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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유선생 Jun 23. 2022

거짓말 병 치료법

따스한 봄의 햇살이 베란다 두터운 유리를 뚫고 거실로 쏟아져 들어와 춘곤증을 부추기고 있는 한가로운 토요일 오후였다.


“아빠, 나 연극 연습하러 가야 해.”


“ 피아노 치고 가야지.”


“나 늦으면 애들이 뭐라 한단 말이야.”


걸핏하면 자기 할 일 팽개치고 밖에 나가길 좋아하는 녀석이라, 오늘도 아이와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다가 4시까지 2시간 동안만 나갔다가 오기로 약속을 한 후 외출을 허락했다. 아이는 3시 55분까지 꼭 들어오겠다면서 시계를 허리춤에 차고는 정신없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요놈! 오늘도 집에 들어올 시간 잊어버릴게 틀림없지!’


나는 속으로 웃으면서 딸애의 뒷꼭지에 대고 소리쳤다.


“다은인 약속 잘 지키지?”


약속했던 4시가 넘었다. 난 녀석이 한두 시간은 늦겠지 생각했다.


“학교 갔다 올 때 길거리에서 노닥거리다 오지 말아라.”, “집에 오면 먼저 숙제 해 놓고 나서 놀아라.”


이런 저런 엄마의 당부에 대답만 해 놓고, 돌아서는 즉시 잊어버리고 또 놀다가 늦곤 하는 놈이라서 별로 화가 나지도 않았다.


정확히 4시 55분이 되자, 현관문이 열리면서 아이가 나타났다.


“다은이 지금 몇 시지?”


물었더니,


“4시 되려고 하는데”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야 이놈아 시계 똑바로 봐라. 아직 시계도 볼 줄 모르냐?”


하면서 벽시계를 가리키니,


“아빠 내 시계는 4신데.”


아이의 시계를 달라고 해서 들여다보니 집 시계보다 정확히 1시간이 늦었다.


“너 시계 돌려놨지?”


했더니 금방 아니라고 도리질이다.


회초리를 가져다가 혼을 내려다가 마음을 바꿨다. 수없이 반복되어온 아이의 거짓말 버릇을 고쳐보려고 바로 열흘 전에 매를 댄 일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아이는 가끔씩 거짓말을 해왔다.


TV를 보고 안 보았다고 잡아떼거나 피아노를 안 치고 쳤다고 하는 사소한 것으로부터 부모가 없는 틈을 타서 몰래 700 유료전화를 걸었고, 바지에 오줌을 싸고는 아니라고 우기기도 했다. 우리 부모는 그래도 아이가 귀여워서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말라고 주의만 주고 넘어갔다.


그러던 것이 열흘 전쯤 또 아이의 거짓말 버릇이 튀어나왔다.


그날은 아이가 4학년이 되어 처음 맞는 봄 소풍을 가는 날이었다. 김밥이니, 음료수, 과자, 등을 싸주면서 잘 놀다 오라고 기분 좋게 보냈다. 물론 소풍가기 보름쯤 전부터 소풍가서 장기자랑 시간에 발표할 춤 연습을 한다고 친구들과 마냥 몰려다닌 탓에 애 엄마랑 아웅다웅하면서 속 깨나 썩였지만...


늦어도 5시 정도면 집에 와야 할 아이가 6시가 넘어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날이 좀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전화 한 통 없어서 걱정이 되어, 아이를 찾으러 학교로 갔다.


저녁 먹을 시간이라 넓은 교정과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고, 놀이터 한 구석에 아이 셋이 놀고 있었다. 그 중에 한 놈이 우리 애였다.


“다은아, 어두워지는데 뭐하니? 빨리 집에 가야지.”


나는 하나도 화가 나지 않았다. 아이들이 놀다보면 해지는 걸 잊어버리고 노는 거야 보통일 아닌가?


그냥 얌전히 아빠 따라 집으로 갔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아빠, 오늘 시간이 없어서 보물찾기를 못했거든. 우리 선생님이 보물 숨겨놓으라고 해서 지금까지 여기 있었다.”


하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거였다.


“너 언제 소풍 갔다 왔는데, 여지껏 보물 숨기니?”


“에이! 애들이 많이 있는데 어떻게 보물을 숨겨?”


그래서 난 별 의심 없이 아이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 아이는 자전거 뒤에 앉아서 장기자랑에 나가 수첩을 상으로 받았다고 자랑까지 하는 거였다.


집에 들어가서 그 말을 전하자 아내는 대뜸 아이의 거짓말을 간파해냈다.


“바른 대로 말 못 해? 소풍 갔다 온 다음에 보물찾기하는 게 어디 있어! 선생님한테 전화 걸어 볼까?“


그날 난 진짜 마음을 독하게 먹고 회초리를 들었다.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 는 영국 속담을 상기하면서.....


아이도 많이 울었지만 나도 자꾸 눈물이 나왔다. 거짓말만 안 했으면 조금 주의를 듣고 끝났을 텐데, 왜 거짓말을 해서 매를 들게 한단 말인가?


그렇게 호되게 야단을 친 것이 겨우 열흘밖에 안 되었는데, 또 이런 일이 터진 것이다.


애 엄마 말마따나 이놈 입에서 거짓말은 ‘자동’으로 나오는 것 같다. 그 어린것이 어찌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둘러댈 수 있을까? 타일러도 안 되고, 매를 들어도 안 되니, 정말 어쩌면 좋단 말인가? 장난치느라고 슬슬 속여먹은 것 때문에 거짓말에 대한 선악 구분이 없어져 버린 게 아닐까? 큰애보다 막내가 더 귀엽다고 버릇없이 키운 건 아닐까? 이러다가 이 녀석이 진짜 나쁜 길로 빠지면 어쩌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방 한 구석에 아이를 꿇어 앉혀 놓고 나서, 아이를 어떻게 교육시켜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였다. 말로 타일러도 안 되고, 매를 대도 안 되고....


아이는 막내답게 유난히도 애교가 많고, 엄마 아빠를 잘 따랐다. 집에 있을 때 자주도 안아달라고 응석을 부리고, 엄마 아빠랑 장난치기를 좋아했다. 언니 옷을 물려 입느라 새 옷 한 번 입을 기회가 없어도 별 불평 안 하고, 유원지에 나들이 가서도 무얼 사달라고 조르지도 않는 착한 애였다.


이번에는 아이의 감정이 아니라, 이성에 호소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거짓말하는 것은 나쁜 짓이며, 거짓말하면 이렇게 혼난다고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할 경우 따르는 좋지 않은 결과에 대해 아이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판단해 보도록 유도하기로 작정했다.


종이와 연필을 준비하고 나서 아이를 불렀다. 먼저 집을 나가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는지 행적을 소상하게 이야기하게 한 다음, 자기가 부모를 속였거나 잘못했다고 생각되는 점들을 말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행동이나 거짓말로 인해서 자기에게 어떤 결과가 돌아왔는지, 남에게는 어떤 피해를 주었는지, 또한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되겠는지, 등 많은 것들을 물어 보았다. 아이는 다소 유치하긴 하지만, 놀랍도록 조리 있게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아이의 답변을 들으면서 나는 아빠로서, 어른으로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래. 우리 어른들이 종종 아이들에게 저지르는 잘못은 무슨 일이든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멋대로 판단하고, 너무 쉽게 교육시키려고 하는 거야.‘


우리 부모가 거짓말 병이라고 생각하는 아이의 거짓말 버릇은 실상은 우리 부모들이 만들어 준 게 아닌가? 놀고 싶어하는 아이에게 놀지 말고 들어오라고 하니까 약속을 안 지키는 거고, 약속을 안 지킨다고 혼내니 그걸 모면하려고 거짓말을 하는 것뿐이다.


이제부터는 아이가 거짓말을 할 때 무조건 “그건 나쁜 짓이야“하고 일방적으로 훈계하거나 매를 들기보다는,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에게 그런 거짓말을 하기까지의 과정과 원인, 그리고 그로부터 야기될 결과를 스스로 생각하여 이야기해 보도록 해야겠다. 그렇게 해서 아이의 거짓말 병이 치료되든 안 되든 그건 이제 우리의 능력을 벗어난 일이다.


아이에게 이제 그만 자라고 했더니, 침대에 들어가 잠시 눈물을 흘리더니 곧 잠이 든다. 내일 아침이 되면 아이는 언제 아빠 엄마한테 혼이 났었는가 싶게, 우리 집 막내둥이로서 온갖 애교를 다 떨 것이다. 봄에 돋아나는 새순처럼 보드라운 아이의 볼에 살짝 뽀뽀를 해준다.


오늘 한바탕 뿌린 우리 가족들의 눈물로 내일 대지는 더욱 푸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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