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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관순 Oct 01. 2023

옹이가 있던 자리

18--06


  결혼을 앞둔 여자가 남자에게 한 가지 꼭 지켜줄 것이 있다고 했다. 결혼하면 아내를 이런 식으로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해 달라는 것이었다. ‘어이!’ ‘이봐!’ ‘여기!’ 같은 말은 입에 올리지 않기로. 맥없이 풀리는 긴장감에 남자가 피식 웃었지만 여자의 진지한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어떤 경우도 입에 올려서는 안 될 ‘막말’이라면서 남자에게 진심 어린 주문을 했다. 그동안 남자가 아내를 부르는 수많은 입을 보았는데, 가장 혐오스럽고 비인격적인 호칭이 그런 것들이라고 했다. 

  여자는 ‘넘어서는 안 될 부부관계의 마지노 선’이라며 처음부터 금을 긋고, 대신 부부로 사는 동안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다. ‘누구 엄마’ 같은 그런 호칭보다 이름을 부르고 가급적이면 서로 존칭을 사용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가장 가까운 남편으로부터 한 사람의 인격체로 존중받고 싶다는 것이 여자의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부부관계를 말할 수 있고 존중할 수 있겠느냐며 자존감 지닌 삶을 이야기했다. 언약한 대로 남자는 결혼 후 30년이 지날 때까지 그 약속을 잘 지켰다. 살다 보면 화가 치솟고 감정이 욱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남자는 말로 여자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시댁 어른들 앞에서도 ‘효은 씨’하며 매번 이름 뒤에 ‘씨’를 붙이고 존댓말을 썼다. 그의 세대에는 흔치 않은 남자의 말법이었다. 그러던 남자가 딱 한 번 실수를 범하고 만 건, IMF 환란 때 사업이 부도에 내몰리는 긴박한 상황에서였다. 이 고비만 넘기면 회생이 가능할 텐데, 그 천길 벼랑길에 서 있는데도 처가에서 끝까지 외면하고 보증을 회피하자 한 순간 감정이 폭발하면서 나온 소리였다. 저주하듯 거친 막말이 나오더니 아내를 밀쳐 넘어지게 했다.   

   한 순간 넋이 나갔던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 주어 담으려 했지만 이미 쏟은 물이었다. 그날이 하필 아내 생일과 겹쳐 있었다. 그 뒤로 잊었다가도 해마다 아내의 생일이 다가오면 생각나는 아픈 기억…. 목에 걸린 가시처럼 여자를 보는 남자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계절이 찾아오듯 때만 되면 회한으로 떠오르는 토막말. 딱지가 앉기도 전에 다시 생채기를 내는 일이 반복되곤 했다. 사업한다는 남자한테 딸을 주고 싶지 않다던 장인어른의 말도 떠올랐다.      

  말이 좋아 사업가지 호강은커녕 늘 넉넉하지 않은 살림으로 마음고생을 시켰고, 급전이 필요할 때면 처가로, 친구로, 돈 심부름도 다니게 했다. 생각은 심연에 가라앉은 부끄러움까지 휘저어 놓았다. 남편으로, 아버지로, 살뜰히 살펴 준 것도 없는데, 그럼에도 내색 없이 살림에 충실해준 아내가 늘 고맙고 미안했다. 알아서 잘 커주고 스스로 때를 맞추어 짝을 만나 제 앞길을 찾아간 두 아들 딸이 대견스럽고 고마웠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결혼 45주년이 되던 그해 봄. 부부는 딸이 결혼기념일이라고 마련해 준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여느 날처럼 집에 돌아와 잠을 잤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 날이 돼버렸다. 새벽녘, 잠을 자던 남자가 흉통을 호소하며 온몸이 비 오듯 땀에 젖을 때, 멀리서 119 구급차 소리가 들려왔다. 협심증을 앓아온 남자는 곧바로 응급실로 실려 갔지만 남자의 명줄은 거기까지였다.      


  황망한 가운데 삼일장이 치러졌다. 삼우제를 마친 아내가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책상 서랍 안쪽 밑에 깔려 있는 흰 봉투 하나를 찾았다. 일찍부터 죽음을 예견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곳에 아내 앞으로 미리 써둔 남편의 유서가 있었다. 남편의 체온이 실린 육필은 첫 문장을 참회로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사랑해 온 당신, 효은 씨.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합니다. 그것도 당신 생일에 홧김에 쏟아낸, 해서는 안 될 나의 막말에 진심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그때 그 말을 평생 후회하면서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두 번째 장에는 어려서 죽은 큰 아들의 회한이 오롯이 실려 있었다. 네 살배기 아들 준이를 폐렴으로 잃고 한강에 나가 가루를 뿌리던 날, 그 밤의 아픈 기억을 생생히 떠올리고 있었다.      


  “그 후로 한강 근처를 나가지 못하고 시린 가슴으로 몇 년을 방황할 때, 집안 형제들도 친구들도 모두가 잊으라고 했었지요. 자식은 가슴에 묻고 그만 현실로 돌아오라고 할 때, 당신만은 내게 채근하지 않았습니다. ‘잊으려고 애쓰지 말아요. 애쓴다고 잊힐 일도 아닌 데, 잊으라고 다그치는 건 가혹한 일이에요. 우리 가슴엔 온통 그 아이뿐인데 그것을 도려낸다고 한들 그다음 생기는 상처는, 텅 빈 공간은 어쩌려고요. 차라리 운명처럼 보듬고 살아요 우리.’ 그러니 우리 죽을 때까지 옹이처럼 가슴에 박아두고 잊지 말자고 했었지요. 상처는 보듬고 싸매야지 뜯어내면 덧나게 마련이고, 시련은 견뎌내는 것이라며 나를 다독일 때, 캄캄한 밤바다에서 한 점 빛으로 흔들리는 등대를 보는 심정이었어요.   

  당신 말이 백 번 맞아요. 시련은 운명이고, 운명은 떨치고 이겨낼 때 소망이 생긴다는 사실. 의사가 언제라도 돌발사태가 올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지만, 당신에게 말하지 못하고 때가 오면 이렇게 당신 옆에서 눈을 감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이젠 내가 당신께 말할 차례입니다. 당신이 언젠가 당신 생일을 맞을 때 나에게 물었지요. ‘그때 왜 그러셨어요?’라고. 지금도 내가 왜 그랬는지 나도 정말 모르겠어요. 이 말이 당신 물음에 답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끝이 정해진 책장(章)처럼 내 생의 길이는 여기까지인 듯해요. 이별의 아픔이 크겠지만 당신도 마지막 책장을 다 넘길 때까지 삶의 시선만은 꼿꼿하게 지켜주길 바랍니다. 용서해 줘 감사하고, 사랑해 줘 고맙고, 그래서 더더욱 미안하오….”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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