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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Oct 15. 2021

18점짜리 ‘육아력’

부캐는 미국 엄마 (21화)

체력, 인내력, 지구력.

세상에는 꽤나 다양한 종류의 ‘력’들이 있다. 예로부터 ‘체력은 국력’이라고도 하고 드라마 <미생>에서는 의미심장한 조언이 등장한다. 만만치 않은 ‘힘듦’의 고개를 넘고 있는 주인공에게 ‘체력을 기르라’고. 흠… 어디 보자. 인내력이 강한 편이라는 소리를 초등학교 생활기록부로부터 접했다. 100미터 달리기 22초, 정말이지 못 뛰지만, 장거리 달리기에선 그럭저럭 잘 버티는 스스로에게 ‘나 지구력은 강한가봐’ 속삭이곤 했다. 그리고 지금, 서른다섯의 삶을 살고 있는 2021년의 가을날, 나는 ‘육아력’을 떠올린다.


코로나 초절정 미국에서 출산하다 (1)

코로나 초절정 미국에서 출산하다 (2)


며칠 전, 아기를 간신히 재우고 침대에 쓰러져 기댄 어느 날 저녁이었다. 잠깐만 누워있어야지 심정이었는데 녹아버린 인절미처럼 몸이 매트리스에 찰싹 붙어 옴짝달싹을 못하겠는 거다. 아이폰과 아이패드 충전기를 부엌에 두고 왔는데 그걸 가지러 내려갈 힘이 없었다. 둘 다 전원이 꺼져버렸는데도 차라리 충전을 포기하고야 말았다.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고픈 남편도 하필 늦게 퇴근하는 날, 난 그렇게 그 누구도 시키지 않은 강제 디지털 디톡스를 하며 잠들어야 했다. 아기랑 전쟁을 치른 하루의 끝.


그런 경험 혹시 해본 적 있는가. 좀 더 오래 먹을 요량으로 인절미를 겹겹이 쌓아 얼려뒀다가 몇 점 떼어내서 전자레인지에 돌렸는데 한 40초 정도만 해동하면 딱 좋았을 것을 넋 놓고 2분 돌려버린 거다. 그릇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인절미가 보기 싫게 흐물흐물 덕지덕지 녹아내려 전자레인지 회전판 바닥까지 들러붙는다. 딱 그 모양새다. 육아하고 지친 내 육체는 ‘녹아버린 인절미’랑 흡사 닮았다. 똑 닮았다.


#한살아기 #가을육아 #체력탈탈


‘육아력’이 제법 … 약하다고 생각한다. ‘제법’이라는 부사는 긍정성을 품은 서술어 앞에 반전의 뉘앙스를 담고자 하는 의도로 놓여야 정상일 텐데 (예. 너 제법 잘하네? 예상외로 제법인데?) 강하고 세지 못하는 내 단점을 노출하는 데 써봤다. 실은 ‘육아력이 보기보다 제법 세다’라는 정반대의 말을 하고 싶었던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일지도.


녹아버린 인절미랑 흡사 닮았다
아니, 똑 닮았다



결혼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도대체 왜 사람들이 그렇게 육아가 힘들다고 호소하는 줄을. 워킹맘도 힘들다고 하고 출근하지 않는 (지금의 나와 같은) 전업맘도 힘들다고들 하고. 주변 지인들로부터, 진행하고 있던 라디오 프로그램 청취자들로부터 열이면 아홉, 지친 목소리를 접하다 보니 “아, 그렇구나. 많이 힘든 건가 보다.” 끄덕끄덕 표면적 공감을 하기 바빴다. 힘들다는 목소리가 진심이라는 것은 오해하지 않았지만 정확히 왜, 어떤 부분이 힘들다고 하는 건지 알아차리진 못했다. 소셜미디어만 봐도 방글방글 인형 같이 웃는 사진이 한가득인데 도대체 왜? 삐치고 울상이 되어버린 아기 사진만 봐도 귀여워 죽겠는데 도대체 정확히 언제, 무엇이, 어떻게 힘들다는 걸까.


다들 예쁜 모습만 올리는데 뭐가 정확히 어떻게 힘들다는 거지?


한 살 아기는 삐죽거리지 않는다. 삐친 표정을 가만히 앉아 새초롬히 짓고 있지 않는다. 그럴 리 없지. 아기도 컨디션이 꼬이고, 나도 바이오리듬이 하필 엉망이었던 날, 아기도 울고 나도 울었다. 아기는 이런 심정인 것 같아 보였다.

‘나 하루 종일 집에 있으니까 심심하고 놀고 싶고 근데 맘처럼 안되고 엄마란 사람은 재미없고 여기에다가 배도 고픈 것 같고, 엄마가 주는 간식은 퉤퉤 맛이 없고, 이게 아니잖아!!!!!’

발 버둥버둥 난리가 난 거다. 싫증 나고 짜증 나니까 손발에 닿는 건 다 던져버린다. 안아달래서 번쩍 들면 내려놓으래고, 둥게 둥게 좀 하려 하면 날 제발 땅바닥에 내려놓으라고 끄아앙. (적기만 해도 숨이 차네.)


육아의 날들에 절실히 커피가 필요한 순간


남편은 일 때문에 하루 종일 자리를 비우고 소위 독박 육아를 감당해야 했던 날의 풍경. “얘, 슬픈 자 둥게 둥게 놀게 놔둬. 네가 일일이 쫓아다니니까 힘들지.”라고 툭 두 문장 던지셨던 시어머니. 육아의 하루가 어떻게 흐르는지 완전히 잊으셔서 하실 수 있는 쉬운 말이 아닐까. “아니요, 어머니. 가만히 놀게 놔둘 수가 없다니까요. 창틀에, 식탁에 계속 올라가는데 어찌 세월 좋게 가만히 보고만 있나요?” 반복해 말씀드려도 흡수되지 않는 나의 메아리여. “다치면서 큰 거야. 네가 너무 예민해서 그래.”


시어머니 쿨함 주의보


차라리 스스로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내 육아력이 약해서 그래.” 얼마 전 가족사진 촬영을 하는데 내가 아기를 안은 사진은 연출이 불가능했다는 슬픈 이야기. 스냅 작가 님께는 살짝 겸연쩍은 미소를, 아기에게는 미안한 표정을 떠올려야 했던 순간이었다. 방송하던 시절에 비하면야 몸에 살이 많이 붙었지만 하체보다 상체가 약한 내가 아기를 안으면 실제로 아기가 많이 불편해하는 편. 아기가 7킬로 접어들기 전까지는 감당 가능했는데 12킬로 남짓에 다가서는 요즘은 진짜 무겁다. 나도 (안아보자고) 버둥버둥, 아기도 (그만하라고) 버둥버둥. 아…’ 육아력’이 약해 슬픈 1인 여기요.


내 ‘육아력’에 점수를 매기자면 18점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지금 딱 18개월 아기, 생후 1개월부터 1점씩 더한 결과다. 그래도 일 년 반을 육아했으니 “내 육아력은 빵점짜리야…”라고 통곡하진 못하겠다. 잘했든 못했든 나는 최선을 다했고 (그것도 미국에서 석사 유학하면서!) 적어도 작년의 어리바리 맘에선 아주 쪼끔이라도 발전했을 테니 한 달에 1점쯤은 줄 만하지 않겠나. (제발 그렇다고 해줘요.)


우리 엄마 육아력은 몇 점?


내 육아력에 점수를 매기자면
18점 정도가 아닐까


적고 보니 그런 생각부터 든다. 만점 받으려면 얼마나 더 있어야 할까. 18개월 (만 1세) 18점이니, 85점에만 진입하려 해도 85개월 (만 7세)가 돼야 엄마도 느는 셈이다. 딱 초등학교 취학 연령. 그럼 100점은 생후 100개월, 그러니까 만 8세. 입학하고서 한참 1년쯤 적응 마치고 찾아올 수 있는 거겠다. 이런 계산 터무니 없지만 육아력 약한 내겐 절실한 비례식이다. 이렇게라도 희망을 품어보는 거다. 그때쯤에는 100점 가까이 갈 수 있을 거라고.


아니, 꼭 만점에 다가서지 않아도 좋다. 운전면허 필기시험 통과 (1종 기준) 최저점 70점만 되어도 좋겠다. 어쨌든 그 선 넘으면 ‘당신은 운전할 기본 조건을 갖췄습니다.’ 인정해주는 것처럼, ‘당신의 육아력은 기본은 된다는 겁니다.’ 안심시켜주는 것 같을 테니까. 그러려면 어쨌든 약 5년쯤은 더 열심히 키워봐야 한다는 거죠?


5년 뒤 올려다 본 가을 하늘은 어떨까. 내 육아력 많이 자랐다고 햇살 더 뿜뿜해주며 기운 북돋아 줄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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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점 아니어도 괜찮아요. 18점보다는 차차 나아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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