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든버러 이동하는 날 / 란이의 액땜
뽀가 쓰는 3월 9일 Diary
오늘은 아이슬란드를 떠나 에든버러로 가는 날.
버스를 타고, 에든버러로 가는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가는 중이다. 란이는 옆에서 곤히 자고 있다.
어젯밤부터 '오늘 진짜 떠나는 건가.', '마지막 밤이다.'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같은 풍경의 유럽을 보면 질린다고 하는데, 아이슬란드는 유럽과는 다르다.
이 곳을 여행하는 동안 아이슬란드의 자연은 매일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30분마다 계절이 바뀌는 창밖의 모습, 반짝거리는 얼음이 가득했던 해변, 검은 모래와 노을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절벽, 나를 우주의 먼지같이 느끼게 했던 굴포스의 웅장한 모습들... 대자연이 아니라 초자연을 보여주는 아이슬란드... 그 초자연의 모습을 볼 때마다 탄성이 절로 나오는 곳이다. '북유럽 쪽은 다 이런 느낌이려나...' 다른 북유럽 국가를 가지 못해서 확인할 길은 없지만, 분명 이만큼 멋있는 자연의 모습들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아서 나중에라도 한번 가보고 싶다.
로비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란이가 앞으로 여행할 영국 사진들을 찾아보면서 우리도 가서 이렇게 찍자고 하며 예쁜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를 보며 힘드냐며 걱정스레 물었다. 그냥 가만히 아무 생각 없이 있었는데 그게 힘들어 보였나 보다. 진짜 괜찮은데...
나도 감정이 풍부할 때가 있지만, 평소에는 좀 무덤덤한 편인 거 같다. 그 모습이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난 감정표현이 좀 없는 편인 거 같아."라는 말로 대신 알려주었다.
이 다이어리로 통해서 마음을 전하자면... 란이야, 난 그냥 음.. 가만히 있던 거였어. 그냥 무덤덤한 상태랄까... 그래서 가끔 내가 약하게 반응할 때가 있긴 한데, 그나마 너랑 있어서 풍부하게 반응하는 편이라는 걸 알아줘.
옆에서 자고 있는 란이가 깨면 이걸 보여줘야겠다. 상대의 기분이 신경 쓰이는 건 상대에 대한 배려심이 깊어서일 테니까.
드디어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서 점심을 먹으며, 스페인 이동 및 숙박을 계획했다. 벌써부터 한식이 너무 먹고 싶어 진 우리는 바르셀로나에서 지낼 한인민박을 열심히 찾았다. 여행 온 이후로 이렇게 열심히 검색한 건 오랜만인 것 같다.
조식이 한식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그 하나가 우리가 한인민박을 가는 첫 번째 이유였다. 그렇지만 한인민박에 떡볶이는 안 나오겠지... 떡볶이 같은 매운 음식이 너무 먹고 싶다. 지금 매운 참치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데 그 매운맛이 아니다. 한국 돌아가면 꼭 떡볶이부터 먹을 것이다.
비행시간이 다가와서 수화물을 부치러 갔다. 우린 둘 다 기내에 들고 갈 가방을 2개 가지고 있었는데, 직원이 기내 가방이 1개만 허용된다며, 나머지 가방은 더 비용을 내라고 해서 내 귀를 의심했다. 여행하다 보면 이런 예상치 못한 비용이 발생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그래도 이번에 알았으니, 다음엔 수화물을 추가하던지, 짐을 줄이던지 해야겠다.
기내에 들어갈 가방을 보안 검사할 때, 란이의 가방이 걸렸다. 세상을 다 잃은 표정 + 온갖 생각을 다하고 있는 표정이다. 근데 하필 직원들이 다른 사람들 짐 검사를 하는데 오래 걸려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오만가지 생각하고 있는 란이다.
결국 무사히 통과. 무사히 넘어갈 줄 알았다. 미술용 가위가 걸렸나 보다. 직원이 가위를 살펴보더니 란이에게 돌려주었다. 엄청 걱정했는데 잘 넘어가서 또 세상 행복하게 웃고 있다.
비행기를 타고 에든버러 도착. 여기도 영국이라 악명 높고, 까다로운 입국 심사를 앞두고 있다. 입국 심사관이 나에게 물었다.
“왜 왔어?”
-“여행이요.”
“왜 왔어?”
-“영국이 아름답고, 좋아서 여행 왔어요.”
“왜 왔어?”
-“??????”
입국 심사관이 계속 왜 왔냐고 묻는다. '여행하러 와서 여행하러 왔다고 했는데, 더 이상 뭐라고 해야 하지...?' 순간 머리가 하얘져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란이가 옆에서 "해리포터!!"라고 해서 잘 넘어갔다. 그리고 몇 가지 질문을 더 하고 난 후, 2주 후 파리로 가는 티켓을 보여주고 나서야 입국 도장을 찍어줬다. 정말 당황스럽고, 까다로운 입국 심사였다. 란이의 순발력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호텔을 찾아가는 길. 구글 지도에서 엄청 높은 계단을 올라가라고 했다. 그래서 무시했다...
다른 길로 돌아서 호텔을 찾아갔다. 오르막길을 돌고 돌아서 호텔이 있다는 위치에 도착했는데 한 건물이 마치 클럽처럼 엄청 시끄러웠다.
어?! 근데 다시 보니... 그곳이 우리가 예약한 호텔이다.
그 앞에 줄 서있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서있는 직원에게 호텔 입구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무전을 하면서 철창 있는 골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무섭다는 생각도 할 겨를이 없이, 그 뒷문에서 나온 직원을 따라 자연스레 들어갔다. 그렇게 우리는 호텔 뒷문으로 들어갔고, 리셉션에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지 물었다.
오늘 럭비 경기가 있었고, 그래서 파티를 하는 중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이겨서 신난 건지... 그날 밤, 늦게까지 시끄러웠다. 에든버러를 떠올렸을 때 아주 조용하고 작은 마을을 생각했는데, 이렇게 흥이 넘치는 곳이었다니... 생각과는 다른 이 곳의 첫인상에 좀 놀랍다.
짐을 풀고 재정비를 하고, 저녁을 사러 나가려는데 직원이 또 우리를 뒷길로 안내했다. 근데 바로 입구 계단에서 “악!!”
뒤를 돌아보니 란이가 미끄러져서 넘어져 있었다. 그래서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나왔다.
식당을 찾아 구글 지도를 켜고 갔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맞는데... 뭐지?’ 위치를 못 잡는 것 같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위에 다리가 보이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게 보였다. 첫날이고, 밤이라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 식당은 그 다리 위쪽에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복잡하고, 신기한 길은 또 처음이다. 우린 결국 찾지 못하고, 눈앞에 보이는 포장 전문 피자집에 들어갔다.
피자집에서 포장을 기다리고 있는데, 란이가 옆에서 액땜했다며 차라리 입구에서 넘어져서 다행이라고 한다. 이렇게 긍정적이라니.. 정말 못 말린다.
란이 쓰는 3월 9일 Diary
오후 3시
케플라비크 공항으로 가는 플라이 버스에 앉아있다.
벌써 107일의 여정 중 10일을 보내고, 우리는 아이슬란드를 떠난다. 다행히 사고는 없었지만 많은 일들이 가득했던 아이슬란드. 매일매일이 새로웠다. 속상한 일로 인해 섭섭한 일도 생겼지만, 그만큼 즐거운 일도 한가득 있었다.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음에는 겨울이 아닌 푸르른 여름에 다시 한번 오고 싶다.
내가 본 아이슬란드는 광활한 대지에 집과 사람은 굉장히 적어 천연 자연이 유지되는 나라였다. 자연이 훼손되지 않아 천혜의 아름다움을 몸소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굉장히 신기한 나라다.
도로는 차량이 적어 한국의 꽉 막힌 도로와 상반된 도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도심에 들어와도 신호등이 얼마 없는 도로들이 있기에 속이 뻥 뚫린 시원함을 느끼게 해 준다.
오기 전부터 가장 걱정되었던 부분 중 하나가 숙소였는데, 모든 숙소가 깨끗했다. 다음에 아이슬란드 숙소를 알아볼 때는 사진을 절대 믿지 말아야겠다. 왜냐, 사진보다 깔끔하고 좋으니까.
마지막으로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놀라웠던 부분은 날씨였다. 매일매일 버라이어티 한 날씨에 어느 장단을 맞춰야 되나 고민을 했다. 눈이 오다가도 해가 쨍쨍한 맑은 날씨로 변하고, 또 갑자기 비가 오기도 한다. 변화무쌍한 날씨들은 처음 겪을 땐 당황하기도 했지만, 나중엔 ‘우리가 나가기 시작하면 맑아질 거야’로 합리화하는 이유로 삼기도 했다.
아이슬란드 여행을 다니면서 서로에 대해 정말 잘 몰랐구나 새삼 실감했다. 5년을 함께한 우리지만,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하루 종일 붙어 있던 적은 처음이었기에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10일이었다. 우리는 생각보다 더 다른 사람이었다.
너무 다르다 보니 알게 모르게 나는 여러 부분에서 뽀에게 상처를 받고 있었고, 뽀도 아마 마찬가지지 않았을까 싶다. 가장 달랐던 부분은 대화였다.
나는 무언가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이야기를 하는 편이다. (당장 해결을 하지 못하면, 비슷한 부분에 문제가 또 생기기에 가능한 한 바로 이야기를 하는 편이다.) 뽀는 상대방을 배려한다고, 자기주장을 확실히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동행에게 나는 어느샌가 까다롭고, 나쁜 사람이 되어있었고, 그렇게 만들어지는 상황들이 나를 조금 힘들게 했다. (아이슬란드 동행과 트러블이 있었던 문제 속엔 돈, 음주, 대화 등 다양한 문제가 있었다.)
서로가 생각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달랐다. 이번 인연은 지속될 인연이 아니기에 잘 지내고 넘어갔으면 하는 것이 뽀였고, 그렇기에 확실하게 할 건 확실하게 하자는 것이 나였다.
누구나 생각하는 가치관과 성격이 다르기에 발생하는 의견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차이를 일찍 발견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앞으로 더 많은 일이 발생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 일들을 뽀와 함께 현명하게 대처해나가고 싶다.
자정 12시
넘어졌다.
멘붕이었다.
일부러 예쁘게 코트도 입고 나갔는데, 옷을 갈아입고, 예쁘게 단장을 하고 나가자마자 넘어졌다. "악!!" 하고 넘어졌더니 앞서 가던 뽀와 호텔 직원이 바로 뒤돌아봐서 괜찮냐며 달려와 줬다. 너무나 창피하지만 "하하하 It's okey!" 하며 웃어넘겼다. 비가 와서 바닥이 많이 젖어있는 데다 바닥이 상당히 지저분한 상태였기 때문에 내가 입고 나간 코트가 엉망이 되었었다. 내 코트를 보고 직원이 엄청난 양의 휴지 뭉치를 가져다줬지만 해결이 안 될 듯해서 뽀와 다시 방으로 올라왔다.
뽀는 걱정이 됐는지 옆에서 연신 "괜찮아?? 어떡해~!" 했고, 나는 머릿속으로 ‘이걸 어찌하면 좋지?’ 하고 생각했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샤워실에 코트를 던졌고 가져온 종이 세제와 함께 물속으로 흠뻑 담갔다.
'흠..^^ 오늘은 빨래를 해야겠군.' 하며 배고프니 밥을 먼저 사 오자는 생각에 다시 밖으로 나갔다.
우리의 호텔 입구 쪽엔 엄청난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그 길을 지나가기 좀 꺼림칙하여 뒷문으로 다녔었는데, 뒷문으로 가려면 직원이 도와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뒷문에서 나는 넘어졌다. 더 꺼림칙해졌다...)
근데 다시 나갔을 때는 직원이 너무 바쁜 상황이었고, 엘리베이터에서 이야기를 했던 외국인이 이쪽으로 나가라며 파티가 열리고 있는 쪽의 문을 열어줘서 그쪽으로 나가게 되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외국인이 우리에게 "곤니찌와"라고 해서, 우리는 한국인이고, 우리의 인사는 ‘안녕하세요.’라고 말해줬다.)
우리는 상당히 작은 애들인데, 거구의 외국인들이 술을 마시면서 파티를 하는 곳을 뚫고 가려니 조금 무서웠다. (아이슬란드 때부터 느끼는 건데 북유럽 쪽 사람들은 엄청 크다..! 바이킹의 후예들이라 그런가....) 그래도 착한 외국인들이 조심하라며 잡아주는 덕분에 무사히 나갈 수 있었고, 호텔을 나온 우리는 에든버러의 밤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원래는 편의점을 찾아가려 했는데 에든버러가 처음이라 구글 지도에 의지하며 걷고 있었다.
하.. 어딘지 모르겠다.
두 번째 멘붕이 시작됐다.
그때 구세주처럼 우리의 앞에 피자가게가 나타났고, 우리는 그곳에서 피자를 샀다. 피자를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오늘의 여러 가지 상황이 너무 웃겼다. 짐 검사에 걸리고, 넘어지고 등등 일어났던 많은 일이 참 웃겼다.
액땜을 하는 것이 아닐까 했다. 액땜을 제대로 했으니 우리의 여행이 더 즐거워질 것 같다.
영국에서의 14일이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