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산부인과 체험기 (5)
9월이 시작되자마자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바로 미국 산부인과 OB/GYN의 담당의 정하기. 가을학기 개강이 시작되고 난 뒤 내가 가입돼 있는 학교의 보험정보부터 다시 한번 꼼꼼하게 확인했다. 동기들은 이번 학기 시간표와 담당교수부터 찾아보기 바쁜데, 나는 나의 40주, 임신 주수를 세심하게 챙겨줄 담당의를 찾는 게 급선무였으므로.
International students_국제학생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학교 연계 보험에 가입하는 게 의무였다. 남편이 가입한 보험 플랜에 조인을 하면 면제가 가능한, 예외조항이라는 게 있기는 했으나, 남편 보험의 설계사와 다시 한번 상담해보니 내 경우, 학교 보험 가입을 유지하는 게 여러모로 혜택이 유리했다. 자, 이제는 내 보험 플랜과 연계된 네트워크 안에서 내 담당의를 골라야 한다. 근데 너무 광범위하잖아. 어떻게 범위를 좁혀나가지.
처음부터 한국계 의사를 고집한 건 아니다. 남편은 오랜 미국 생활에 이미 익숙했고, 그간 미국 안에서도 한국 네트워크를 붙잡겠다고 고집하는 성향은 아니었으므로.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둘다 개인주의자 성향이 강해서) 미국의 이모저모가 상대적으로 불편하고 낯설기도 했으나, 나 역시 산부인과 담당의가 꼭 한국계 선생님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임신기간은 길고 힘든 여정이 되겠지만 출산 당일 제외하고는 크게 시시각각을 다투는 위급한 상황이 아닐 터였고, 그보단 출산과정을 최대한 편안하게 지원해줄 수 있는 시스템이 잘 갖춰진 병원. 더불어 지역 내에서 명성이 제법 괜찮은 병원을 찾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보스턴 지역 내 딱히 한국 지인이 없으니, 임신 출산에 대한 정보를 한국인으로부터 얻는 건 한계가 있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알고 지내던 보스턴 한국맘들에게 종종 출산병원에 대해 정중하게 여쭤보았고, 두 곳의 병원을 '찜'하게 되었다. "남편, 보스턴 지역맘들은 브리검 앤 위민스(Brigham and Women's Hospital), 베스 이스라엘 (Beth Israel)에서 많이들 출산한대."
유명한 대형병원에서 꼭 출산해야겠다는 욕심은 결코 아니었다. 내가 다니는 학교 근처, 보스턴 다운타운 근처로 병원을 정하는 게 나은가, 집 근처 병원을 잡는 게 좋은가. 판단이 잘 서지 않던 시점에 직접 들은 병원이 두 곳밖에 없어서 우선 두 곳 네트워크에 속한 의사들 검색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거 너무 광범위하다. 그나마 한국어가 가능한 의사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은 했지만 몇 번의 검색에 검색을 거치다가 영 감이 잡히지 않아서 일단 짐짓 포기.
그러던 와중, 출근했던 남편이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남편의 동료 교수들로부터 열혈 조언을 받은 결과 우리 부부에게 딱 적합한 담당의 리스트를 추렸다는 것. 역시 지인 찬스가 최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보스턴 근교 윈체스터 (Winchester) 지역의 한 병원에서 실제 출산했던 동료 교수의 지인이 너무나 만족스럽게 호평했고, 다시 낳으면 또 여기서 낳을 거라고 했단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실제 현지인들로부터 흡족한 평을 받고 있는 곳이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집에서도 남편 차로 이동하면 크게 멀지 않은 보스턴 근교 벌링턴(Burlington) 지역. (근처에 한인마트가 있으니, 병원들렀다가 총총 가기 좋겠다고 내심 계산했다.) 게다가 한국계 의사도 네트워크 안에 연계돼 있었다. 그렇게 한국계 여자 의사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선생님과 만났던 건 임신 15주차 때가 처음. 첫 방문했던 9주차부터 바로 담당의와 미팅을 하는 건 줄 알았는데 네 번째 방문 전까지는 모두 담당의와 한 팀을 이루고 있는 병원 내 스태프들과의 만남이었다. 초음파를 비롯해 모든 검사는 제 때 제 때 꼼꼼하게 이뤄졌지만, 진짜 담당의와 최초 면담할 기회는 없어 아주 살짝 실망. 한국에선 일단 의사부터 보고 진행하지 않던가. 하지만 초반에는 워낙 기초검사와 정보 업데이트 작업이 대부분이라서 굳이 출산 담당의와의 직접 대면이 이뤄지지 않았어도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딱히 큰 이슈가 없었던 몸 상태도 다행이다. 그래도 은근히 기다려지던 한국계 의사 선생님과의 만남. 드디어 15주차 예약일이 되었다.
큰 반전 하나는 한국계 선생님이시지만, 한국어를 잘 못하신다는 것!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첫 인사를 서툰 한국어로 건네시기는 하셨지만, 한국어를 사실 잘 하진 못하신다고 양해를 구하셨다. 아, 그렇지. 생각해보니 내 큰 편견이었잖아. Ethnicity가 같다고 해서 나와 완벽히 같은 한국인일 거라고 생각했던 건 여전히 '다양성'에 대한 견해가 좁은 내 탓. 그래도 어쨌든 1% 묻어나는 반가운 마음에 짐짓 편안해지던 느낌은 선물 같았다.
대부분의 진단과 상담은 이때까지와 다를 것 없이 영어로 진행됐다. (앗, 나는 오늘은 맘껏 한국어 써도 되는 날인 줄 알고 갔었어.) 한국어를 잘하지는 못하셔도 들으실 수는 있다고 하셔서 몇 번 한국어 질문을 던지거나 한국어로 대답을 하기는 했는데, 답변은 영어로 듣다 보니 진료실 상황이 다소 코미디 같았다. 그 누구도 통역을 해주진 않지만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 하는데 또 각자는 잘 알아듣고 이해하고 있다니. 내가 멈칫거리는 부분은 영어가 능숙한 남편이 잘 풀어 이야기 해줬고, 다소 예민한 여성 용어나 임신 출산 관련 용어들이 영어로 잘 생각이 안 나서 한국어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른바 한국 출산 시, 임산부 삼대 굴욕에 해당한다는 항목들 각각,,, 영어단어로 뭐라고 해야 하나?).
미국에 오기 전에 아무리 독하게 영어공부를 한다고 했어도, 산부인과 OB/GYN에 해당하는 임신 출산 관련 단어까지 섭렵하고 오지는 못했으므로. 이래저래 과제가 쌓이는 느낌이었다. 이를테면 태반, 태아, 탯줄, 양수, 기형아 검사,,, 가 영어단어로 정확히 뭔지부터 시작해서 한국어로도 어색한 여성기관과 조직, 출산 시 자주 쓰이는 용어들이 영어로 뭔지에 이르기까지.
물론 아주 세밀하게 전문 단어를 써가며 환자 스스로의 상태를 설명할 일이 많진 않을 것 같았다. 진통이 심할 땐 일단 무통주사 (Epidural)를 외치면 될 것이고, 이래저래 기본조치부터 위급상황까지 프로페셔널한 전문가들이 다 알아서 조치해줄 거라 믿었다. 뭐 안되면 통역서비스도 있고. 무엇보다 미국 문화와 상황에 익숙한 남편이 있으니까. 그래도 임신 출산을 직접 경험해야 할 당사자는 본인, “나잖아!!”
마음이 급해진 나는 미국에서 출산하신 분들의 블로그를 열심히 탐독했고 임신 출산과 관련된 산부인과 용어를 모조리 출력해 필요할 때마다 머릿속에 입력해 둬야겠다고 결심했다.
방문 며칠 뒤, 의사로부터의 전화. 내 담당의와 처음 대면했던 뒤로 약 처방을 받을 일이 있어 따로 유선상 조치를 취해준 것. 이걸 어떻게 복용해야 하는지 세부 방법과 빈도를 묻는 과정에서 혹여 내가 오해를 하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잘못된 조치를 할까봐 의사 역시 다소 불안했었나 보다. 전화 통화를 마무리하려는데 최선을 다해 더듬더듬, 다시 한번 한국어로 내용을 설명해 주셨던 담당의. 감동받아 눈물 날 뻔! 아이 갓 잇. 저 잘 알아들었어요. 약 처방도 고마운데 세심한 마음 씀씀이에 감사한 순간.
여전히 갈 길은 멀다. 남은 주차, 총 임신기간 중 절반 가량의 여정이 앞에 놓여있고, 남은 시간의 컨디션이 얼마나 더 좋아질 수 있을지 여전히 미지수. 입덧기간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아무리 육아에 고생하더라도 빨리 낳고 싶다는 마음만이 굴뚝같은 나날들. 타지에서 임신 출산을 경험하고 있다는 생각에 종종 몰려드는 울적함과 애틋한 향수. 그래도 이러한 요소들을 충분히 상쇄시켜줄 따뜻하고 포근한 것들을 최대한 마음에 품어보려 노력한다.
한국어에 능숙하진 않아도 내 상황을 잘 이해해주려 노력하는 담당의가 있다는 것. 무엇보다 나보다 기나긴 미국 라이프로 현지 생활에 너무도 익숙해서 (때로는 정말이지 부럽고 샘날 정도인) 적응 레벨 만랩을 자랑하는 남편이 있다는 것. 남은 반절의 20주라는 시간도 OB/GYN 안에서 재미난 추억들이 켜켜이 쌓여가길.
임신 출산 용어를 비롯해 다양한 영어 정보가 가득했던 블로그 추천
슈슈의 달콤한 영어 한 조각
https://blog.naver.com/sugarsweeet/221138705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