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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애가 자전거를 탄다고요?

[26화]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by 마이 엘리뷰

'느린 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이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첫 발화도 느렸고, 소근육 발달도 느리다 보니, 또래들에 비해 많은 게 '느리겠구나' 일찍이 마음의 준비를 해 둔 터였다. 덕분에 아이가 자라나는 속도에 대해 엄마로서 늘 크게 스트레스 받지 않는 편이었다. 당연히 '느리게 클 것이라고' 생각해 두니 두 살 터울인 둘째의 속도가 첫째의 속도를 추월할 수도 있겠다고도 종종 생각했다. 이를테면, 발화의 시작이 느렸고 눈빛을 다른 사람과 기꺼이 맞추려는 의지의 타임라인도 늦었으며 누군가의 호명에 대한 리액션 역시 한참 느렸으니까. 대근육 발달만큼은 또래들과 큰 차이가 없었는데, 오히려 친구들과 비슷한 속도를 보여주면 의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미국에서 아이가 첫 자전거를 타던 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사를 떠올리기 딱 좋은 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하는구나.'라고 표현하기 딱 좋은 매체가 바로 자전거였다. 고백하건대, 신경다양성 아이가 새로운 운동 기술을 배운다는 상상은 딱히 해본 적이 없다. 가끔 매스컴을 통해 자폐 청년의 수영대회 기록이 화제가 되기도 하고 영화 <말아톤> 속 조승우가 '초원이 다리는 백만 불짜리 다리'라고 되뇌는 장면도 유명하다. 하지만 그렇게 이슈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자폐성 장애를 안고 살아가면서 새로운 종목을 몸으로 체득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익숙한 게 아니라 새로운 걸 배우는 건 늘 도전인데 그게 가뜩이나 예민한 몸의 감각을 동원해야 하는 거라면 더욱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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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머리 위로 잠깐 떠올려보자. 나는 자전거는 어떻게 배웠던가. 안장 위에 조심스레 올라탄 뒤 오른발을 오른 페달 위에, 왼발을 왼 페달 위에 올려두고 '느낌적인 느낌'으로다가 힘껏 밀었던가? 아무리 보조바퀴가 달려있는 네 발 자전거라 할지라도 처음 발을 구를 땐 엄마가 뒤에서 함께 균형을 잡아주며 안심시켜 주었던 기억이 얼핏 떠오른다. 발을 엇갈려 말다 보면 앞으로 나갈 수 있고 두 손 힘 꽉 주면서 브레이크를 누르면 움직이던 바퀴가 '훅' 멈춰서는 것. 몸으로 익히면서 차차 자전거에 익숙해졌다 보니 말로 명쾌하게 설명하기가 힘든데, 이게 참 어렵다. 자폐성 장애를 가진 아이에게 오묘하고 어렴풋이 설명하는 건 통하지 않는다는 게 맹점이다. 복잡한 절차를 명쾌하게 쪼개서 딱딱 연습해 나가야 하는데 가르쳐주고 싶은 엄마조차도 '어렴풋이' 이렇게 배웠던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리는 수준이라니, 이래서 아들 자전거 어떻게 가르치나, 그 언젠가 탈 수는 있는 걸까, 이번 생애 자전거는 체험 불가인가, 종종 현타에 빠지곤 했다.


신경다양성 아들을 키우면서 묘한 짜릿함을 느낄 때는 바로 '안된다'고 생각한 게 '된다'로 돌아설 때다. 미국 한 동네 사는 같은 나이 외국인 또래가 타는 자전거를 마냥 신기해하면서 쫓아다니길래, 그 순간 다섯 살 생일 선물 리스트에 '자전거'가 올랐다. 외할머니와 함께 매장에 가서 자전거를 고르고 맘에 드는 헬맷을 이것저것 쇼핑할 때까지만 해도 사실 나는 큰 기대가 없었다. 또래 자전거가 부러워 졸졸 따라다니는 풍경에 가슴이 아팠을 뿐, 아들의 운동감각이나 예민함,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련의 속도를 고려할 때 '자전거'는 단연 무리라고 단정하고 있었던 것. 잘 타지 못할 것이라고 나름 전제해 두고 둘째인 딸이 곧 물려 타도 어울리겠다 싶은 디자인을 골랐던 것도 안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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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자전거를 조립하자마자 몇 번 오르락내리락 연습해 보던 아들, 딱히 세세히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앞으로 가는 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했다. 마당에서 빙빙 돌더니 마을길로 진출한다. 사흘 만에 학교 가는 길에 올랐고, 그다음 날은 마을의 비탈길도 무탈하게 내려왔다. 자전거를 제법 '잘 탄다'라고 느끼기까지 고작 닷새가 채 걸리지 않았다. 모든 건 내 편견이었다. 그렇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말로 하나 알려주지 않아도 내가 알아채지 못하는 4차원의 감각을 동원해 어떻게든 익히고 구현해 내는 아들이었다. 오른발로 오른 페달을 힘껏 밀면 반동하며 올라서는 왼쪽 페달 위로 왼발을 갖다 댄 뒤 역시 밀쳐내면 되는 것. 오른쪽과 왼쪽을 딱딱 구분해서 미는 감각을 구두설명할 필요가 없었고, 브레이크를 작동시키는 원리를 수차례 걸쳐 모델링해주지 않아도 되었다.

성장하고 있었구나.
모르는 사이
매 순간 자라고 있었던 거네.

어쩌다 보니 신경다양성 아이도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심지어 '자전거 타기'에 재미 들려버린 아들은 틈만 나면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자고 졸라댔다. 나보다도 안전 루틴이 확고해서 헬맷을 쓰고 무릎보호대를 딱딱 올바르게 높이 맞춰 착용해야만 나가겠다고 하니, '좀 대충 해도 돼' 잔소리부터 불쑥 나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흐뭇함이 앞섰다. 또래 자전거를 쫓아만 다니던 신경다양성 아이가 어느 순간 하늘색 헬맷을 쓰고 동네 몇 바퀴를 자전거로 휘젓고 다니니 미국집 이웃들에게도 화젯거리가 되었던 모양. 마트에서 마주친 동네 아저씨가 날 발견하자마자 반갑게 말을 걸었다. "이야, 저기 안쪽 집 사는 가족 맞지? 어제 아들 자전거 타는 거 봤어. 잘 타던데? 너무 보기 좋았어" 옆옆집 할머니도 날 보자마자 활짝 웃는다. "오, 자전거 너무 잘 타던데!" 어느새 아들은 하늘색 헬멧 쓰고 연보라색 자전거를 타는 우리 동네 초절정 인싸가 되어있었다. 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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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기 힘들 거라고 짐짓 미뤄두었던 자전거 타기. 의심 반, 설렘 반으로 시도했던 미국땅에서 아이는 자전거 실력을 얻었고, 나는 꼬깃꼬깃 넣어두었던 '아이의 가능성'을 반짝 꺼내 들었다. 졸업사진이나 오래된 서류 따위나 넣어두고 한참 열지 않았던 서랍을 먼지 탁탁 털어 개봉했던 느낌이랄까. 아이는 천천히 자라고 있는데 되려 엄마가 '어차피 느린 아이니까'라는 한 마디로 가능성 서랍을 꽁꽁 싸매 닫아두고 있었던 것. 신경다양성 세계에서도 이뤄낼 수 있는 게 많은데 '힘들 텐데', '우리 애는 그거 싫어할 텐데', '안 될 텐데'라고 NO 하고 있는 건 아이가 아니라,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안 된다'고 철벽방어를 해야 아이가 편안한 건 줄 오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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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가능성 서랍을 열었을 때, 환호해 주고 응원해 주는 이웃이 있는 것도 한몫했다. 아이가 동네 또래의 자전거를 졸졸 따라다닐 때 "네 거 아니잖니?" 다그치치 않고 "너도 한번 타볼래?" 유도해 주던 아저씨가 있었고, 아이가 인사와 눈 맞춤도 없이 쓱 지나다니기 일쑤여도 아이의 행동을 이상스레 바라보지 않고 늘 다정하게 말 걸어주던 할머니가 있었다. 편견 없이 예뻐해 주는 이웃들이 있어서 아이는 결국 자전거를 살 수 있었고, 탈 수 있었고, 질주할 수 있었다. 어쩌면 서랍을 열어보라고 마음속으로 열렬히 재촉해 주는 이웃들이 있었기 때문에 엄마도 꽁꽁 닫아두기 익숙했던 서랍을 결국엔 열어젖힐 수 있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신경다양성 아이가 자전거를 타는 대작전에 가담한 자들이 꽤나 많았다.


공식적인 '느린 아이'가 되면서 여전히 큰 기대를 하지 않지만, 적잖이 기대하는 영역도 늘어간다. 우선 네 발 자전거로 질주하기 시작했으니, 좀 더 연습하면 보조바퀴를 뗄 수 있겠구나! 굴러가는 운동감각에 재미가 들렸으니, 롤러스케이트도 가능할 수 있겠네! 스케이트를 배우면 빙상에서도 스피드 스케이팅 가능하지 않을까? 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아이스하키도 도전? 아이가 자꾸 스포츠 정복하는 꿈을 꾸다 보면 나 역시 여느 미국의 아들맘들처럼 운동장비 가득 싣고 아이를 연습장에 데려다주는 상상을 하는 데 이른다. 물론 나는 여전히 '큰 기대는 품지 않는' 신경다양성 엄마지만, 단단한 철벽이 조금씩 바스러지고 있음에 조금씩 설렌다.


신발 신꼬.
자전거. 타러. 가고. 싶어요
헬멧 쓰고
무릎 하고
자전거. 타러. 기자아


오늘도 기관생활 마치자마자 헬맷부터 부여잡는 아들. 루틴 확실한 신경다양성 아이의 준비물엔 한 치의 빠짐이 없다. 바깥 체감 온도, 폭염주의보 수준인데! 이토록 나가자니 뜨거운 햇살 겨우 피해 오후 느지막이 운동화를 신는다. 저렇게 하고 싶다는데 나가야지. 자전거 태워 쫓아다닐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이미 자전거를 쫓아다니는 엄마가 됐다. 앞으로도 상상하지 못한 풍경이 종종 생겨나겠지. 피곤한데 웃음이 난다. 우리 애가 자전거를 타고 있다.


IMG_7595.jpeg 조금씩, 천천히, 한 발짝씩 나아가는 너의 라이딩




* 브런치북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는 1편과 2편, 총 33화로 구성돼 있습니다. 미국행 이전, 신경다양성 이야기의 시작이 궁금하시다면 1편으로 놀러와주세요.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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