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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관순 Oct 01. 2023

유한한 인생의 ‘친구 & 우정’

18-12

    

금요일마다 과천 대공원에 간다. 올금회(all金會)란 이름으로 만나는 친구들과 두어 시간 둘레길을 걷기 위해서다. 2014년부터 시작했으니 햇수로 10년이 된다. 그러면서 암묵적으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금요일 다른 약속은 피할 만큼 모두들 이 자리를 아껴왔다. 아홉 명으로 모임을 시작했는데,  모두 남다른 인연으로 만난 친구들이다. 고향도 , 학교도, 전공도, 성격도 다 다른, 동질적인 면은 하나도 없으면서 오랜 세월을 이어온 우정이다. 친구끼리 서로의 친구를 소개하며 만나기 시작한 것이 아홉이 되고 반세기에 이르도록 정분을 쌓았다. 강했던 개성이나 주장도 이젠 모두 둥글둥글한 조약돌이 되고, 무슨 말을 해도 흉이 되지 않는 헌 잠옷처럼 편안한 사이가 되었다.       


  오늘은 모태신앙으로 자라면서도 담배와 절연을 못해 온 친구가 마침내 금연을 선언했다. 그러면서 젊은 날 담배 때문에 박해받던 얘기를 꺼내 함께 웃었다. 어느 자리에 가든 담배를 꺼내면 눈을 치켜뜨고 타박하는 밉상인 얼굴이 꼭 있었단다. “담배 피우세요? 교회 다니시잖아요?” “모태신앙이시잖아요. 그래도 되는 거예요?” 모태신앙과 담배가 무슨 앙숙이라고, 물어도 꼭 출생 기록부터 들추는 불온한 인간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 그의 대답은 마음에 꽂히는 드라마의 대사와 같다. 

  “야, 그렇다고 내가 교회를 끊으랴?”   

   친구의 유머 감각은 젊어서부터 늘 주변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 친구에게는 담배 말고도 인 박인 것이 또 하나 더 있었다. 언어 습관이다. 옆에서 멍청한 소리를 한다거나 조금만 도리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친구들에게 가차 없이 쏴 붙이는데, 그때마다 관형사처럼 올려놓는 말이 있다. 이를 테면 ‘지랄’, ‘왜 사냐?’ 같은 것이다. 그렇게 구박을 당하면서도 담배처럼 버리지 못하는 말버릇은 여전했다. “지랄! 알았다 고칠게. 됐냐?” 이런 식이다. 군더더기 서술어 없이 명사와 동사로만 칼 같이 끊는 대화가 특징이었다.

   그러던 친구가 아내를 암병동에 입원시킨 후로는 말수가 급격히 줄었다. 그럼에도 금요일 모임만은 열 일 제치고 나타나 친구들의 존중을 받았다. 또 한 친구는 척추에 심을 박고도 재활한답시고 꼬박꼬박 나타나 성의가 갸륵하다는 칭송을 들었다. 친구마다 성격과 취향은 다 달라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나이가 들수록 더 농밀해졌다. 그러던 것이 언젠가부터 한 가지 마음 쓰이는 것이 생겼다. 둘레길 모임에 하나 둘 불참자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60대 팔팔했던 나이로 워킹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런 허망한 일이 생기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10년은 까닥 없고 관리만 잘하면 20년도 너끈할 것이라고 뜻을 모았는데 10년도 안 돼 낙오자가 생기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동안에 저 세상 사람이 된 한 친구 말고도 둘이나 불참 명단에 자주 이름을 올렸다.       

“김 사장은 이번 주도 못 나오나?”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아. 관절 수술 날짜를 잡았다고 들었어.”

“이 교수는 전립선암 때문이고, 허 원장은 손자 보느라 묶여 있고. 그럼 다섯이네.”      

주변에서 골골했던 친구보다 팔팔했던 친구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허망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한다. 인생이란 너나없이 지구라는 곳에 잠시 전세를 내어 살다가 떠나는 허무한 존재이다. 영웅호걸도 떠나면 잊힐 뿐이다. 우리가 떠나면 누군가가 올 것이며, 우리가 있던 자리는 누군가에 의해 메워질 것이다. 그때도 푸른 창공과 검푸른 바다는 여전히 광활할 테고, 별들로 가득 찬 하늘은 변함없이 반짝일 테니까. 인생은 그 속에서 생성과 소멸의 주기를 탈뿐이다. 그 짧은 주기에서 만나는 친구들이, 그래서 더욱 애틋하다.  


   나이가 드니 지난 일을 돌이켜 보는 습관이 생겼다. 오늘은 이른 아침에 안개 낀 호수공원을 걷다가 젊은 시절, 곤경에 처해 있을 때 내 손을 잡아주던, 지금은 딴 세상 사람이 된 친구가 생각났다. 손에 느껴지던 친구의 체온은 여전히 따뜻하다. 마음을 털어놓고 기쁨을 나누고 슬픔의 짐을 나누어질 친구가 있다면 한 세계를 갖는 것 같은, 복이 있는 사람이다. 바람에 흔들리면서 늘 웃어주는 들꽃과 같이, 친구는 그러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같이 흔들려주고 같이 노래해 주는 그러한 존재….       

  길을 가다 우체통이 보이면 마음을 전하고 싶고 소식이 궁금한 얼굴이 떠오르는가? 고개를 끄덕인다면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좋은 음식을 먹을 때 부모님이 생각나듯이 나는 우체통을 보면 잊고 있던 얼굴이 되살아날 때가 있다. 친구가 그리워지면 헤르만 헤세의 시 ‘안갯속을’ 산책해 보는 것도 나에겐 즐거움이다. 시는 잊었던 마음에 그리움을 길어 올리는 샘물과 같다. “안갯속을 걸어가는 것은 신기합니다. 숲마다 바위마다 호젓합니다. …  나의 생활이 밝았을 때는, 이 세상의 친구들로 가득했습니다. 이제 안개가 내리니 한 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 인생은 고독합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모릅니다. 모두가 호젓합니다.”     

  우정은 만지지는 못해도 뚜렷이 존재하는 안개와 같다. 옛날 작가들 중에는 친구와의 우정을 작품만큼이나 소중히 여겼다고 알려진 사람이 많다. 헤르만 헤세가 존경한 싱클레어와의 우정은 그의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을 친구 이름에서 따올 정도로 돈독했다고 한다. 생텍쥐페리는 나치 치하에서 괴로워하는 유태인 친구 레옹 베르트를 위해 ‘어린 왕자’를 써 헌사할 만큼 친구를 아꼈고, 작가 에밀 졸라와 화가 폴 세잔의 우정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아름다웠다. 폴 세잔이 법학과 미술을 놓고 진로를 고민할 때, 에밀 졸라의 우정 어린 편지가 그를 미술로 인도했다.      


  사람은 가도 빛났던 우정은 시공을 넘어 아름답고 녹슬지 않는다. 이따금 주변에서 친구와 우정을 허문 사람을 보면 가슴이 저린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불면 훅 날아갈 그런 일들로 소중한 우정을 깨는 일만은 서로가 피했으면 좋겠다. 친구도 부모처럼 무한정 곁에 두고 볼 수 없는 일이니,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은 죽기까지 위로하고 격려하며 이어갈 일이다.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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