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차를 훌쩍 지난 베테랑 주부(라고 하고 싶은).
식탁 한번 차릴 때마다 레시피를 뒤적거리며, 간장은 얼마나 넣어야하는지. 물은 얼만큼 채워야하는지. 몇 분을 끓여야하는지. 하나 하나를 체크했던 11년 전의 나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을 이뤄왔다.
이만큼 넣으면 '맛깔나겠다', 이 정도 끓이면 '쫄깃하겠네', 이 재료 넣으면 '딱이겠다'. 어느샌가 일일이 찾아보지 않아도 직감이 이끄는 손맛을 갖게 되었는데.
딱히 요리를 더 배웠던 것도 아니고. 살림하는 법에 특히 더 관심을 가졌던 것도 아닌데.
생각해보니 그건 딸아이가 세상에 나오고나서부터였다. 이런 능숙함이 생긴 건.
10년 아이를 키우고보니, 내 스스로의 평가로는 주부 능력치가 80단쯤은 족히 올라가 있는 듯한 나를 마주한다.
뭐든 누적된 시간은 무시 못 한다고, 주부 짬밥이라는 건 과일 껍질 하나 제대로 못 깎던 사람도 한 식구의 삼시세끼를 책임질 수 있는 경지까지 올려놔주었다.
한 남편의 아내로, 엄마로 살아간다는 건.
참 신기하고도 신통한 일이다.
아날로그를 좋아한다. 그래서 나의 육아도 조금은 느리다.
아이는 TV, 미디어 기기와는 조금 거리를 두고 지낸다.
아마 누구보다 빠르게 습득할 아이이지만, 즉각 즉각 답을 얻을 수 있는 방식에 익숙해지기 이전에 좀 어렵더라도, 좀 헤매이더라도.
시행착오도 겪어보며 극복해내며. 저만의 방식을 찾는 과정을 꾹꾹 밟아 갔으면 한다.
지루하고 심심할만한 빈 시간이 주어질 땐 스스로 책을 챙기거나, 색연필과 빈 종이, 혹은 인형 등을 챙긴다. 성경 필사책을 챙기기도 하고, 아끼는 컬러링북을 챙기기도 한다.
모두가 제 머리를 굴리고 써야하는 것들이라 좋다. 손과 눈을 앞뒤양옆으로 움직이며 제 스스로 해내야 하는 것들이라 좋다.
하나를 하더라도 제 머리에서 나와야 한다.
눈동자를 이리 저리 왔다갔다 하는만큼 책 속의 글자들은 머리 속에 각각의 자리를 잡으며 처리되고 있을 것이고 작은 인형들을 손에 쥐고 이 역할, 저 역할을 하며 이야기를 만들 때는 또 어떠할까. 반듯 반듯 정성스레 연필을 눌러 쓰는 손글씨도, 하얀 종이의 그림에 색을 입히는 것 하나도.
아이의 머리 속에서는 그냥 되는 것이 없다.
불현듯 어릴 적 TV에서 수없이 흘러나오던 광고송이 생각난다.
내가 '왜' 존재하는지까지 로봇에게 묻고 대답을 얻게 될 시대.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 의미를 찾고 해내는 과정 속에서만이 성장하고 발전하며 나아가는 존재다.
대체되어선 안될 것들까지 넘겨서는 안 된다.
역설적이게도 앞으로는 [사람]다운 사람이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에.
* [하날빛의 글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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