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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Jul 25. 2020

기념일 없는 잔혹한 커플

그 남자 그 여자의 간헐적 연애 (4화)


며칠 전 아들의 생후 100일이 지났다. 임신 35주까지만 해도 이토록 크게 번질 줄은 몰랐던 팬데믹 (pandemic). 아직 양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이 곱디고운 얼굴을 직접 보여드리지도 못한 슬픈 100일의 기억. 미국에서 가만가만히 '집콕'만을 추구하는 안전한 Stay Home 일상을 이어가고 있지만 타국에서라도 '백일'이니까 할 건 해야 한다. 남편과 아기, 그리고 나, 세 식구만의 조촐한 잔칫상을 벌였다. 우리 셋, 이 위험한 시국 속에서 무사하게 잘 버티며 지내왔다고, 아주 잠깐 바람 쐬러 외출하는 것도 힘겨운 나날들이지만 그래도 '백일'간 한국 아닌 타국에서 우리 참 애썼다고 토닥토닥. 수능도 백일 남겨두고 응원 파티를 하고, 풋풋한 커플도 사귄 지 백일이 되면 알콩달콩한 파티를 열지 않던가. 아기 출생 백일 차도 쉬이 지나칠 수 없는 상징적인 기준점이다. 정말 중요하다.


“백일 기념일, 어떻게 챙겨주지?”


아기의 잔칫상을 어떻게 차리면 좋을지 몸으로 마음으로 공을 들였다. 한 달 전부터 이런저런 아이템들을 구상하고 또 사들이고, 날짜가 꽤나 남았을 때부터 마치 내 앞에 당장이라도 꾸며야 할 백일상이 있는 것처럼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손님을 초대할 시국도 아니고, 시끌벅적하고 호화스럽게 사진을 찍을 것도 아닌데 자꾸만 자꾸만 '백일' 기념 준비에 애를 쓰고 있었다. 마음을 쓰다 보니, 돌잔치를 준비하는 것도 아닌데 “이거 이거 은근 '스트레스'처럼 다가오려고 하네?” 했을 정도. 미국에는 덩그러니 우리 셋밖에 없으니 타인의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다. 그냥 엄마 편하게 준비하면 되는데 나 왜 이렇게 '백일잔치'에 힘을 주려고 하는 걸까. 그러게나 말이다. 나 왜 이렇게 '백일'에 집착하고 있는 거지?


우리 부부는 백일이 없잖아?
그건 그렇지

그렇다. 짐작컨대, 내가 백일에 힘을 주려고 마음 들인 가장 큰 이유 중 하나. 우리 부부에게는 공식적인 '100일'기준점이 부재했다. 그 부재의 '한'을 아들 백일파티로 풀고자 했던 것이 아니냐는 어렴풋한 추측 하나만이 덩그러니 데구르르.


간헐적 연애, 약 2년 간의 롱디 끝에 부부가 된 우리, 대부분 커플들과는 달리, 서로 커플이 되자고 ‘작정한’ 시작 지점이 불분명하다. "우리, 오늘부터 사귀는 거다?"라고 명확한 언어로 선을 긋지 않더라도 대체로 '오늘부터 1일'…이라고 할 만한 지점이 존재하지 않던가? 누군가 '좋아한다'고 툭, 고백의 마음을 들이민 날짜가 존재한다든지, 마주 보고 앉아 상당히 오묘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썸'의 경계를 초월하는 분위기를 공유했던 날이 있다든지. 아이코, 이런. 나와 남편은 그 '결정적 순간'이 없네.


커플이 되자고
‘작정한’ 시작 지점이 불분명하다
우리 오늘부터 사귀는 거다?


간헐적 연애 관계에서 '결정적 시작 지점'은 어디?
"롱디 커플에게 기념일이란."


넌 올랜도에 있었고
난 춘천에 있었잖아


우리 부부는 연애마저 '간헐적 소통' 관계 속에서 시작했다. 설렘이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잔잔한 얼굴 근육마저 서로 확인하지 못했다. “우린 도대체 언제부터가 1일이야?” 그도 그럴 것이 한 사람은 올랜도에, 한 사람은 춘천에 수년째 생활터전을 마련해 살고 있던 터였으니, 일명 '썸'이라는 것도 비대면 접촉 방식으로 타기 시작했던 걸. 이를테면 국제 택배를 빈번히 주고받으며 서프라이즈를 하는 방식 등등. 얼굴을 매주 확인할 수 없는 곳에 나뉘어 살고 있었음에도 아리송한 감정은 무럭무럭 자랐고, '컨택트(Contact)'가 가능한 시점, ㅡ남편이 연말 잠깐의 시간을 내고 한국에 왔을 무렵ㅡ 우린 이미 '연인'이 되어 있었다. 대면 접촉을 하기 전에 이미 잠정적인 연애 상태였는데 그렇다고 비대면 상태에서 '오늘부터 1일'이었다고 동그라미를 칠 만한 날짜가 딱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존재한다고 해도 또 시차가 다르네. 미국 동부 기준으로 할 거야. 한국 기준으로 할 거야.


“넌 올랜도에 있었고”
“난 춘천에 있었잖아”


비대면 접촉 방식의 '썸'
이게 가능해?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 지금까지 서로를 알아온 세월만 해도 자그마치 23년. 어디까지가 동창으로서의 관계고, 어디서부터가 연인이었는지 명확하지 않은 관계.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한 수많은 커플들이 있겠으나, 우리처럼 상당한 '거리'와 '시차'를 두고 있던 특수상황에서 관계의 명명이 바뀐 커플은 많지 않을 거다. 분기별로나 겨우 한 번씩 서로를 볼까 말까 할 관계에서 오묘한 감정이 싹트고, 낮과 밤이 바뀐 시차 속에서 다른 색깔의 하늘을 경험하며 썸을 겪었으니, 몇 날 며칠 고민을 해봐도 우리는 어디가 그 '1일' 지점인지 합의하지 못하겠다. 소개팅을 해서 만났다면 처음 소개받은 날이 '1일'이 될 수도 있을 테고, 나 오늘부터 너를 ‘남자 친구’로 저장해두기로 작정했어... 류의 확정적인 단언을 한 기억도 없으니, "에라 모르겠다." 기념일 화제가 우리 둘 사이에 떠오를 때면 그냥 포기해버리고 마는 것. 우린 그렇게 '기념일 없는 부부’였다.


Face-to-Face, 대면이 가능했을 순간엔 우린 이미 잠정적 연애 관계
“우리 만난 지, 백일이야” 말할 수 없는 사이


롱디 커플에게 100일, 300일, 1주년,,, 기념일은 없었다. 혹여 '이거 마시면 우리 사귀는 거다' 식의 명확한 시작 지점이 있었다고 해도 100일을 챙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5월에 한국에서 데이트하면 8월이 되어서나 미국에서 데이트하는 '간헐적 연애' 커플이었으므로, 그저 100일 만에 얼굴 볼 수 있기만 해도 다행인 관계였던 걸. 날짜상 100일이 되었다고 해도 이역만리 거리감을 둔 남녀는 겨우 10일밖에 못 본 사이였을 수 있고, 1주년이 되었어도 사실상 직접 대면한 기간은 바득바득 날짜를 더해서 계산해봐도 고작 30일도 안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365일 중 10분의 1 수준. 고작 그거.


우리 커플 만난 지 1000일, 2000일, 앞으로도 이런 류의 기념일은 앞으로도 없을 테지. 열이면 열 커플들에게 가장 기초적인 기념일이 될 만한 '백일'조차 없었는데, 그 이상의 지점들도 모두 ‘와르르’ 의미 없다. 그나마 피. 할. 수. 없. 이. 또렷한 결혼기념일이라도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겠다. 내뿜지 않아 왔던 '백일' 챙기기에 대한 욕망이 내 안에 켜켜이 쌓여있다가 불쑥 화산이 되어버리기라도 했던 걸까. 묵혀져 있던 '한'이 용암 되어 분화구를 뚫어버리듯, 나는 그렇게 신나게 아들의 백일 준비, 백일잔치, 백일 후유증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착착 몰입했다.


이젠 됐어.
우리도 '백일'이라는 걸 치러냈어!


뭐가 되었든, 우리 결국 그 어떤 ‘백일’을 치러냈어!


내가 너희 집에
강원도 옥수수를 보낸 게 시작이야?
네가 나한테
올랜도 디즈니를 보낸 게 시작이야?



연애 기념일은 '부재'하는 것으로 땅땅 결론을 내렸음에도, 그래도 괜히 틈날 때마다 남편을 붙잡고 우리 간헐적 연애의 '시작 지점'을 자꾸만 묻는다. “그래서 우린 언제부터가 시작이지. 자, 차근차근 생각해봐. 내가 너희 집 (현재의 시댁)에 강원도 옥수수를 보낸 게 시작이야? 네가 나한테 올랜도 디즈니 기념품을 보낸 게 시작이야?” 만나지 않고 썸을 타다 보니 부부 둘 다 각자 살고 있는 지역의 특산품으로 각자 매력을 호소하기 바빴던 시절. 비대면 접촉, 간헐적 연애의 출발은 어디에서부터였을까. 남편, 이번 주말에 우리 딱 한 번만 더 생각해보지 않을래.  


2017년 홍천 데이트
2018년 LA 베니스 비치 데이트
2018년 여름, 샌프란시스코 데이트. 같이 커피 한 잔 마시려면 상당한 비용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 잔혹한 장거리 연애
우리 커플 같이 봤던 첫 영화 <라라랜드>. 이참에, 첫 영화 데이트를 ‘오늘부터 1일’이었던 걸로 정해 보는 건 어때?
결혼 500일 기념으로 찍어둔 가족 사진. 우리 사귄 지 며칠은 몰라도 결혼 지점은 분명해서 참 다행이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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