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세대
새벽같이 김포를 출발해 간사이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리무진을 타고 간 오사카 우메다 호텔에 우선 짐을 맡기고 가벼운 점심을 위해 미리 찾아둔 소바전문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법 쌀쌀한 날씨에도 우메다역을 중심으로 새 단장한 한큐백화점, 다이마루백화점, 한신백화점등 주변인도에는 파도처럼 밀려다니는 인파로 가득했다.
시장조사 명목으로 자주 찾은 오사카를 일이 아닌 가족여행으로 오랜만에 다시 방문하니 새삼 낯설고 살짝 설렘도 있다. 장성해 가는 딸들이 함께해 주니 뭔가 가슴이 꽉 찬듯한 느낌이다.
어떤 목적을 갖느냐에 따라 같은 장소도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여행의 맛이 아닌가.
역시나 이번 여행일정의 중요한 숙소는 아내가 잡았다. 나머진 나와 딸들 몫이다.
때마침 일본중서부 이시카와현에서 지속적인 지진이 발생하여 피해자가 생겼다는 보도에 이번 여행지가 안전상 적절한지 조심스레 기사들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섬반대편 상황이라 안전상 큰 영향이 없으리라 판단되었다.
사람, 사람, 사람들…
우메다-신사이바시-난바, 밤이고 낮이고 어딜 가도 파도치듯 밀려드는 사람의 물결, 번화한 오사카도심을 예상은 했었지만 밀려다니는 인파에 연신 감탄을 토해낸다.
다음날 아침 일찍 도망치듯 북적되던 오사카시내를 벗어나 버스로 한 시간 거리의 고베 아리마온센으로 향했다. 일본의 3대 온천지중 하나라는데, 딸들에게 오사카역사를 얘기해주다 보니 임진왜란을 빼놓을 수없었다. 참 떼려야 뗄 수 없는 어려운 역사적 관계의 한일 두나라이다.
역시 번잡한 도시보다는 한적한 전통마을이 가족여행으로는 제격이다. 아내덕에 호사를 누려본다.
아리마온센에도 외국관광객 외에 일본젊은이들이 의외로 많이 보인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시끌벅적 큰소리로 대화하는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새로운 시대, 변화의 주역인 MZ세대의 모습을 이곳 일본에서도 발견한다. 얼핏 중국관광객인 줄 착각할 정도였으니 앞으론 조용한 일본인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다.
구글맵을 보면서 찾아간 료칸은 다케테리토리마루야마, 대나무숲을 차지한 정자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 막 들어선 입구 한쪽면에 걸려있는 독특한 일본화가 시선을 사로잡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였다. 대나무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과 미끄러지듯 길게 머리채를 날리는 여인의 뒷모습이 멋지게 어우러져 아주 매혹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아마도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나 소설적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낸 것이리라.
각 온천탕을 프라이빗하게 예약제로 운영하는데, 4개의 야외온천탕과 2개의 실내온천탕이 주변경관과 잘 어울려져 단출하게 꾸며져 있다. 맑고 차가운 밤하늘아래 조용히 흐르는 물소리와 더불어 평화로이 온천을 즐기는 것도 어느새 익숙해져 버렸다.
고마운 일이다.
하룻밤 휴식이 다사다난했던 지난 일 년간의 여독을 풀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리마온센 마을 자그마한 상점 안 한가운데를 차지한 황금여의주를 문 황룡,
모두들 원하는 바를 이루며 풍요롭고 보람된 새해가 되길 희망한다.
떠나는 일요일 아침 신사이바시역 근처 브런치집을 찾았다. 어딜 가도 20-30분 웨이팅은 기본이다. 신선한 샌드위치에 약한 산미감과 묵직한 바디감의 커피맛이 변하는 일본과 잘 어울린다고 느껴졌다.
짧은 3박 4일 일정이었지만 활기차게 변하고 있는 일본 젊은이들을 보면서 한일 양국의 긍정적인 미래를 그려보았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단지 변하는 것을 쉽게 감지하지 못할 뿐이다.
변한 것을 알아차렸을 땐 이미 이전과 다른 것이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변화를 느끼는 자신도 늘 변하고 있질 않은가!
이런 소소한 변화를 알아차리며 사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뒤돌아서서 여운이 남는 작품은 좋은 작품이다.
입구에 걸렸던 일본화 감상을 빼먹고 끝내기엔 너무 아쉬움이 크다.
화면 중앙에 자리한 여인의 검은 머리 옆 살짝 비친 옆얼굴은 그녀의 신비로운 사연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 숨은 사연을 뿌리치듯 강렬하게 그려진 검은 머리채는 그녀와 함께 보는 이마저도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도록 유혹한다. 여인의 좌측에는 굵직하고 시원스럽게 자란 대나무숲이 세월을 말해주고 날아갈 듯 뻗어나간 나뭇가지의 크고 작은 잎들이 바람결에 바스스 소리 내며 속삭이는 것 같다. 만발한 꽃은 그 향기를 꽃밭 가득 채우고 그 사이 나비가 춤추듯 펄럭이는 기모노자락은 그녀의 화려했던 삶을 엿보는 것 같다. 한 폭의 그림에서 아련한 신비감과 함께 숲 속 여인과 꽃향기, 대나뭇잎 스치는 바람소리, 손에 잡힐 듯 가까이 그려진 머릿결등 오감을 울리는 멋진 작품이다. 더욱이 화려한 배경의 모든 색을 압도하며 휘갈겨진 여인의 검은 머리채는 쏜살처럼 흘러가는 삶의 덧없음, 매 순간 소중했던 기억들도 가벼이 뒤로하고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삶의 진실함이 느껴진다.
마치 어느 선승의 붓글씨 같은 묵직함과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한 폭의 그림을 소재로 써 내려간 ‘기사단장 죽이기’ 장편소설을 떠올리게도 하는 숨은 이야기 가득한 그림이다.
오랜만에 두고두고 감상하게 되는 작품을 접했다.
우리 삶도 스쳐가듯 흘러가는 바람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