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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Jul 11. 2020

장거리 연애, 택배의 기술

그 남자 그 여자의 간헐적 연애 (2화)


친정으로부터 택배가 도착했다. 임신 출산 과정을 거치면서 국제택배 받을 일이  부단히도 많아졌다. 미국에서도 아마존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이런저런 아이템을 탐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국민육아템'들이 못내 아쉬운 . “한국에 있었다면 이것도 사고 저것도 샀을 텐데아쉬운 소리가 나오기 무섭게 엄마는 미국 육아에 지친 딸을 위해 국제택배 발송 준비 모드에 돌입. 사람 어깨너비만  상자, 눈에 띄게 아주 무거운 물건이 포함되어 있지 않더라도 웬만한 택배비용은 10  안팎. '어라? 이건  무겁네?' 싶은 상자라면 20  가까이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EMS택배비용. 가격이 만만치 않은데도 엄마는 자꾸만 이역만리 미국에까지 택배를 보내는  혈안이 되어가는 . "엄마 진짜 괜찮다니까요"...라고 외치면서 내심 택배가 도착하는 모습을 포착하면  그리도 완벽하게 힐링이 되던지.


택배 왔다! 미국에서 반가운 한국 소포 상자를 마주한다는 것.


간헐적 연애,
너와 나의 연결고리는?


한 사람과 또 다른 한 사람을 연결해주는 결정적 매개체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거리'와 '시차'에 의해 너와 내가 아득하게 동떨어져 있는 상황 속에서도 '친밀함'을 덧대고 허기를 메울 수 있는 방법.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옛 어른들의 명언을 현명하게 '극뽁'해낼 수 있는 절체절명의 힘. 고작 서너 달 단위로 한 번씩 만나는 게 전부인 간헐적 연애 잘하는 애들에게 OOOO은/는 필수 중 필수였다. 까까오톡? 영상통화? 현대 신박한 정보통신기술들에 기반한 시스템을 다 제치고 이 역시 결국에는 '국제 택배'.


롱디 (Long Distance Relationship). 이름 그대로  멀리도 떨어져 있어 고단하고 험난한 '장거리 연애',  주에  , 격주에  번꼴도 아닌, 계절에 한번 볼까 말까   '말도  되는 빈도' 간헐적 데이트 상황을 그나마 이겨내도록 이끌어  ? 바로 국제 택배였다. 마음  가득 꾹꾹 눌러 담아 전해지는 갈색 상자,  영특한 힘에 공을 돌리고 싶다. 썸의 영역과 본격 연애기의 경계를 오묘하게 넘나들면서 서로  마음을 확인할 때가 특히 그러했더랬다. 멀리 떨어져서 자주 보지도 못하는데 스마트폰 메신저로  가득 활자만 주고받기에 의존했다면 쉽게 지치고 공허해졌을  분명하다. 상대방과 내가 무슨 마음을 주고받고 있는 건지  어떤 개념이 잡히지 않아 ... 해지고 때론 짜증 나고 고구마 잔뜩 먹든  속이 답답했을 테니.


너와 나의 거리. 간헐적 연애 관계의 결정적 한계


 박수현 아나운서
미국에서 또 택배 왔어요!

. . . . 손과 손이 맞닿을  없는 소통의 관계에서는 '오감각' 만족시켜줄  다른 보조수단이 필요했던  같다. 그게 바로 국제 택배, 너의 역할. 반가운 도착 공지가  귓가를 간질일 때면 (청각) 생방송이 끝나자마자 사무실  자리로 총총 달려가 책상   가득 자리를 차지한 택배에   사로잡히기 (시각). 멀리서  많은 여정을 거쳐 도착하느라 고생 많이  상자,  거리에 얹힌 '꼬릿 꼬릿' 상자 냄새조차 반가워해주기 (후각). 테이프로 안전하게 꽁꽁 묶여 배달된 국제택배 상자를 있는 힘껏 '언박싱'. 손에 닿는 까슬까슬한 상자의 질감에 설레 보기 (촉각). 국제택배로 선물 받고 잠시 '달콤' 기분을 선물 받았으니 (미각) 이렇게 오감 만족. 떨어져서 지내도, 간헐적으로 데이트해도, 서로의 감각기관은 이렇게 맞닿아있었던 . 다름 아닌 택배로 말이다. (EMS 감사합니다.)


비행기 타고 훨훨 날아가서 전해주렴. 택배에 실린 내 마음들.


연애를 '택배'로 했네


영상통화며 메시지며 힘들이지 않고 돈들이지 않고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참 많은데 굳이 불편함을 배로 감수해가며 우체국행을 즐겼던 이유. 어쩌면 이게 간헐적 연애자들만이 즐길 수 있는 하나의 의식, '리추얼 (Ritual)'이 아니었을까. 주말에 만나 함께 삼청동 북카페에 가지 못하는 대신 같이 읽고 싶은 책을 두 권 사서 한 권은 내가 겟, 또 다른 한 권은 택배 상자 행. 요즘 핫하다는 디저트를 같이 맛보지 못하는 대신 '내가 좋아하는 디저트, 너도 좋아하겠지 싶어서 골라봤어...' 메시지와 함께 택배로 먹여보기. 늦은 밤 차 안에서 같이 음악을 듣지 못하는 대신 요즘 꽂힌 드라마 OST를 CD로 구매해서 그 음악 실물로 공유하기. 남들이 다 하는 '데이트'는 못하는데 남들이 흔히 하지 않는 리추얼을 어느 순간 꾸준히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네. 평범한 연인 사이, 굳이 택배를 꽁꽁 포장해가며 마음을 전달할 일이 얼마나 될까. 아주 특별한 서프라이즈가 아니라면!

소소한 디저트라도 같이 나누고 싶은 마음. 만나서 같이 먹진 못해도 다른 공간에서 같은 무언가를 손에 쥐고픈 마음.


그때 왜 똑같은 책을
두 권이나 샀지?
그냥 인터넷으로 노래 들어보라고 할 걸.
왜 '음반'을 사서 보냈지?


현실적으로는 '낭비' 되는 요소가 간헐적 연애를 지탱해주는 '투자'였던 . 알랭  보통의 소설을 쥐고 지구 반대편에서 반가워하고 있을 상대방의 모습을 상상하며 같은 소설을 닮은 호흡으로 읽어가기. 서로 다른 공간에 자리하고 있지만 닮은 커피를 챙겨마시며 똑같은 표지를  모습을 공유하고 싶었던  거다. (덕분에 결혼  우리 집엔 같은 책이  권이나 꽂혀 있는 풍경을 종종 마주한다.)  '배보다 배꼽이  비쌌던' 순간들을 감수하며 예쁘고 아기자기한 디저트, 좋아하는 한국 과자 챙겨 보내기. 남녀가 연애를 하고 있다는  같이 ''생활을 공유한다는 것과도 맥락을 같이할 텐데 자주 그러지 못하는 아쉬움을 소소하게 무언가를 냠냠거리면서라도 채워보고 싶었던  거다. (마음은 정성 가득 예쁜데 택배비가 과자값보다  나갈   억울했지만.)

때론 별것 아닌 소소한 무언가를 고이고이 담아 공유하고 싶었던 날들. 값비싼 국제택배 비용에 배보다 배꼽이 더 컸던 건 굳이 안 비밀.


스트리밍 서비스로 충분히 들을  있는 음악을 굳이 손에 잡히는 CD 선물한 . 우리가 '롱디'라서  특별하지 않았을까.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인연, 눈으로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는 빈도가 그야말로 '간헐적'이었기에 서로의 마음을 전달하는 방법만큼은 눈에 확연히 보이도록 (마음이) 전략을 취했던 거라고 어림짐작해본다. 까까오톡 메시지는 실시간 휘발돼 버리지만 '' 하고 묵직하게 도착하는 택배 상자는  '실물' 잔상이  오래도록 간다. 조금은 빛바랜 듯한 옛날 연애방식이려나. 조금  있어 보이게 '아날로그' 느낌을 덧댄 글로벌 연애라고 해두자. (피처링은 국제택배가.)


당시 올랜도에 살던 남편이 자주 보내줬던 디즈니 아이템들.
디즈니 천국 올랜도발 택배에 신나서 업텐션


서로의 모습을 오감 다해 확인하지 못하는 대신 열일했던 '국제 택배'. 이래저래 시각과 청각, 후각, 기타 등등을 채워주느라  고생 많았던 기특한 녀석. 로켓 배송과 새벽 배송이 너무도 흔한  시대에 ' 사람' 고이 챙겨 보내는 택배의 힘은 이래저래 공허해지기 쉬운 '간헐적 연애' 취약점을 은근슬쩍 가리고도 남을 만큼 대단한 것이어서... 공로 인정. 땅땅땅. 지금은 같은 집에서 서로의 택배를 실시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때때로  순간들이 그리워져서 두리번두리번 생각해두기. 혹시나 배달 가는 도중 망가질까  조마조마해하며 겹겹이 보충재를 둘러감 싸고 택배 싸며 애쓰던 순간들. 마치 데이트하러 나가는 것만큼 경쾌했던 우체국으로의 발길들.

당시 좋아했던 드라마 OST, 택배로 공유하기
함께 나란히 앉아 이어폰을 끼고 듣진 못해도 같은 음악을 재생하면서 닮은 감성을 저장해 두고 싶었던 순간들.


(남편)
여보 앞으로 택배 왔네?
(나)
요즘 주문한 것 없는데, 뭐지?


역시 간헐적 연애 택배 데이트의 종결자들. 며칠 전의 일이다. 아마존 장바구니에 읽고 싶어서 고이 담아둔   권을 그새 남편이 알고 휘리릭 주문해준 . , 이런 진짜 비슷했다. 그때 택배로 마음을 주고받던 시절과 모처럼 기분이 닮아서 '' 미소를 떠올린다. 남편이 직접 서툴게 포장한  아니라 매끈한 대형 기업의 포장이라는  빼곤 거의 진짜 많이 닮았어! 이북리더기가 있긴 하지만 남편이 직접 쥐어주는 택배와 손에 쥐어지는 책의 촉감이 마음에 든다. 읽고 싶은 책을  쥐어주는  센스가 실물로 와닿는 느낌이라서 더더욱이.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옛말을 센스 있게 뒤틀어 보기는 필수. 그러니 눈에 가까이 닿을  있는 대체제 찾기.  닿는 거리에 상대방 공간에 택배 놓아드리기. 그렇게 마음 바짝 다가서기.


별다방 마니아인 나에게 그 어느 책보다도 반가운 택배. 같은 공간에 머물고 있지만 이런 서프라이즈 책 배달도 여전히 좋아서
반가운 택배 상자로 서로의 마음 열어보기
선물 받은 후 ‘너의 택배로 인해 참 행복했도다’ 인증샷은 필수
계절마다 보는 커플, 간헐적 연애의 기술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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