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본능

by 하날빛



우리 엄마는
밤 늦게 일해요



지금은 열 살이 된 우리 집 꼬마 아가씨가 8살, 그러니까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던 해. 아이가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가방 속을 주섬주섬 뒤진다.



"엄마! 오늘 수업 시간에 '엄마' 하면 생각나는 걸 그려 보라고 하셨어. 그래서 내가 엄마 생각하면서 만든거야. 선물이야!"


병아리같이 귀여운 목소리에는 자랑하고픈 마음으로 한껏 부풀어오른 흥분이 섞여 있었고, 고사리같이 작고 도톰한 손에는 정성스럽게 만들었을 작품 하나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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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박또박, 꾹꾹 눌러가며 쓴 한 글자 한 글자.

종이에는 약간의 서툰 글씨로 딸 아이가 바라 본 엄마가 선명히 박혀 있었다.




'엄마'하면 떠오르는 것이, 일하는 엄마라니.



'날 사랑해주는 엄마. 날 안아주는 엄마. 책 읽어주는 엄마. 같이 역할놀이 해주는 엄마. 이 정도는 되어야 그래도.. 엄마도 어깨 좀 으쓱댈 수 있지 않겠니..'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내미는 선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잠시, 난감함에 주춤거렸다.


"고마워"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이 한마디로 온갖 감정으로 뒤섞인 마음을 대신했던 어느 날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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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나의 일에 정신없이 빠져 있는 일 중독자였다.


주말은 온전히 내 공부를 위한 시간이었고, 나는 모든 워크샵과 세미나를 섭렵하며 나름 능력있는 워킹맘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내 일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 스스로 여겼으나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내 자리가 아닌 곳에서 나를 찾기 위한, 한낱 중독에 지나지 않았던 발버둥이었다.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길이 없어 더 집착적으로 매달리며 그것으로 내 스스로의 존재를 인정받으려 했던 인정 중독.



그것은 엄마인 나에게도, 딸 아이에게도 참으로 몹쓸 것이었다.


딸 아이와 나 사이엔 분명, 말하지 않고 보이지 않지만 연결될 수 없는 무언가 벽 같은 것이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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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로 살고 싶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것은, 마음 깊은 곳 저변에서 울리고 던 소리를 듣게 되면서부터이다.



본능.


모든 엄마에게는 그 본능이라는 것이 있다. 거스를 수 없는. 그 본능의 소리는 자리를 벗어나면 메아리처럼 울려온다. 그래서 엄마는, 어쩔 수 없는 엄마인 것이다.



그간 내 삶에만 정신없이 빠져 들어 있느라 들리지 않던 그 소리가, 언제부터인가 들려온 것 조차 나는 나의 본능이 이끌었다 믿고 있다. 엄마로서의 본능.


사실은 그 누구보다 딸 아이의 엄마로 살고 싶었던 간절한 나의, 본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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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동안 해 온 일을 그만 두었다.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었던, '나라는 존재'의 전부라 생각했던 그 일.



나를 완전히 사로잡고 있었던 일들에서부터 빠져 나와, 내 마음이 정말 원하고 있는 것에 귀를 기울여보고 싶었다. 지겹도록 잡고 있었던 끊을 그렇게 과감히 끊어내게 된 것은, 재작년의 일이다.



누군가는 12년 동안 쌓아온 시간이 아깝지 않느냐는 말을 한다. 꽤 많은, 아니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듣는 말이다.



나는 그 시간이 아까울까.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어떨까.



2년 전 아이와 함께 하기로 결심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 일을 하던 나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스치듯이라도 떠오른 적이 없다.


아마도 이 자리는 나의 본능대로 선택해 온 자리이며 내가 있어야 할 곳임을 알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나는 엄마의 자리로 돌아왔다.






엄마는 날 돌볼 땐 온화하고
날 지킬 때는 강인해



그 해 딸 아이에게 나는,

일하는 엄마에서 본인을 돌보고 지키는 온화하고 강인한 엄마로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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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삶을 통째로 쥐고 흔드는 이변과 맞닿뜨리는 일이다. 나를 만들어왔던 세계를 완전히 뒤집어 엎는, 또 다른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



그래서 때때로 거부하고 싶고, 달아나고 싶고 저항하고 싶은 본능이 일어난다. 내 삶을 모조리 놓치는 것 같기 때문에.



하지만 훨씬 더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또 하나의 본능이 있으니 바로, '엄마 본능' 이다. 거부할 수 없는, 저항할 수 없는, 벗어날 수 없는.



사랑.


아이를 향한 엄마의, 사랑.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이다.




그 거대한 본능에 이끌리어 간다는 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내려놓는 것 같으나 실은, 온전한 내가 되어 보는 길이다.



아이를 통해 나는 내 속의 진정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알게 되었고, 그 소리를 따라 사는 법을 알게 되었으며 그 삶이 얼마나 나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가는지를 알게 되었다.



본능따라 산다는 건, 온전한 내가 되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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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삶에서는, 내 자리가 어디인지. 조금이라도 벗어날라치면 나의 옷자락 끝을 잡아 당기는 소리가 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오는 소리.


그 소리를 덮지 않는다면, 외면하지 않는다면.



삶은 반드시 내가 원하는 자리에 가도록 되어 있다.


엄마라는, 그 자리에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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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엄마로서 마음과 태도의 변화를 기록한 글로, 워킹맘과 전업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

저는 지금도 다른 일을 하며 워킹맘으로 살고 있답니다.


워킹맘과 전업맘 모두, 모든 엄마들의 삶은 귀하고 소중하다는 마음을 전하며♡






* [하날빛의 글 정원]

글로 이끈 삶을, 글로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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