다 읽은 편지가 남은 이유이다. 

  편지는 설렘이고, 기다림이고, 그리움이다. 1998년 일기책 갈피에는 또 다른 편지가 숨어있었다. 내 편지를 받고 부산에서 보내온 옛 여자 친구의 답장이었다. 지금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없지만, 편지엔 그리움이 쏟은 잉크처럼 엎드려 있다. 그녀가 이민을 떠나던 해, 마지막 가을을 알려온 편지이다.        

❝딸아이는 공주 인형에 옷을 입히고 나는 옆에서 거울을 보며 고단한 삶의 때가 묻은 이마를 닦고 있는데, 네가 보낸 엽서로 가을이 도착했네. 그 졸리는 일상에 찾아온 너의 종소리가 눈을 뜨게 했고, 낙엽 하나 그려 보낸 너의 마음이 아직도 순정남 같다고 깔깔대며 웃었지. 그러면서 창밖으로 흩날리는 낙엽을 보다가 문득, 아직도 그대로 남은 마음속 얼룩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말았어….❞      


  오늘은 그동안 실행을 못하고 차일피일 미뤄온 수백 통의 받은 편지를 꺼내놓았다. 편지의 주인공들 중에는 세상을 떠난 사람도 여럿 있다. 다시 읽을 것도 아니면서 아쉬움이 남아 버리지 못했던, 누렇게 퇴색한 편지들을 언제까지 마음에 봉인해 둘 것인가. 이제 편지 뭉치와 이별할 때가 되었다. 편지를 차곡차곡 박스에 담으면서 사연마다 날개를 달아 주고 싶었다. 내 젊은 날의 꿈이여, 기쁨이여, 사랑이여, 다들 자유롭게 훨훨 날아가거라…. 이별의식을 간단히 마치고 편지 박스를 들고나가 분리수거를 했다. 이제 내 손에 남은 것은 붙이지 못한 우표 42장뿐이다. 아직도 편지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일까. 우표를 두 손에 들고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책장 서랍을 열고 다시  맨 아래 넣어두었다. 혹시 쓸 때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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