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속 만삭 일기 (2)
2주 전, 목요일 오후, 미국 산부인과, OB/GYN에서 전화가 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STAYHOME 집콕 라이프를 이어가고 있던 하루. 발신자 정보만 화면에 떠올랐을 뿐인데, 바짝 긴장되기 시작했다.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산부인과에서 전화 걸려올 일이 없지 않았던가? 전화를 받기 전부터 쓸데없이 걱정이 밀려들었다. 전에 했던 검사들에 이상소견이 있나. 내일 산부인과 예약이 잡혀있는데 예약을 미뤄야겠다는 걸까. 설마 코로나 시국에 닥터가 아픈가?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내일 올 때는
남편 동행하지 말고 너 혼자만 와야 돼
산부인과 방문 시 세부지침이 바뀌었다는 이야기였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보호자 없이 임산부 본인만 검사하러 병원에 들어올 수 있다는 이야기. 그러고 보니 한국의 대다수 산부인과들도 남편 출입금지 지침을 따르고 있다는 이야기를 언뜻 접했던 것 같다. 하루가 다르게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 미국의 코로나 확진 현황을 고려해보건대, 매사추세츠 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달라진 병원 방문 규정에 대해 통보받은 게 19일이었으니, 이미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 위기상황, National Emergency (13일 금요일)를 선포한 이후. 아아, 결국 여기도 이렇게 되고야 마는구나. 병원의 출입자를 최소화해서 안전을 확보하려는 지침이야 당연히 이해되지만, 출산을 몇 주 남겨주지 않은 이방인 임산부에게는 그저 모든 게 낯섦과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미운 변수였을 뿐.
30대 중반 다 큰 어른인데 병원 혼자 가기가 이렇게 긴장될 일인가. 임신 첫 진단 때부터 꾸준히 남편과 동행했던 병원. 단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늘 함께 시간을 맞춰 예약을 잡고 다녔던 곳이다 보니, 병원에 혼자 들어서는 걸음이 영 어색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막달까지 십여 차례 드나들었던 연륜(?) 덕분에 모든 시스템에 이미 착착 길들여져 있었다는 것. 꽤나 오랜 여정, 병원 스태프, 의료진들과 이미 얼굴이 익은 지 오래라 어렵거나 불편할 건 없었다. 게다가 남편은 병원에 '들어오지만' 못할 뿐, 날 고이 모셔다 주고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는 걸...
그래도 혹여나 '혼자 진료 간 탓에' 놓치는 건 없을지 바짝 얼음 상태였다. 출산일이 가까워 오니, 자연분만 과정이나 수술 과정에 대해 정밀하게 질문해야 할 것도 많았다. 한국어로도 아리송하기 그지없는 출산 과정에 대한 전문용어들을 메모해 가야만 했다. 출산과정과 관련된 지극히 예민한 용어들, 이를테면 Episiotomy, Enema, Pelvic size, Circumcision for my littl boy... 궁금한 거 다 풀고 와야 하는데 오늘 미션 참 어렵네.
병원은 예상대로 한산했고, 의료진 스태프 인력도 최소화한 듯했다. 굳이 편을 가르려는 건 아니지만, 아시안 임산부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던 반면 그 외의 임산부, 의료진들은 마스크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던 풍경. (다행히 그다음 번 방문 때는 의료진들도 모두 의료용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더랬다.) 기분 탓인가. 모두 남편들을 동행하지 못해서일지 드문드문 아쉬움 섞인 우울모드가 대기실을 가로지르는 듯했다. 얌전히 앉아 내 차례를 기다리고 늘 그래 왔듯, 소변검사 체중검사 혈압검사 혈액검사까지 차근차근 견뎌낸다. 태동검사도 오케이. 오늘도 어김없이 우렁차게 액티브한 모습을 보여주는 아기의 움직임에 감탄하며 내 담당의와의 빠른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궁금했던 걸 꼼꼼하게 영어 전문용어로 정리해 간 덕분에 꽤나 명쾌한 답변들을 얻어내서 만족. 친절한 의료진들 덕분에 크게 힘들 건 없었음에도, 오늘의 검사가 끝이 나니, 괜히 피곤하네?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스태프의 인사.
다음 주에도 남편 없이 혼자 와야 돼
이해해줘서 고마워
이러다가 출산할 때도
혼자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닐까?
정기 검진이야 그렇다 쳐도, 출산 병원까지 진통하며 혼자 가야 한다면? 그럼 진짜 어떡하지? 다 자란 어른이 병원 혼자 가기 무섭다고 징징거리는 건 철없는 소리 같지만, 이건 어마어마한 이벤트, '출산'이 아니던가. 그것도 내 나라 아닌 타국에서의 첫 경험. 때마침,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던 뉴욕에서는 "분만 시 남편 동행 금지" 조치가 시행된다는 뉴스가 떡... 하니 보도되고야 말았다. 매일매일 같은 걱정을 담은 질문을 쉴 새 없이 떠올렸다. 매사추세츠 주는 아직 괜찮은 거겠지? 시간문제 아니야? 곧 우리 주도 이렇게 지침이 바뀌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병원 지침이 바뀌기 전에 차라리 몇 주라도 더 빨리 출산하면 좋을 텐데.
27일 금요일 기준, 병원에 확실하게 문의해본 결과, 아직까지 내가 출산할 병원에서는 '분만 시에 한해' 보호자 1인까지는 동행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병원 입장 시, 철저히 사전 검사가 이뤄지기에 한번 입장하면 임산부 본인이 퇴원할 때까지 함께 자리하다가 같이 퇴원 절차 밟고 완전히 나가야 한다는 원칙. 중간에 들락날락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고작 이틀에서 사흘 입원이겠으나, 그 사이 틈이 나면 마트나 집에 잠깐씩은 드나들며 필요한 걸 공수할 계획이었는데 모든 게 불가능. 더 철저히 짐을 싸야겠구나. 더 단단히 별러야 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출산 가방은 어느 정도 싸 둔 상태였지만, 이젠 남편도 꼼꼼하게 '배우자 짐가방'을 싸야 할 차례. 병원에 다녀온 날 저녁 남편도 기내용 소형 캐리어를 꺼내고 2박 3일가량 출장 가듯이 짐을 챙겨 넣기 시작했다. 병원에 카페테리아는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좋아하는 간식들 비상식량도 최대한 '쟁여야'할 것만 같다 (그러길 잘했지, 출산 시 카페테리아 출입도 금지된 채 병실에 갇혀야 했으니까). 뭔가 비장해지는 기분? 허허. 코로나가 출산 앞둔 타국의 예비맘에게 미치는 영향이란.
걱정 마. 혹시 내가 병원에
들어갈 수 없게 되면
'온라인'으로 지켜봐 줄테니까
대학원 수업들이 모두 온라인 화상채팅 형식으로 바뀌면서 '신기하다'라고 감탄했더니, 그새 이어진 남편의 장난 섞인 망언. 화상채팅 앱 Zoom 프로그램이 워낙 잘 돼 있으니 소통하는 데 문제없겠다고. 웃자고 휙 던진 이야기인데, 왜 또 이게 '장난처럼' 들리지 않는 건지. 확진자가 2만 명 가까이에 다가가니, 이 장난스러운 농담마저 실화가 되는 게 아닐까 몸이 '움찔' 반응한다. 병원 내에서 아무리 청결관리를 한다고 해도 내부 스태프들의 감염이 번지면서 지극히 예민할 출산과정에 결국 '남편 동행 금지령'이 떨어지는 건 아닐지, 그렇다면 이건 정말 시간문제. 이 모든 게 실화가 된다면 온라인으로 남편이 그 모든 과정을 집에서 지켜봐야 하는 건 아닐까. 이러다간 아예 담당 의료진들마저 모두 온라인으로 연결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러다간 출산을 진짜 '온라인으로 해야 되겠어'.
어제 기준 (2020년 3월 31일 오후), 트럼프 대통령 왈, "앞으로 2주가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출산을 딱 열흘 남겨둔 시점.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울 장면 하나, 출산의 순간과 미국 코로나의 최정점이 맞물리는 기묘한 접점. 상황이 자꾸만 안 좋아지다 보니, 더 비극으로 치닫기 전에 얼른 조금이라도 일찍 아기를 마주했으면 좋겠다가도, "너는 얼마나 이 시국이 무서울까?" 버틸 만큼 버티다가 이 무서운 세상을 최대한 늦게 보고 싶으려나? 싶어서 조용히 마음을 내려놓게 되는 요즘의 하루하루.
그래. 지금 이 순간, 가장 무서울 사람은 나도, 남편도 아닌 그날의 '진짜 주인공'이겠지. 미국에서 전쟁같이 흘려보내고 있는 잔인한 봄날, 4월의 시작. 그럼에도 새 생명은 곧 태어날 것이고, 우리가 마주할 어느 오후의 햇살은 '반짝' 따사롭게 떨어질 테고. “출산도 온라인으로 하는 거 아냐?” 우리의 장난 섞인 농담도 언젠간 추억으로 희석되어 갈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