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두르지 않고
판을 주도하는 법
평생 지니고 살아가면 이득이 되는 몇 가지가 있다.
어릴 때는 엄마나 선생님들의 잔소리만 들렸던 것들이, 사실 그건 내 인생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씀들이었다는 걸 살다보니 알 것 같다.
인생을 잘 살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걸 이 나이가 되어서야 실감하다니.
그 중,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마땅히 하는 것', '즐거운 것'으로 몸에 베이도록 하면 좋은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하나는 책을 즐거이 가깝게 하는 습관이고, 또 하나는 마지막은 매일을 기록하는 것이다.
어른이 된 이후에 이 두 가지를 인생에 껴넣는 일은 '고된 학습' 의 영역이다.
뇌는 죽을 때까지 변할 수 있지만.
말랑말랑한 가소성을 가지고 폭발적인 연결을 하는 어린 아이의 뇌와 비교했을 때, 어른의 뇌는 아무래도 굳어있고 변화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아이들은 다르다.
그들의 뇌는 무엇이든 스펀지처럼 쭉쭉 흡수하면서 자신이 하는 일들을 빠르게 뇌 속에 연결시킨다.
스스로 살아갈 능력을 받아들이고 성장하기 위해 뇌는 한없이 개방되어 있다.
그러니 부모의 역할이란.
삶을 살아갈 때 꼭 필요한, 인생을 풍성하게 해주는 능력들이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강요스럽지 않게 스며들게 하는 것이 아닐까.
강제적이지 않게, 은근슬쩍 밀어 넣어주는 지혜는 육아에서 필수적이리라.
딸에게 꼭 한 가지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 있다. 평생 그 가치를 알고 가지고 살았으면 하는 것.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이 글쓰기의 힘이 실로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책과 글쓰기는 삶의 영역을 200% 확장시켜주는 도구들이지 않은가.
인간은 도구를 활용하는 존재인데 책과 글은 그 중, 뇌의 모든 영역을 직접적으로 연결하고 사용하게 하는 가장 고차원적인 도구라는 생각을 한다.
이 도구를 거머쥔 사람은, 흔들리며 가는 삶 속에서도 그 중심을 지킬 줄 알며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스스로 찾아 나간다.
책을 통해 세계를 넓히고 나의 언어로 다시 그 세계를 표현해내는 일만큼 인간에게 주신 숭고한 능력이 있을까.
단.
이 모든 것은 스스로, 즐거이 할 때 빛을 발한다.
그러니 아이의 습관을 들여줄 때에는 은근슬쩍의 지혜가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작은, 육아 지론이다.
살짝 밀어넣을 틈을 찾아야 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한 주에 꼬박 한 번씩은 일기장 제출이 있었다.
학교 숙제니 해내기는 했는데 나도 경험해봐서 알지만, 누군가의 검사를 받은 일기쓰기란 먹기 싫은 음식을 먹는 것만큼이나 하기 싫은 일이다.
'일기장에 담기는 내용이라고는 오늘 뭐 했고, 뭐 했고, 뭐 했고. 재미있었다.
끝' :)
아직 어린 시기에는 이런 기록마저도 아주 소중한 경험이지만, 제출을 위한 일기는 여간 맛이 없다.
그래도 좋은 점을 꼽으라 하면, 일기라는 존재를 알게 해준다는 것. 여기서 습관이 잘 들 몇몇의 아이들은 꾸준하게 일기를 써내려갈 힘을 얻게 된다는 것.
아쉽게도 우리 딸아이는 그 몇몇 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3학년에 올라오면 담임 선생님의 교육 철학에 따라 주 1회 일기쓰기는 [주제글 쓰기]로 바뀌었고 자연스레 딸아이의 일기는 멈추게 되었다.
개학 전 날, 30일간 일어났던 일들을 거의 창작의 정신으로 하루만에 써냈던 기억이 있는 나는 선생님의 교육 방침이 좋다. 아마도 열의 여섯, 일곱은 이런 억지스러운 일기를 쓰리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던게 아닐까.
하나의 주어진 주제를 깊이 생각해보면서 글로 표현하는 것은 1번/ 2번 답지에서 정확한 답을 골라야하는 딱딱한 교육 현실에서, 잠시나마 아이들의 숨통을 트여주는 일이 아닐까 한다. 이 때만큼은 상상력을 넓찍이 펼칠 수 있으니.
그럼에도 나의 마음이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으니 '그러면 어떻게 일기를 쓰게 하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4학년만 올라가도 짐작하건대 '쓰기 싫어' 라는 말을 듣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금은 황금 시기인데, 이제 '매일 일기를 쓰자' 라는 식의 제안은 영 내 스타일이 아니고..
마침 방학이 되면서 [주 1회 생활일기 쓰기] 가 숙제로 주어졌다고 한다.
일기쓰기에 대한 명목은 다시 만들어졌으나 '일기 써야지' 라는 잔소리를 하면서 방학을 보내고 싶지는 않다.
은근슬쩍의 지혜가 여느 때보다 필요하다.
"OO아, 예쁜 일기장 사줄까?
주제글 쓰는 공책에 써오라고 하셨다며.
엄마가 예쁜 걸로 사줄게.
내가 고른 예쁜 공책에 쓰면 기분도 좋아질 것 같은데"
마침 교보문고 근처에서 외식을 했던 그제, 문득 맘에 드는 일기장을 고르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예~~!"
같이 점심을 먹고 있던 딸아이의 떡볶이 집어드는 속도가 빨라진다.
일기장 하나에 이렇게 신날 일인가 싶다가도 무언가 첫 단계에 수월하게 진입했다는 안도감이 든다. 말 아주 잘 꺼냈어! 스스로 칭찬도 해주며 ㅎㅎ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봐"
몇 개를 놓고 고심을 하더니 가장 자기다운, 아기자기한 토끼와 꽃이 그려진 공책 하나를 고른다.
집 책장에 아무렇게나 꽂혀있는 공책에 숙제를 해가려던 참에, 엄마가 예쁜 일기장을 사준다고 하니 신이 났는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인 것 마냥 끌어안고 다닌다.
여기에 매일 매일 일기를 써보겠다고까지 한다.
일단 성공이다.
내가 고른 새 일기장이니, 하루 이틀은 신나게 쓸테지.
하지만 그 이후는 사실 더 중요하다.
나의 잔소리가 또 다시 개입될 상황은 분명히 오래지 않아 생기리라. 이걸로 실랑이 하고 싶지는 않은 나에게, 또 한 번의 지혜가 필요하다.
"OO만의 비밀을 다 써봐~
겪었던 일도 좋고,
하루동안 들었던 감정도 좋고.
때때로 아빠.엄마한테 섭섭한 것도 있고
아무한테도 말 하고 싶지 않은
OO이의 기분이나 감정도 있잖아.
아빠. 엄마 아무도 안 볼테니까
이 공책에는 쓰고 싶은 말,
다 써보는거는 어때?"
이 제안이 그토록 효과적일 줄은 몰랐으나 아이의 반응은 생각했던 것 보다 몇 배나 더 적극적이었다.
"그럼 엄마
이거 선생님께 내야하는데
어떡하지?
나 창피한데.."
"그럼 어차피 방학 일기는 주 1회니까
그거는 주제글 쓰는데에 편하게 쓰고
지금 산 공책은
OO이만 보게 놓고 써.
언제든 써도 되고, 마음 다 털어놓을 수 있지."
"와!!!
너무 신나!!
나 이런 거 처음이야!!
나 매일 쓸거야!!"
그 날 저녁, 아이가 저녁밥을 먹자마자 책상에 앉에 한 일은 자신의 '비밀 일기쓰기' 였다. 한참을 꾹꾹 눌러 써내려간 비밀 일기장 첫 페이지.
"엄마, 나 이만큼이나 썼어.
그냥 이렇게나 많이 써졌어.
근데 내용은 보지마!"
슬쩍 곁눈질로 바라보니 21개의 좁은 줄을 넘어, 아래 3줄까지 이어 빼곡히 써내려간 일기다.
너는 무엇이 그리도 쓸 것이 많았을까.
"너무 좋아.
내일도 쓸거야.
매일 매일 쓸거야."
그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마음의 해방구가, 아이에게도 필요한가보다. 고작 10살의 작은 아이게도 말이다.
아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엄마라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아이 또한 담고 있는 마음을 풀 데가 필요했구나.
새삼, 다행이다.
아이에게 그냥 일기가 아닌 '비밀 일기'를 밀어넣어 준 것이.
비밀 일기를 통해 아이는 스스로의 마음을 꺼내는 방법을 알게 되리라.
글을 써내려가며 그 안에서 내 마음이 어떻게 정리되고 또 앞으로 나아갈 힘이 되어주는지를 알게 되리라.
'일기의 맛있는 맛'을 아주 조금이라도 맛을 보았으니.
아이는 앞으로도 이 맛을 잊지 못해, 공책을 펴들게 될 것이다.
잠시 멈춰지는 때가 있다 하더라도.
처음 새겨진 '첫 일기의 달콤함'은 언제고 다시 연필을 들게 할 것이다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거면 되었다.
오롯이 순도높은 너의 이야기로만 가득찬, 일기장이 되길.
휘두르지 않고 판을 설계하는 법.
육아에 있어서는, 은근슬쩍의 지혜가 늘 필요하다.
* [하날빛의 글 정원]
글로 이끈 삶을, 글로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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