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득차 텅 빈, 렙소디

011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by 동사로 살어리랏다

관자재보살은 깨달음의 지혜를 깊고 깊이 행하면서, 나를 이루는 색수상행식 다섯 무더기는 모두 공임을 환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나 아닌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모든 것들이 만나 이루어진 것이기에 매 순간 나고(생生), 머물고(주住), 변화하고(이異), 소멸하는(멸滅) 생멸법(生滅法) 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나인 것도 아니요 나 아닌 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다.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 이와 같음을, 제법이 연기(緣起)요, 실상은 공성(空性) 임을 환하게 알게 되었다.’


공을 깨우쳐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일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우리의 일상적 논리의 틀은 선명하다. x는 있거나 없거나 둘 중의 하나일 뿐이지, 있으면서 동시에 없거나 또는 있는 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없는 것도 아닌 것일 수 없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인해 세계도 그렇게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외의 존재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안다. 우리는 그러한 사고방식에 속하는 선명함이 아니면 모두 '미친음악(렙소디Rhapsodie)'이라 취급하며 거부한다.


하얀 도화지 한 장을 멀리서 보자. 도화지와 함께 도화지 상하좌우로 다른 것이 함께 보인다. 그래서 도화지는 없지 않고 있게 된다. 즉 도화지는 '상대' - 여기서는 상하좌우의 배경 - 가 있어 있게 되는 것이다. 만일 도화지를 가지고 눈 바로 앞까지 가져와 시야를 가득 채우면, 이때는 상대가 없어지기에 도화지라고 알 수 없게 된다. 분명 같은 도화지이지만 경계와 분별이 사라진 도화지는 도화지로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가득 차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분별은 상대적 세계에서 '있거나 없다', '이것이거나 저것이다', '같지 않고 다르다'로 성립된다. 그러나 '공'은 허망분별의 망념과 상응하지 않고, 허망분별상을 여읜 것이다. 공은 마하, 즉 절대적인 것이다. 상대가 없는 절대 하나다. 모든 것이 하나로 있어 불가분(不可分)이기에 분별의 눈으로는 없는, 그야말로 텅 빈 공으로 보이지만, 무분별의 반야지혜로 보면 불가분이기에 하나로 '가득 차 비어' 있는 것이다.


해서, 우리는 관자재보살의 ‘나는 공(아공我空)이요, 나아가 모든 것이 공(법공法空)’이라는 실상-렙소디에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미 '공'이자 '진여(眞如)'이자 '하나'의 나툼임을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 그 무한의 전체를 자기 자신으로 자각하지 못하는 무명으로부터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독립된 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집착하는 아집(我執), 세상은 나와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집착하는 법집(法執)에 끄달리면서 고통에 휩싸이는 것이다.


관자재보살은 세상의 법은 연기와 공성이라, 모든 것이 변하고(제행무상諸行無常), 어떤 것도 자기가 아님(제법무아諸法無我)을 깨쳐 일체의 고통(일체개고一切皆苦)으로부터 벗어나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평온한 마음상태(열반적정涅槃寂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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