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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관순 Oct 01. 2023

사라진 설렘과 기다림의 시간

18-10

  

  코로나의 일상이 정상을 찾으면서 지난 주말 오랜만에 결혼식장을 찾았다. 마흔 된 딸을 시집보낸다고 감격하는 친구를 축하하기 위해 찾은 예식장에서 반가운 옛 친구들을 만났다. 예식을 마치고 카페로 자리를 옮겨 젊은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회포를 풀었다. 사진을 전공한 친구와 성악을 한 친구, 문학을 한 내가 친구가 된 것은 같은 대학을 다녀서였다. 학과는 달라도 기독 학생으로 함께 서클활동을 하면서 흉허물 없는 친구가 돼 젊은 한 시절을 같이 걸었다. 이젠 다들 장년의 삶이 되었으니 주고받는 대화가 모두 지난날 그 이야기지만, 우리는 그때를 회상하는 재미에 빠져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이렇듯 10년을 못 만나도 금방 퍼즐이 맞추어지는 것이 친구이다.   


  성악을 전공한 친구가 들려주었다. 아버지가 딸에게 오래된 상자를 열어 소장해 온 3.5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보여주며 의중을 물었다. 

“얘야, 아빠가 아꼈던 것인데 네가 보관할래?” 

“아빠, 이런 건 박물관이나 수집가들에게나 필요하지 않을까? 난 사양할래요.” 

  딸은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시답잖다는 표정을 얼굴에 그렸다. 환영받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하진 않았지만, ‘박물관’ 운운하는 표현에서 섭섭함이 살짝 마음에 밀려들었다. 아비가 박물관 갈 나이라도 됐다는 뜻인가? 호불호가 분명한 것은 좋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같은 말을 해도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가며 하면 좋을 텐데 그런 점에서는 둔감하다.     

 LP로, 디스크로 음악을 듣던 시절이 불과 얼마 전인데, 세상이 그리도 빠르게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을 향해 불화살을 당기는 느낌이었다. 음원을 파일로 다운로드하여 듣고, 모든 정보를 핸드폰에 담고 사는데 익숙한 세대들이 흘리는 얘기를 듣다 보면, 불쑥불쑥 현대판 청맹과니의 무식 무지함이 망둥어처럼 튀어 오를 때가 있다.     

  사진가 친구도 한 수 거들었다. 우리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필름 값도 비싼 데다 일단 카메라에 필름을 넣은 후에는 다시 뺄 수도 없으니 순간순간 판단을 잘하고 찍어야 했다. 게다가 값은 비싼데다 필름 한통에 고작해  20~30여 컷으로 제한돼 있어서 필름이 떨어질까 봐 남은 컷을 셈하고 아끼면서 셔터를 눌러야 했다. 사진을 다 찍은 후에는 사진 내용을 확인해 볼 수가 없으니 서둘러 필름을 현상소에 맡기는 것이 상수였다. 그리고 사진이 인화되어 나오기까지 몇 날을 또 기다렸던가.      

 그 시절 사진은 나온 대로가 다였다. 보태고 뺄 것이 없으니까. 지금 같으면 갖은 보정 기법으로 새 얼굴을 뚝딱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수정 불가의 시절에는 찍힌 대로가 다였다. 인화된 사진을 보고서야 모든 것이 결판났다. 잘 나왔다, 못 나왔다 볼멘소리가 나오고, 더불어 사진 몇 장으로 카메라 맨의 실력이 도마에 올랐다. “이게 뭐야. 나 눈 감고 있잖아?” “내 사진 뽑지 마. 안 찾을 거야.” 제 얼굴 잘못 나왔다고 토라지는 여학생들에게 핀잔만 듣고 ‘미안해’ 하던 얼굴이 지금 말하고 있는 그 친구였다. 카메라 들고 나온 죄로 구박을 받고도 싱글싱글 웃는 데는, 여전히 다음에도 사진 잘 찍어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는 친구들의 형편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 시절, 약속은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영화를 보거나 야외로 놀러 가기로 약속을 한 날이면 으레 한 친구는 20~30분 늦게 나타났다. 모임마다 그런 짓하는 사람은 거의 정해져 있지만, 그중에도 기다림의 끝판왕은 오늘 혼주였다. 그래도 그때는 인성들이 너그러워 한참을 기다려 주고도 크게 타박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핸드폰으로 실시간 확인이 가능한 요즘 세상에는 어디 용납이나 될 일인가.  세상이 편리해진 만큼 기다리는 데 쓰는 시간이 줄면서 분단위 시간관리가 가능해진 세상이 된 건 좋지만, 반대로 잃는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설렘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 노래를 LP로 들으면 어떤 느낌일까?” 

“역광으로 찍었는데 잘 나왔을까?” 

“그녀가 내 편지를 받아봤을까?”    

  지금처럼 영악하지 못했던 그때는 모든 것을 선의로 해석하고 받아들였다. 실시간으로 추적을 당할 리도 없었으니 둘러대는 요령이 생기고 대충 넘어갈 틈도 주었다. 주변의 간섭이나 통제에서 수월하게 벗어나 나만이 즐기는 공상과 상상의 여백도 가질 수 있었다. 지금은 나의 모습이 너무나 투명하게 드러나는 세상이라서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더 많아졌다. 세상이 편해졌다고 여유라는 날개를 달아준 것도 아닌데…. 어떡하든 디지털 삶에 뒤지지 않으려고 머리를 쥐어짜느라 삶은 바빠지고 더 고달파졌다.      


  모처럼 해묵은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들다가 날이 어둑해져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에서 다시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손에 쥔 휴대폰에 머리를 박고 삶의 시간을 촘촘히 쓰고 있는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연신 화면을 굴려 패션을 찾고, 먹방을 살피고, 게임에 몰입하는 사람들. 그들을 보면서, 내게서 사라져 간 그리움들이 생각났다. 마치 일상의 여백 같던 그 기다림의 시간들이 아득하고 아련하게 멀리서 요령처럼 흔들렸다. 가수 진성이 노래한 ‘안동역 앞에서’가 그런 것일까? “첫눈이 내리던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 못 오는 걸까 안 오는 걸까~ 오지 않는 사람아~ 기다리는 내 마음만 녹고 녹는다~” 퍼즐의 한 조각씩을 들고 서로를 기다리는 두 사람은 끝내 못 만나고 마는 걸까?   

  장노년의 삶이란 ‘그리움’이고 ‘추억의 퍼즐’이다. 각자가 쥔 퍼즐을 들고 친구들과 한 자리에 모여 빠진 조각들을 채울 때, 잊혔던 그 시절이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날 때, 그 환한 기쁨은 반갑고도 놀라운 것이다. 빨리만 가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느리게 흘러가는 과정을 바라보는 것도 즐거움이 아닐까. 그날 오래된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느꼈던 그 감정처럼.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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