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러보기 인생 프로젝트
내가 미국에 와서 집을 사기로 마음먹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세입자의 서러움이었다. 가장 먼저 살았던 집의 집주인은 유태인이었는데, 인상이 좋은 편이었고, 고장 난 곳이 있거나 수리해야 할 일이 생기면 언제든 사람을 보내주었다. 가끔 며칠 늦기는 했지만 대체로 우리가 요청하는 것에 호응을 잘해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들의 학교가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집을 떠나야 했다. 계약 기간을 다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Security Deposit (세입자 보증금)은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
좀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찾아 도착한 동네는 뉴저지의 외진 동네였는데, 새로 만난 세입자는 남미 계통의 사람이었다.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칠레나 아르헨티나 같이 백인이 많은 나라의 출신인 것 같았다. 그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다혈질'이다. 그는 조금이라도 의견이 다르면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었다. 우리는 영어가 짧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싸우는 데에 매우 서툴렀다. 그는 종종 우리 집 근처를 방문해 집이 망가진 곳이나 우리가 훼손한 곳이 있는지, 수시로 확인을 했다. 그리곤 뭔가가 제 자리에 없거나 더러워져 있으면, 우리를 불러내거나 전화해서는 소리를 질러댔다. 그에게 집안의 수리나 개선을 요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는 되도록 그와 부닥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그는 그 동네에서 나름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웃들은 그를 'Cheap Person' (싸구려 인간)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입주하기 전에 살던 이전의 세입자는 계약 기간을 한 달만 더 연장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집을 비우라는 그의 성화에 못 이겨 집을 비우고 한 달간 호텔에서 생활해야 했다고 했다.
그런 생활을 약 1년간 하고 나니, 내 집이 갖고 싶어졌다. 그리고 어쨌든 주재 파견 기간도 끝났기 때문에 가족들이 거처할 곳이 반드시 필요했다. 내가 미국에 정착할 수 있을지, 그리고 한국으로 귀임을 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어떨지 몰랐지만, 일단 부동산 중개인을 통해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지 좋은 집인지 결정을 하는 건 아내의 몫이었다. 하지만 좋은 집들은 모두 우리가 생각하는 예산 밖이었다. 당시만 해도 환율이 1300원대였고, 지금에 비하면 싼 편이지만 그래도 너무 비쌌다. (오늘 기준 환율은 1460원인데, 이것 또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괜찮은 집 2군데를 발견했다. 한 곳은 뒤 뜰에 실개천이 흐르고, 좀 낡은 집이었는데 어느 정도 우리 예산에 맞는 집이었다. 대신 수리가 좀 필요한 상태였다. 다른 한 곳은 멀리서 봐도 아름다운 집이었고, 넓은 앞마당이 있는 집이었다. 대신 우리 예산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범위에 있었다. 그 집을 구경하러 갔더니 마음씨 좋아 보이는 주인 할머니가 천천히 집 구경을 하라고 하시고 본인은 개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가셨다. 햇빛이 정말 잘 드는 집이었다. 나와 아내는 그 집을 구경하고 나오면서 건너편 집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때 무언가를 직감했다. 아내도 그 집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우리는 그 집에 오퍼를 넣었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한참 낮은 가격을 제안했지만, 그다음 날 그 집주인은 우리에게 그 집을 팔겠다고 했다. 우리는 머나만 낯선 땅에 내 집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 기뻤다.
모기지 계약을 하고 변호사를 선임하고 클로징을 하기까지 약 2달 정도 더 걸린 것 같다. 그리고 이삿날이 되었다. 우리는 이미 미국에 와서 이사를 두 번 경험해 본 터라, 세 번째는 그리 부담스럽지만은 않았다. Mover 들에게 짐을 어떻게 옮겨야 하는지 잘 알려주고, 일이 끝나고 팁을 챙겨주었다. 이사를 하며 전의 집주인과 만나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 할머니는 이 집을 우리 가족에게 반드시 팔고 싶었노라고 말했다. 우리가 낮은 가격을 오퍼 했지만, 그 가격을 받아들이신 이유였다. 그리고 우리 집에 아이가 있는지 물었다. "우리 아이는 2학년이고 발달 장애가 있어요"라고 말하자 그 할머니는 눈물을 보이며 너무 잘한 결정이었노라고, 우리 아이는 이 동네에서 누구를 만나든 환영받고 먼저 인사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실제로 이사한 다음 주부터 한 가족씩 우리 주변에 사는 이웃들이 와서 인사하고 선물도 주고 정성스럽게 쓴 카드도 전해주고 다녀갔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며 만난 이웃들이 항상 안부를 물으며, 필요한 게 없는지 묻곤 한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 동네의 가장 큰 장점은 좋은 이웃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미국에서 집을 사고 가계약을 했을 때는 매일 아침 일어나서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를 되뇌었다. 내가 앞으로 미국에 남아서 살겠다는 건지, 그런 걸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그냥 계약을 해버린 것이었다. 인생에서 한 번쯤 해보는 무모한 선택. 바로 그것이었다. 가족을 두고 혼자 한국으로 귀임해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계속되는 취업 낙방에 넘어졌지만, 나를 항상 일으키는 것은 미국 집에 살면서 매일 나를 기다리는 아내와 아들이었다. 매일 밤 집에 돌아와서 나는 인터뷰를 봤다. 오늘 떨어지면, 내일 인터뷰를 잡았다. 그리고 계속 도전했다.
와도 너무 왔다. 미국에 집을 사는 건. 그리고 이곳에서 직업을 찾고 일을 하는 건. 한 번도 그려보지 않은 일이었지만, 살다 보니 현실이 되었다. 처음에는 흥분되고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계속 살다 보니 이제는 그러려니가 되는 것 같다. 아들이 마당을 가로질러 스쿨버스를 타고 등교를 하는 모습을 볼 때면, 여기가 미국이 맞긴 맞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앞으로의 일은 어떻게 될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아내와 아들이 있고, 집에 볕이 들고, 강아지가 하품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늘을 감사한다. 사람에게는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허락된 행복이 있다. 나는 딱 그만큼의 것들을 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