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디지털 OFF, 모두를 위한 자연 놀이 레시피
철저한 계획형 인간, 파워 J 엄마는 주말이 되기 전날 밤부터 아이들에게 묻는다. "내일 어디 가고 싶어?" 온 동네 키즈카페의 이름을 하나하나 읊어가며 아침에 어디 갈지, 다녀와서 또 무료하면 어디로 향해야 할지 머릿속에 여러 가지 안을 짜둔다.
아이들은 일단 실컷 뛸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면 어디든 좋아한다. 그래서 200평대 대형 키카에 트램펄린 촘촘히 놓인 구역은 단연 최애 공간이기도 하다. 규모가 아주 크지 않더라도 정글짐이나 집라인을 적당히 타고 내릴 수 있는 실내 놀이터 정도면 두 시간 깔깔거리다가 나오기에 딱 좋다. 거기에다 요즘 인테리어 경쟁이라도 하듯 아이들 방문하는 키즈존은 번쩍번쩍 화려한 미러볼에 아이들 시선 확 끄는 온갖 캐릭터 장난감으로 무장하고 있다. 아, 이 정도면 안 좋아할 수가 없잖아. 주머니 열어 정기권 회원권 따위를 무더기로 쟁여두는 손짓이 빨라질 수밖에.
그런데 정말 신기한 건 이 모든 화려한 템빨 없어도 아이들이 빠져드는 공간이 있다는 것. 그게 바로 '자연'이다. 나 역시 어린 시절을 지나왔는데 아주 어릴 적 <슬기로운 자연생활> 교과서를 펼쳐볼 때 빼고는 딱히 '자연'이라는 단어 자체를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자연보호라는 슬로건 내걸고 의례적인 휴지 줍기 봉사를 했던 초등학교 시절, 자연 친화적인 마케팅 사례를 분석하며 조모임을 했던 대학교 교양수업 때 정도가 덤으로 떠오르는 정도랄까. 머리에도, 마음에도 꽂히지 않은 '자연'에 아이들이 더 많이 웃는다는 걸 엄마의 촉으로 느낀 뒤부터 차가운 도시 여자, 워킹맘은 일상 공간에서 아이들이 마주할 수 있는 최대치의 자연을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다.
[첫 번째 공간]
* 일자산 자연 정원 놀이터 (서울 강동구 둔촌동 565)
오전에 이미 키즈카페에 한 차례 다녀왔는데, 아이들이 낮잠도 거르고 시무룩했던 날이다. 얘들아, 그렇다고 키즈카페에 또 갈 수는 없지 않겠니? 집에서 워크북을 끼적거리기에는 아무래도 가을볕이 너무 좋아 보였다. 집 앞 놀이터는 너무 진부해서 패스. 산책하는 김에 문방구나 아이스크림 가게 따위를 찍고 돌아오기엔 놀이 갈증이 해소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고민 끝에 나간 자연 놀이터는 키즈카페 1차 체크인에도 해소되지 않았던 아이들의 빵빵한 놀이 본능을 한가득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다녀올 때마다 신기하다. 키즈카페만큼 환하고 센 조명도 없거니와 아이들의 좋아하는 캐릭터 하나 없는 흙놀이터. 아파트 근처에 테마별로 꾸며둔 최신식 놀이터도 아니라서 손때자국도 많고 말끔한 인상도 아닌데 여기에만 발을 들이면 아이들은 평소 그 어느 때보다도 얼굴이 환해진다. 내달리는 속도도 빠르고 줄잡고 장애물을 넘어서겠다는 의지마저 더 탄탄 그 자체다.
너희들 아직도 안 지쳤니? 이렇게 자라나면 자연 마니아, 숲놀이 마스터 될 것 같다. 이리저리 흩어진 낙엽이 좋아서 뛰다가도 돌아서서 만지고, 모으고, 뿌리고, 서로 던져댄다. 엄마가 보기엔 그저 난리부르스. 근데 자연 속에서의 난리 부르스는 얄밉거나 화가 나질 않는다. 자연 놀이 효과 만만세.
[두 번째 공간]
* 달의 정원 (경기 하남시 천호대로 1358번 길)
나 어릴 땐 우리 엄마가 왜 그렇게 매일 쓰디쓴 커피를 마시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엄마가 되어보니 500% 알겠다. 커피 없이는 육아가 불가능한 걸 어쩌나. 억지로 내 머리 깨우는 각성효과가 몸 전반에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잠시 카페인도 '금'해볼까 생각했지만, 그 누가 와서 건강 들먹이며 설득한데도 지금의 나는 커피 못 끊는다에 1표 던진다. 나 혼자도 마시지만, 평일 오후, 주말 내내 아이들과 함께 하는 가운데에서도 엄마의 커피는 너무나 소중한 것. 외출만 했다 하면 애들이 먼저 부르짖는다. "엄마, 커피 마셔요!"
20년 단골집, 스타벅스도 좋고 커피빈도 좋지만, 이왕 애들 데리고 살짝 카페인 충전한다면 자연 낀 카페가 좋다. 실내에서 애들이 뛰어다닐까 봐 전전 긍긍할 필요도 없고 커피 마시는 엄마 곁에서 얌전히 머물게 하려고 태블릿 PC 꺼내 영상 돌릴 필요도 없어 마음 놓이는 공간. 가슴 졸이며 마시는 커피는 너무 독하지 않은가. 잔디밭 테이블에 앉아서 홀짝거리는 동안 애들은 구름 맘껏 보며 그네도 타고, 돌멩이도 찾고, 나뭇잎도 잔뜩 주워와서 하나하나 엄마 보여주는 데 정신이 쏠려있다. 애쓰지 않아도 데려다 놓으면 알아서 자연과 친해지는 아이들. 덕분에 오늘도 육아일과 중 커피 마시기 성공.
[세 번째 공간]
* 고마워 토토 (서울 강남구 영동대로 128길 32)
실내 숲체험이라는 콘셉트가 신박해서 자발적으로 똑똑 문을 두드렸던 곳. 어린이집에서는 간헐적으로 숲체험에 가곤 하는데 내가 직접 두 아이 데리고 숲으로 향해본 적은 없어서 막막했던 참에 테마별로 흙놀이가 진행된다고 해서 마음이 끌렸다. '예민한 첫째가 맨발로 흙에 안 들어가면 어떡하지?', '둘째가 아직 어린데 엄마랑 안 떨어지려고 하면 어떡하지?' 각종 걱정 콜라보가 밀려드는 것도 잠시, 아이들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흙으로, 실내 숲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손으로, 발로 흙을 문대는 몸짓 그 자체가 내게도 힐링이었다. 진짜 숲이 아니래도 아이들은 이미 자연과 하나 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일반 키즈카페에 방문하는 것과 비교한다면 다소 가격대가 있는 편이지만, 흙에서 피어오르는 애둘 함박 미소를 보면 내돈내산 클래스를 자꾸만 이어가게 된다. 한번 더 웃을 수 있는 기회, 또 한 번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기회.
나는 40여 년을 살아내면서 저렇게 흙을 맘껏 만질 기회가 있었던가. 자연 요소에 살을 문대면서 세상 다 가진 것처럼 깔깔대본 적이 있었던가. 자연과 하나가 되어본 적이 없는 밀레니얼 세대 엄마는 이제부터라도 아이들이 애정하는 자연 요소에 슬쩍 껴보기로 남몰래 결심해 본다. 살면서 해본 적 없던 자연 속 몸짓들에 덩달아 조금씩 취해가는 중이다. 아이들이 자연 공간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그 발랄한 발걸음에 싱그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