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속 만삭 일기 (1)
"미국 코로나, 이거 심상치 않네?" 불안 불안한 조짐을 느끼기 시작했던 게 3월 10일 무렵. 3월 둘째 주 대학원 봄방학을 보내고 유유자적 보내고 있던 어느 날의 저녁, 학교에서 긴급히 날아든 메일 한 통이 그 촉발 지점이었다. 학교 측이 보내온 메시지는 바로 이러했다. "봄방학을 이틀 더 연장하고, 그 나머지 학기의 강의는 모두 온라인 클래스로 전환하고자 한다...” 매사추세츠 찰리 베이커 주지사의 비상사태 선포가 이뤄진 직후였다.
와아아, 며칠 더
집에서 편히 쉴 수 있겠네!
처음엔 방학이 연장되었다는 말만 접하고서 이렇게만 생각했다. 만삭의 임산부라 등하교하는 게 점점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지사의 긴급상황 선포에 뒤이어 학교의 공식 이메일을 접한 이후, 자꾸만 쏟아져 나오는 미국의 코로나 보도는 점점 공포를 더했다. 한국이 한창 확진자가 늘면서 걱정이 눈덩이가 되던 상황을 지켜만봤던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여긴 모든 게 '남의 일이라는 듯' 평온하지 않았던가. 그럼 그렇지. 미국은 이제야 시작인 셈이었다.
'남의 나라 이야기 다루듯' 뜸하게 이어지던 뉴스들. 미국, 이곳에서도 이제야 코로나 바이러스에 관한 소식이 실시간 업데이트되기 시작했다. 빈번한 보도 이후, 가장 먼저 달라진 풍경 중 하나는 바로 마트 사재기 신드롬 (Hoarding). 아니 도대체, 왜 휴지를 그렇게들 사들이는 거야. 대형마트에서 텅텅 비어 가는 선반들 풍경만 봐도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특히 한 달 뒤 출산을 앞두고 있는 만삭의 유학생으로서는 더더욱이 불안불안.
어느 특정 주에서는 아기 기저귀와 분유까지 동이 난 지 오래라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비상상황만 아니라면, 아기가 태어난 이후 이런저런 샘플을 먼저 써보고 천천히 맞는 브랜드를 골라보려던 차였는데, 전략을 긴급히 변경해야만 했다. 혹시라도 아기가 모유를 잘 못 먹는 상황이 온다면 최소한의 아기 식량이 있어야 했고, 기저귀 대란을 피하기 위해 최소한의 수량은 비상으로 갖춰두어야 했기에. 미국맘들 모두 비슷한 심정이었을까. 분유와 기저귀 주문은 분 단위로 'out of stock'이 되기 일쑤였다. 겨우 비상 수량을 주문하고도 3,4주를 기다려서야 배송받을 수 있었으니... 유학생 예비맘의 마음은 그야말로 초 단위로 바싹바싹 타들어가고 있었다.
한 가지 감탄했던 건 학교 수업 형태에 대한 신속한 조치. 주지사의 비상상황 선포가 이뤄지자 마자, 내가 다니는 학교뿐 아니라, 보스턴을 비롯한 매사추세츠 전 학교가 모두 온라인 클래스로 수업 형태를 전환했다. 이 비상시국 속에서 만삭의 임산부는 이 '온라인 클래스'를 격하게 반겼다는 사실! 출산을 앞두고 있다 보니, 미국에서 아무도 코로나에 관심 가지고 있지 않았던 시절부터 '바이러스'가 늘 두려웠더랬다. 마스크를 아무도 쓰지 않는 상황 속에서 눈치 눈치 보며 전철과 커뮤터 레일을 타고 등하교하고 있던 나날들. 게다가 학교에는 각국에서 겨울방학을 보내고 다시 모여든 인터내셔널 학생들이 나를 포함해 꽤나 많았다.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학교를 매일 오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크나큰 위안이 됐다. 그야말로 '집콕'만 할 수 있는 상황이 그저 감사한 예비맘. 반면, 같이 수업을 듣던 동기들은 대부분 각자의 나라,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보스턴의 살인적인 물가를 감당하면서 미국에서 집콕 라이프를 이어갈 이유가 없었기에.
참 새로운 풍경들에 그저 하루하루가 신기한 10개월 차 임산부. 집에서 화상회의 형식으로 공부하고 일하는 게 일상이 된 3월의 나날들. 온라인 강의라고 하면, 지금까지는 강의자가 미리 동영상을 촬영해 업로드해주는 방식만 생각했었는데 실시간 모두의 얼굴을 마주하며 강의실 같은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는 게 신기했다. 재택근무하는 남편 역시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각에 화상회의로 업무를 시작. 집안 구석구석이 화상회의 애플리케이션 zoom 투성이가 되어버린 이 시점. 아직은 적응이 덜 돼 다들 호기심 가득한 표정. 재밌다고 느끼다가도 자꾸만 어색해져서 머쓱해지고, 요즘의 기술력에 감탄하다가도 이내 집중력이 흐트러져 따분해하다가도... 이래저래 감잡기 힘든 '리모트 클래스'! 출산 직전까지는 그래도 열심히 적응해보도록 하자.
학교 수업마저 집안에 콕 틀어박혀서 듣다 보니, 좀처럼 나갈 일이 없어진 일상. 막달에는 적당한 운동이 필수라는데 이러다가 정말 '확찐자'가 되어 출산할 때 고생하는 것은 아닐지, 그것 또한 걱정이 됐다. 답답할 땐 동네 한 바퀴라도 돌아보고자 남편 손을 잡고 잠깐의 산책을 시도해보기도 했다. 집콕 라이프를 이어가다 보니 체력이 더 떨어진 게 확연히 티가났다. 세 바퀴 정도 꽉 차게 돌고 나면 어찌나 숨이 차던지... 그래도 콧바람을 쐬면 답답한 #stayhome 라이프에 활기가 살포시 채워지는 느낌.
반면, 매주 1번씩 찾아야 하는 병원 정기검진은 바이러스 시국 속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미션 중 하나. 35주 이후부터는 일주일에 한 번씩 OB/GYN을 방문해야만 한다. 약 2주 전, 트럼프 대통령의 National Emergency 선포 이후, 3월 셋째 주부터는 배우자의 산부인과 동행마저 통제돼버리고야 말았다. 병원을 오가는 사람들의 출입을 최소화하고 소셜 디스턴싱를 유지해내고자 하는 데서 나온 조치이기에 이해 가능했으나, 출산을 앞둔 유학생 예비맘으로서는 매 순간 걱정을 더하는 요소였다. 뉴욕 주에서는 분만 시에도 배우자가 동행할 수 없다는 조치가 내려졌다고 해서 내가 사는 매사추세츠 주도 조만간 이 조치를 따라가면 어쩌나 조마조마했으니 말이다. 타국에서 출산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두려운데, 보호자를 한 명도 동행하지 못하고 타국의 분만실에 있어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서러울 것만 같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만삭의 임산부에게 미치는 영향... 정말이지 이 정도가 되리라곤 생각 못했지 않았던가.
다행히 아직까지 매사추세츠 주 병원에서는 분만 시, 배우자 1인 동행까지는 가능하다고 했다. 다만 임산부가 병원 입원 절차를 밟을 당시, 철저한 검사과정을 거친 뒤 병원에 들어올 수 있고, 임산부가 퇴원할 때 같이 나가야만 한다. "같이 들어오고 같이 나가야 한다"는 원칙을 재차 강조했다. 중간에 잠깐이라도 병원 문을 나설 수 없다는 이야기. 필요한 물건이 있더라도 중간중간 편의점이든, 마트든 외출하는 게 불가능해졌으니, 무엇보다 남편도 나도, 출산 가방을 더욱더 철저히 '잘' 싸야만 하는 숙제가 생겼다. 언제 입원을 하고 퇴원을 하게 될 지조차 모르는 상황이니,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 숨이 차는 느낌이었다.
남편, 우리 빨리 짐을 싸야 돼
남편은 병원 주차장에서 대기, 나 홀로 검사를 산부인과 정기검진을 마친 뒤 나오기를 2주째. 병원 검진을 마친 뒤 늘 그랬듯이 근처 한인마트에 들렀는데 이젠 이마저도 '전투' 태세. 출산일이 임박하니,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최대한의 조치를 취하는 건 필수였다. 마스크를 장착하고 손에 일회용 장갑을 단단히 끼고 조심조심 장보기 미션. 다행히 이제는 '사재기 신드롬'이 다소 진정된 것도 같은데 역시 여전히 휴지는 구하기 힘들고 손세정제 발견하기도 하늘의 별따기다. 절대 결코 마스크를 쓰지 않던 현지인들도 살금살금 마스크를 쓰고 있는 풍경들이 새삼 새롭다. 이제야 그들도 '심각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나 보구나... 싶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그만큼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는 반증이니 또 두렵다. 이 상황 도대체 언제까지 가야 하는 걸까.
운 좋게 휴대용 손 세정제(Sanitizer)를 딱 2개 득템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틈틈이 세정제를 뿌리고 자꾸만 한국과 미국 뉴스 사이트를 오가며 확진자 수의 증가폭을 확인했다. 사람 하나 보기 힘든 한산한 도로 풍경에 놀랐다가, 또다시 괜히 한번 손 세정제를 찍찍 뿌리는 게 새 일상으로 자리잡았다. 사회적 거리 유지하기가 전쟁 같은 시국, 중대 미션이 되고 나니, 누군가를 잠시 스치기만 해도 '큰 일 날 것 같아서' 불안 초조하기가 24시간이었다. 출산을 코앞에 둔 임산부가 아니었다면 덜 예민할 수 있었을까.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빨리 아기를 만나, 몇 개월이라도 좋으니 '집콕'만 했으면 좋겠다는 게 그날의 심경이었다. 의료진을 믿는 수밖에 없겠지만, 집을 벗어난 모든 외부시설, 병원 분만실, 1인실 병동마저 불안한 이 코로나 시국. 타국에서 예비맘으로 '코로나' 시국 버텨내기, 아니 살아남기... 이 서바이벌을 무사히 마무리지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