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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열 Feb 16. 2022

시인들이 죽은 사회

poet! oh my poet!

 세상은 급속도로 변하고 있고, 이에 따라 사람들도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한 번 사는 인생을 즐긴다는 YOLO족과 즐기기 위한 인간인 호모루덴스와 같은 신조어들이 나타날 정도로 사람들은 지금 당장을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문화를 빠르게 소비하고, 다시 생산하면서 삶을 즐기고 있는데, 나는 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줄임말이라고 생각한다. 버카충, 맥날, 빼박 캔트와 같은 줄임말들이 등장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 말들도 벌써 ‘아재’ 취급을 받을 정도로 새로운 말들이 계속 나타난다.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를 줄인 복세편살, TV 프로그램에 출현한 배우 송일국의 자녀들을 한 번에 부르는 대민만과 같이 단순히 말을 줄여서 사용하거나 ‘이거 진짜’라는 뜻으로 ㅇㄱㄹㅇ이라는 초성을 사용할 정도로 원형을 모르면 아예 이해할 수 없는 말들도 존재한다. 이렇게 십 대를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언어문화는 빠르고 현재에 충실한 사회적 분위기와 섞이며 기존과는 다른 문학을 만들어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시인 하상욱의 단편 시들이다. 몇 글자, 몇 줄 되지도 않는 하상욱의 시는 제목을 맨 밑에 두어 단순한 내용임에도 제목으로 반전을 이루어 공감을 가져왔다. 우리가 흔히 ‘시’라고 부르는 것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어떤 형식이나 단어의 선택으로부터 자유롭게 전하고자 하는 말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문학적으로 완성되고, 대중과는 멀게만 느껴지던 시인의 위치를 ‘시팔이’라는 단어를 통해 현실로 끌어내렸다. 어쩌면 천박하다고도 보일 수 있는 시팔이 하상욱의 성공은 꺼져가던 시의 불씨를 다시 살려냈고, 대중으로 하여금 시를 읽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의 부흥은 얼마 가지 못했고, 대중들의 관심 또한 금방 식어버렸다. 쉼 없이 바뀌고 있는 세상에서 시라는 장르는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수미상관 구조처럼 형식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시적 허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단어의 색다른 변신을 음미하고 있을 시간이 없을뿐더러 함축되어있는 의미를 찾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사람들은 화려하게 번쩍이면서 스스로 진행해나가는 화면에 열광하면서 본인들 스스로가 읽는 것은 멀리하게 되었다. 몇 글자 되지도 않는 단어들을 줄여나가는 마당에 보다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시는 당연히 읽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의 문학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서점에서도 종합 베스트셀러 20위에서는 시집을 찾아볼 수 없고, 시 분야의 베스트셀러에는 윤동주와 이상과 같은 과거의 인물이나 나태주, 김용택처럼 한 세대 전의 시인들만 존재할 뿐, 신인의 등장을 찾아볼 수 없다. 시라는 문학 생태계의 순환이 멈춘 것이다.


 단순히 시가 지루하고 느리다는 면에서 몰락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문화의 소비와 생산이 지속되는 사회에서 변화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감성에 대한 태도이다. ‘잉여’라는 말로 사람들은 여유를 잃었고, ‘중2병’이라는 단어로 감성적인 사람들은 무시받기 시작했다. 사랑의 순정파는 호구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우리의 열정은 촌스러운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 나타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쿨하다’라는 표현으로 사람들은 뜨거운 열정과 감정을 숨겨야 했고, ‘오글거리다’라는 말로 인해서 모든 낭만과 시는 죽어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하기 위해 글을 적어 내려가는 것도, 직접 말을 하는 것도, 모든 것이 오글거린다는 한 마디 말로 무시받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단순히 시와 문학계를 넘어서서 문화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 한국의 음반 시장을 점령한 것은 아이돌의 훅 송이었다. 이들은 기존의 한국 음반의 황금기라고 불리던 시대의, ‘시’를 방불케 하는 가사들로 이루어진 노래와는 다르게 단순하고 반복되는 훅으로 인기를 끌었다. 아무 의미 없는 단어들의 나열과 중독적인 멜로디에 대중들은 쉽게 빠져들었고, 최근까지도 아이돌의 노래는 음악 차트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K-POP이 빌보드 차트에까지 오르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추세는 단순히 한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세계는 점점 빠르게 소비하는 문화에 적응해가고 있는 것이다.


 시가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벗어나는 것은 이렇듯 바뀌어가는 세상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시가 갖고 있는 문학적 가치, 역사적 가치, 그리고 지금까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안겨준 감동과 설렘 등을 헤아린다면, 이렇게 시를 보내기에는 너무 아쉬움이 많다. 윤동주의 서시, 김동명의 내 마음은 호수요,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과 같은 작품들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수능 공부를 하던 나에게도 교과서 속의 한 줄 시는 가슴을 울리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시적 표현이나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더라도, 시는 문장 하나, 단어 하나로도 우리를 흔드는 것이다. 최근 네이버 뉴스에 감성적인 시로 많은 네티즌들의 찬사를 받은 ‘제페토’라는 무명의 시인의 작품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앞서 말했던, 소비하는 문화의 최전선을 달리고 있는 인터넷 세상 속에서 악플도 아니고 순수하고 온전한 시가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묵직하게 가슴을 치는 ‘시’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상욱의 시가 대중성을 인정받았다면, 제페토의 시는 진정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점점 더 각박해져 가는 대한민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시라고 생각한다. 화려한 수사가 붙거나, 유려한 문장이 아니더라도 읽는 사람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힘든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그런 시 말이다. 하상욱의 ‘시’처럼 가벼워지더라도, 혹은 시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더라도 제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당나라의 이태백이 쓰던 시를 지금도 쓰고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어진 세계화 사회에서 단순히 우리의 시에만 집중하는 것보다 다른 나라의 시들도 관심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헤르만 헤세의 기도, 사무엘 울만의 청춘과 같이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시들은 대부분 20~30년 전에 번역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들이다. 그러다 보니 오역되거나 원작의 의미를 살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를 다시 해석해내고, 원작을 오롯이 재연해내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또 우리가 관심 주지 않았던 외국의 수많은 유명 시들을 책장에서 꺼내보는 것 또한 시도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 곁에서 시가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지금 잠시 부는 무관심이라는 칼바람을 이겨내고 다시금 꽃을 피우는 시절이 올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언어영역의 문학 지문으로만 여기지 않고, 오글거린다며 손을 내젓지 않는 세대는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날이 오면, 더 이상 죽은 시인들의 사회가 아닌 시가 살아 숨 쉬는 사회가 되어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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