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계절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

by 하날빛


계절이 바뀐다는 건 아무래도, 그것이 품은 수(水)의 기운과 관계가 깊은 듯하다. 그 농도가 짙어지느냐, 옅어지느냐.


지금 어떤 계절을 살고 있는가는 바람의 온도, 그리고 '물기(氣)'를 얼마나 느낄 수 있느냐'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메마른 바람이 얼굴을 스쳐왔다.

잠깐의 흩날림에도 피부가 빳빳해지는 갈증을 느끼는, 그런 바람.

바람 속에 바짝 탈수된 공기가, 이 계절을 실감 나게 하는구나 싶다.


자전거를 타는 중이다.

단풍으로 물든 넓은 공원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 식구가 달린다. 속도를 올릴수록, 마주 불어오는 바짝 마른 바람이 진하게 스며들었다 지나간다.


뜨습한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은 무더위의 하늘과는 달리, 청량하지만 도도하게 높아진 하늘에서도 가을의 건조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런 가을 하늘을 좋아하지만 그 메마름 때문인지 선뜻 다가갈 수 없는 거리를 느낀다.

불그스름하게 낯을 붉히며 제 생애 가장 아름다운 붉은빛을 내던 나뭇잎도, 차가운 공기에 닿으면 바싹 말라 가게 되는 모양이다.


가지 끝에 간신히 붙어있는 것들.

말라가다 못해 으스러질 듯 구멍이 나기 시작한 것들.

그러다 푸석하고 생기 없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버려진 것들.


관록의 영광으로 빛나던 청록의 때가, 이들도 그리울까.

윤기도, 생기도 잃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는 것들. 물기(氣)를 잃은 이들이 미안하고 가엾다. 부지런히도 팔랑이던 제 잎을 모두 잃고 벌거벗은 나무, 황량이 바람을 맞고 선 나뭇가지들도.


윤기를 잃은 모든 것들이 그다음 찾아올 마지막 계절을 기다리고 있었다.


슬프도록 아름답게.



깊어져 가는 가을 풍경은 삶을 떠오르게 한다.


삶의, 계절.


아스라이 차오르는 생의 첫 기척, 한없이 순수한 희망으로 피어나는 계절. 삶의 봄은 그렇게 시작되지 않는가.


수분을 가득 품은 뜨거운 숨결이 대지를 덮는 계절, 빛과 열기가 정점에 다다라 자신을 불태우듯 살아내는 청춘을 지나면 붉게 무르익으며 결실을 품는 계절이 오게 되어있다. 풍요와 충만함으로 채워지는 그 계절이.


그리고 그 끝에서 삶은 서서히, 물기를 털어낸다. 잎맥마다 스며있던 생의 물기가 빠져나가고 빛나던 생의 샘물은 말라간다. 불어오는 바람 하나에도 흩어지는 숨을 마주하면서.



삶의, 계절.


오늘 아침 친정을 나서며 힘 있게 안아드렸던 아버지를 생각한다. 한 품에 나를 안았을 그 가슴을 이제는 내가 안아드린다. 크게만 생각되었던 그 단단한 몸이 작은 내 양 팔에 넉넉히 들어온다는 건, 시간의 슬픔, 계절의 쓰린 아픔이 아닌가.

피부 아래를 채웠던 살과 근육이 언제 그 안에 있었냐는 듯, 이제는 헐렁거리는 피부 가죽이 언제 벗겨져도 이상하지 않을 파리한 몸은 바닥에 바스러지듯 떨구어진 구멍 난 낙엽들, 혹은 벌거벗은 채 삭막하게 서 있던 나무와 꼭 닮아있다. 마지막 계절을 기다리는 것들과.


그것이 계절의 일, 시간의 일이고 삶의 일인 것이겠지.



딸아이가 페달을 힘껏 밟는다.

뒤뚱거리다가 여러 차례 넘어지기를 반복하던 것이 이제 제법 균형을 잘 잡기 시작한다. 자신 있게 앞을 보고 달리며 가끔 멀리 가을 풍경을 바라보는 여유도 누린다. 빠르게도 달렸다가 느리게도 달렸다가, 제 마음대로 속도까지 조절한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불어오는 바람 한가운데를 뚫고 간다. 아랑곳 않는 기세를 가지고.


오늘 딸아이는 그렇게, 네 발 자전거 보조 바퀴를 떼고 두 발 자전거에 완전히 들어섰다. 자전거 타기를 다 마치고 내린 딸아이를 힘 있게 안는다. 내 한 품에 들어오는 아이를 안고 있자니 보송하고 생생한 피부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오늘 아침 양 팔 가득 안았던 아버지에게도 전해진 건, 아마도 이러한 나의 온기였으리라.



계절은 순환한다. 가고, 또다시 돌아온다.

물기를 잃어 바스러진 낙엽이 대지에 스며들어 다음 생명의 자양분이 되는 것은 자연의 신비. 신의 섭리.

벌거벗은 나뭇가지는 황량한 그 계절에도 다시, 새순을 틔울 준비를 한다.


나는 오늘 내 한 품에 들어온, 두 존재를 떠올린다.

나를 품어주었던 한 생의 품과, 내가 품어야 할 또 한 생의 품.

수분을 모두 잃어가는 하나의 생과 그 기운으로 가득 찬 또 하나의 생.

마른 낙엽의 잎맥처럼 도드라진, 흐물거리는 손등의 선명한 보랏빛 혈관과 여름날의 복숭아처럼 탱글하고 고운 도톰한 뺨을.


가을을 지나 겨울로, 봄을 지나 여름으로 달려가는 두 계절의 흐름 사이에, 나는 서 있는 것이 아닐까. 하나의 세월에서 흘러나온 생의 물기를 또 다른 하나의 생으로 흐르게 하기 위하여.


또 한 번 얼굴로 스며드는 바람을 맞는다. 목마름으로 갈한 바람.

그러나 나는 그 속에서 머지않아 다시 불어올 촉촉한 온기의 봄바람, 그 기운을 희미하게나마 희망해 본다. 가을, 그리고 겨울이 다음 계절에게 건네는 생의 악수를, 생의 흐름을.


꺼져가는 것과 타올라 가는 것.

잃어가는 것과 차올라 가는 것.

메말라 가는 것과 윤 해져 가는 것.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생의 계절들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라본다.


스러짐과 움트음.

시듦과 피어남.

저묾과 떠오름이 반복되는 이 길고 긴 여정을. 삶이라 부르는 이 신비로운 계절이 추는 순환의 춤을.


그렇게 계절은 가고 돌아오며,

우리의 삶도 지고 피며 이어지는 것임을 생각하며.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