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다’는 상대적으로 정의되는 단어이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잘못된 문장이다. 즉 ‘저 바다는 우리 집 우물보다 넓다’라고 하면 바른 문장이 된다. 어떤 존재가 넓거나 크려면 ‘반드시’ 그보다 좁거나 작은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가 존재해야 존재할 수 있는 개념이다.
중요한 것은, 이는 비단 넓/좁은, 큰/작은, 많/적은과 같은 양과 수의 존재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있는’ 모든 것의 존재성에 해당된다.
상상해 보자. 이 우주 어딘가에 빨갛고 동그랗고 주먹만 한 크기의 과일 한 알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 나는 유일하게 그것을 보고 있다. 뭔가? 저걸 뭐라 할 것인가? 아니, 있기나 한 것인가?
있는 것(존재하는 것)은 그것 독립적으로는 있을 수 없다. 사과는 사과 아닌 것이 아닌 것 – 배가 아닌 것, 수박이 아닌 것, 고양이가 아닌 것, 구름이 아닌 것, 즉 사과는 사과 아닌 모든 것의 아닌 것이다. 사과는 사과 외 다른 것이 있어야 비로소 있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너나없이 상대를 기다리며, 기대는 ‘대대(待對)의 존재’인 것이다. 이런 세상 나 살고 있고,
원만구족(圓滿具足) - 조금도 모자람이나 부족함이 없고 치우침도 없는 상태, 다른 무언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가 존재의 원인이자 완전함 그 자체인 절대 무한의 상태.
상대가 존재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유한자 우리가 절대 무한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생각이라는 놈이 생각하는 방식도 다른 생각에 기대어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댈 다른 생각들을 무한 소급시킨다. 그렇다면 절대 무한에 다다를 수 있을까?
그래서 였을까? 큼, 많음, 넓음을 의미하는 한자 大(대), 多(다), 廣(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광)반야바라밀다심경'으로 번역하지 않고 굳이 산스크리트어 '마하'를 소리 나는 그대로 쓴 이유가. 우리의 비교 너머, 상대 너머, 경계 너머에 있는 크고 많고 넓고 뛰어남은 문명의 언어가 아닌 것이다.
반야심경의 원 제목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첫 단어, 마하(摩訶)란 그런 큼이다. 상대적으로 비교되어 부족함이 조금이라도 있는 큼이 아니라 비교대상이 없는 큼, 절대 큼. 원만구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