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서, 깊어지는 것에 대하여

시간의 예술

by 하날빛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말자.


짓무른 흙이 단숨에

그릇이 될 리 없다.


수차례씩 몸밖으로 수분을 빼내고

타는듯한 고열을 견뎌내며

새로운 색을 덧입는,


지난하고 고된

오랜 시간을 거친 것들만이

그만의 빛깔과 질감,

견고함으로 탄생된다.


우리가 빚어내는 꿈이라는 건.

농익는 시간이 만들어내는

결실이자 예술이라는 것을,


순간에라도 잊지 말자.




남편과 딸아이 손을 잡고 공방엘 간 적이 있다.


도자기를 만드는 공방.

일정 비용을 내면 재료를 다듬는 것에서부터 그릇을 본 뜨고 색을 입히는 것까지, 하루 몇 시간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똑같은 모양이 대량으로 찍히는 세련지고 고급스러운 그릇과 달리, 도자기에는 무언가 사람의 고풍스러운 숨결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래서인가 나에게 도예라는 건 도달할 수 없는, 범접할 수 없는 신비로운 영역에 속해 있는 것. 그런 것이, 도자기를 한 번 만들어 보고 싶다는 딸의 말 한마디에 덜컥 신청을 하게 된 것이다.



'사람의 손길과 불, 물과 공기, 자연의 숨이 닿은 흙은, 오랜 '시간'이라는 것과 맞물려 어떤 존재가 되는가'


도자기가 완성되어 우리 손 위에 놓이기까지, 나는 그 모든 과정에서 이 질문 하나를 붙잡는다.


비슷비슷한 제형의 흙덩이들이 단단하고도 기품 있는 제각각의 그릇으로서 탄생하는 과정.

그 안에 같은 형태, 같은 질감, 같은 빛깔로 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공방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앞치마를 두르는 일이었다. 우리는 건네받은 앞치마를 옷 위에 덧대어 걸치고, 치대기가 끝난 점토를 받아 자리에 가 앉았다.


치대기란, 흙 안의 공기 방울을 없애고 수분을 고르게 하여 균열 없이 굽히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공기방울이 남아있으면 굽는 과정에서 작품이 터져버릴 수 있고, 수분이 고르지 못하면 질감이 불안정해 형태가 잘 잡히지 않고 건조 과정에서 뒤틀려 버릴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도자기의 탄생은 사람의 손길을 통해 구워지는 과정에서 일어날 변수를 꼼꼼하게 대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흙을 손에 쥔 우리가 먼저 할 일은 밀대를 이용해 흙반죽을 편평하게 펴는 것이었다.

어떤 걸 만드느냐에 따라 형태를 잡는 방법도 다양한데, 접시를 선택한 우리는 물레를 사용하지 않고 밀대를 둘둘둘 굴려 납작한 판을 만들어내야 했다.


꽤나 묵직한 덩어리를 고르게 펴내는 건 생각보다 많은 힘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어릴 적 손으로 주물럭 거렸던 흙점토를 파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팔 힘으로만 하면 금방 지치게 되니 몸 중심으로부터의 힘이 손에 연결되어 적당한 압력으로 전해져야 하는데, 이것도 단숨에 펴질 리가 없으니 여러 차례 굴리기를 거듭해야 한다.


그럼에도 첫 단계에 임하는 마음은, 그저 설렘이니.

하나의 덩어리였을 뿐인 흙점토가 오롯이 나의 손을 거쳐, 어떤 모양이든 형태를 갖추게 될 것에 대한 기대.


기대, 그것이었다.


반죽을 고루 퍼뜨리는 손에는 그 온갖 부풀어 오른 마음들이 만들어내는 신명나는 힘이 실렸다.



투박한 흙반죽이 어느새 널찍이 퍼지고, 모든 부분의 두께를 동일하게 만드는 작업이 시작된다.


손길이 닿는 곳마다 울룩불룩하던 잔굴곡이 메꿔지며 고른 평면이 되기 시작한다.

물먹은 스펀지로 가 쪽을 깔끔하게 다듬기도 한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마냥 매끄러운 표면은, 그런 식으로 완성되어 갔다.


그릇 모양을 잡고 색을 입히기 전까지 과정에는 이렇듯 여러 번 손의 다듬질이 있었다.


자그마한 공기 한 방울이라도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어느 곳 하나 모나게 하지 않기 위해.

어쩌면 형태를 잡고 그림을 그려 넣고 색을 입히는 추후의 과정을 위해 가장 공을 들여야 하는 건 이 첫 발이 아닐까.


도자기의 고아한 탄생을 위해, 걸어야 하는 섬세한 걸음.

그 시간을 거치고 나서야 형태를 잡는 거며, 무늬를 새겨 넣는 거며, 그림을 넣는 거며 다 가능한 것이었다.


딸아이는 뽀송하고 작은 손으로 가장 좋아하는 고양이 그림을 새겨 넣었고, 나는 나답게 무심한 듯 시믈하게 연한 색의 색깔을, 신랑은 나뭇가지에 달린 작은 잎들을.


한 덩이 흙이었던 것이 제각각의 취향대로 흩어졌다.


어떤 것은 과일 담을 고양이 그릇으로, 어떤 것은 갖가지 찬반이 담긴 연한 빛깔의 그릇으로, 또 어떤 것은 디저트류가 담길 풀잎 무늬 긴 그릇으로.


제 각자의 모양대로, 제 색깔대로 굳어져 나올 운명을 지니고서.



"이제 받으시기까지, 한 달 정도 시간이 걸릴 거예요.

건조시키고 말리는 시간이 필요하고, 불에 들어갈 거거든요.

높은 온도에서 구워내는 초벌구이 후에, 다시 약을 바르고 더 높은 온도에서 재벌구이까지.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시간이 꽤 걸리죠^^


한 달 뒤에 작품 나오면 문자로 안내드릴게요. 그때 찾으러 오세요"


어쩌다 손에 묻어난 점토가 수분기 없이 딱딱하게 굳은 것이 익숙해져갈 때 즈음, 셋의 작업이 거의 동시에 마무리가 되었다.


우리들 손에 의해, 단정한 꾸밈을 마친 도자기.


우아한 자태를 뽐낼 줄 알았으나, 그러나 그것은 완성체가 아니었다.

반죽거리 운명에서 겨우 벗어난 정도, 미완의 인생이랄까. 그릇 가게에서처럼 그 자리에서 즉시 집으로 데려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이들은 제 몸에 있는 수분기를 완전히 털어내고 뜨거운 불속으로 들어가야 한단다.


그래야만 단단한 밀도가 생겨 그릇 역할을 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새겨 넣고 그려 넣은 갖가지 빛깔과 그림들이 선명한 색깔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우리만의 도자기를 위해선, 한 달 뒤를 기약해야 하는 거였다.


또다시 기다림의 시간.

앞치마를 두른 순간부터, 마지막 붓 터치를 끝낸 순간까지. 그리고 두 손에 우리의 작품이 올려질 그 순간까지. 기다림이 아닌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흙이 그릇이 되기까지의 과정에는, 기다림이 아닌 순간이 없다는 것을.



살펴보면 이것은, 우리 삶의 이야기다.


흙이 그릇이 되는 과정이 이렇다면 한 인간이 온전한 자신으로 피어나는 과정은 얼마나 더 깊고 신비로운 여정일까마는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기다림의 가치만큼은 우리 삶에 충분히 끌어올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면 우리 삶에 어디, 그냥 되는 일이 있었던가.


빠르게 닿은 일들은, 빠르게 무너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저절로 된 것 같은 일도 그 속을 헤집어보면, 그 일이 '된 일'이 되기 위해 걸었던 길고 섬세한 첫 발이 숨겨져 있었다.


모든 물기가 다 빠져나가는 듯한 메마른 날들과 온 삶을 태워버릴 듯한 뜨거운 불속의 날들이 어리어 있었다.


어떤 일을 되게 하기 위하여, 무언가가 되기 위하여, 어떤 곳에 도달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저,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 삶에서 기다림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이란 실은 거의, 없는 것이다.


열정으로 치대어야 하는 시간들

매끄럽게 다듬고 정교하게 갈고닦아야 하는 시간들

나만의 색깔을 아로새겨야 하는 시간들

고요히 나의 모든 온당치 않은 것들을 빼내는 시간들

뜨거운 불을 지나 나로서 단단히 굳어지는 시간들


이 중에, 단 하나라도 건너띌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것인가.

삶이란 결국 나로서 천천히 굳어가며, 그 누구와도 같지 않은 내 색깔을 입는 것과 같은 것일진대.



'작품이 완성되었습니다. O월 O일 (O요일) 찾으러 오세요'


한 달 후, 다시 찾게 된 공방. 선생님이 진열함에서 우리 작품을 꺼내어 주셨다.


생기있게 웃고 있는 고양이 꽁이 그릇

연한 분홍빛으로 은은히 무광의 빛을 발하고 있는 그릇

선명한 녹색의 풀잎이 속속들이 박혀 있는 그릇


분명 같은 점토에서 시작되었으나.

각각의 모습과 색깔로 뜨거운 불과 질긴 시간을 견디어낸 도자기들은 같은 형태, 같은 질감, 같은 빛깔로 된 것이, 단 하나도 없다.



그 어느 것과도 같지 않은. 그 누구와도 같지 않은 나로서의 존재.


화려한 것은 화려한 대로.

수수한 것은 수수한 대로.

은은한 것은 은은한 대로.

섯섯한 것은 섯섯한 대로.



가장 나다운 형태를 찾은 존재

나스러운 빛깔을 내는 존재로 존재하는 것..


'사람의 손길과 불, 물과 공기, 자연의 숨이 닿은 흙은, 오랜 '시간'이라는 것과 맞물려 어떠한 존재가 되는가'에 대해 누군가 묻는다면..


나의 결론은, 이것이다.



* [하날빛의 글 정원]

글로 이끈 삶을, 글로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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