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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방스

2025 프랑스여행기

by 바 람

인상파화가들의 작품이 없었더라면 프랑스에 대한 동경이 그렇게 컸을까 하는 의구심이 문득 든다. 그들 눈에 비친 빛으로 가득 찬 프랑스의 자연은 언제나 궁금한 대상이었다. 8월의 뜨거운 여름이나 1,2월 추운 계절의 프랑스는 늘 그런 기대와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큰 마음먹고 떠난 6월, 라벤더를 보기엔 조금 이른 시기였지만 요즘 같은 온난화시대에 기후를 예측할 수 없으니 운이 좋다면 볼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반 섞인 마음으로 출발했다.


세낭크 수도원(Abbaye Notre Dame de Senanque)

매년 프로방스지방에 장기적으로 머물며 여행을 즐기는 사촌처제부부의 안내에 따라 고르드 근처 산꼭대기에 위치한 세낭크 수도원(Abbaye Notre Dame de Senanque)으로 갔다. 살짝 이른 감이 있지만 고풍스러운 수도원과 수도원이 운영하는 유명한 라벤더밭, 그리고 고르드까지 같이 볼 수 있는 곳이라 우선 선택했으리라. 굽이굽이 마치 대관령을 오르는 듯 산을 타고 폐장시간 가까이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수도원은 늦은 오후 햇살에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산등성이를 가득 채운 라벤더밭은 아쉽게도 작은 꽃망울만 가득하였다. 지대가 높기도 하고 아직은 철이 조금 빨랐나 보다.


고르드(Gordes)

워낙 여행을 좋아하는 부부라 수년동안 남부프랑스 구석구석 아름답다는 마을들을 찾아 샅샅이 돌아다녔을 것이다. 이번 여행은 그렇게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Les Plus Beaux Villages de France)로 선정된 곳 중심으로 여행할 계획이다. 살짝 아쉬웠던 수도원 라벤더밭을 뒤로하고 찾은 고르드(Gordes) 마을은 초창기에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될 정도로 절벽 위 마을의 전경은 뛰어났다. 골목사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경치나 고풍스러운 건물에 새겨진 듯 아기자기한 상점들과 카페들 구경하는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유명세만큼 가이드가 이끄는 단체여행객들의 모습도 진풍경이다. 피곤한 다리도 쉴 겸 느지막이 찾아간 카페에 마침 자리를 잡고 앉아 주문을 하려는데, 동서가 그냥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한다. 프런트의 주인이 그들의 언어로 중국사람들은 지겹다고 하면서 더는 안 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 중 프랑스어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들으라고 한 건지는 모르겠다. 그들 눈에는 동양인이면 중국인으로 보이나 보다. 문득 요즘 한국도 어딜 가나 마주치는 중국인들이 떠오른다. 조용조용한 분들도 있지만 목소리가 큰 분들도 많다. 어느 정도 공감도 가지만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아무래도 조심해야 할 일이다. 좋은 경치도 무심히 던진 말 한마디에 오점을 남기니 말이다.

루르마랭성(Chateau de Lourmarin) 7일장

프로방스 여행의 숙소는 파리에서 남쪽으로 3시간 정도 TGV를 타고 아비뇽역에 내려서 차로 한 시간 정도 간 위치의 말르모흐(Mallemort)라는 작은 마을로 정했다. 주변의 작은 마을들을 방문하기 적절한 곳이라 한다. 다행히 성수기 시작 전이라 숙소를 구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현지인과 함께가 아니라면 좀처럼 맛보기 어려운 여유로운 프랑스 휴가가 벌써 기대된다. 말르모흐에서 20분 정도 차로 가면 루르마랭성(Chateau de Lurumarin) 마을이 나온다. 이곳도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된 곳이다. 매주금요일에 장이 서는데, 어디서 사람들이 다 몰려온 것인지 한가하던 마을이 사람들로 가득하다. 싱싱한 현지 채소나 과일, 도자기, 미술품, 옷가지 등등 다양한 상품들이 가득하여 생기가 넘친다. 이후에도 다른 마을의 장들을 짬짬이 찾아가 봤지만 이만한 곳이 없었다.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 시계탑(Tour de l'Horloge)

살롱드프로방스(Salon-de-Provence) 노스트라다무스 조각상

라코스트성(Chateau de Lacoste) 축제

처제부부는 쉴틈이 없다. 귀한 시간 함께 알차게 보내야 한다고 아침저녁으로 주변 마을들 방문일정이 빡빡하다. 너른 품의 언니에 대한 애정 어린 마음이 모든 행동에서 잔잔하게 전해진다. 때마침 뉴욕에서 마르세유로 도착한 딸들을 픽업하면서 방문한 라코스트성에선 지역관악기경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낯선 이방인 가족을 뜨겁게 환영하는 깜짝 축제 같아 신나는 음악에 맞춰 덩달아 크게 웃고 떠들며 한껏 즐긴다. Ai시대에 이렇게 사람 냄새나는 전통을 누리고 사는 삶이 한편 부럽기도 했다.


레보드프로방스(Les Baux de Provence) 레보성(Chateau des Baux)

한 때는 강력했던 보(Baux)가문의 성이 덩그라니 성터만 남아있다.
생뱅상성당(Eglise Saint Vincent, 성빈첸시오성당)과 샤를 리유(Charles Rieu,목동들의 전통과 삶을 노래했던 20세기 시인이자 가수)의 조각상

산꼭대기 레보성 마을에는 생뱅상성당(Sait Vincent Church)을 중심으로 2개의 예배당이 더 있다. 폐허가 되어있는 레보성의 흔적을 보면서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기도가 필요했던 것일까 상상해 본다. 정상을 향해 오르는 길에는 하얗게 빛나는 유난히 크고 두꺼운 벽들로 이루어진 요새 같은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다. 그 길을 따라 한참 걸어 올라 도착한 정상은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몸조차 가누기 어려웠다.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답게 사방을 한눈에 멀리까지 내려다볼 수 있는 광활한 곳이었다. 두터운 벽과 폐허가 된 성터는 험한 세월을 딛고 수백 년을 살아낸 그들의 삶에 굳게 새겨져 있으리라.

이곳은 워낙 역사적 유물과 함께 작은 갤러리, 다양한 상점등 볼거리가 많은 곳으로 유명해 처제부부는 여러 번 찾은 곳이라고 한다. 덕분에 이 마을에서 가장 좋은 전망을 갖고 있는 식당의 중심자리에 앉아 남부프랑스 음식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파리의 음식과는 달리 푸짐하고 풍미가 깊다. 현지인들과 그들의 말로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일행 중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여행을 편하게 만드는지 새삼 고맙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참 고맙다.


빛의 채석장(Carrieres de Lumieres)

이곳에서 제주에 있는 '빛의 벙커'에서 봤던 3차원 대형 빔 프로젝트전시의 원류를 본다. 해저광케이블 관리하던 콘크리트 벙커나 채석장으로 쓰던 공간을 사용했다는 것 모두 재활용되는 거대한 공간을 활용한 컴퓨터그래픽 빔 프로젝트전시라는 점에는 공통점이 있지만 ‘빛의 채석장'(Carrieres de Lumieres)은 커다란 석회암 덩어리를 쪼개 떼어낸 거친 면과 일정치 않은 바닥면을 따라 깊고 드높은 구조의 광활한 규모가 주는 웅대함은 인위적인 공간이 아닌 우주의 어느 행성을 탐험하는 듯한 상상을 하게 해 준다. 채석장 내 깊은 어둠 속에서 코끝과 피부에 스치는 서늘한 공기, 비정형적인 벽면을 타고 움직이는 영상과 함께 사방 가득히 울려 퍼지는 음악은 비현실적인 공간감에 몰입하게 만든다. 참 창의적인 발상이다. 몇몇 천재들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또 더불어 먹고산다.


샤또라코스트(Chateau la Coste) 야외미술관

루이즈 부르주아의 대표작'Mama(엄마)"
장 밥티스트 파트의 "다섯마리 여우"와 리처드 세라의 "Aix"
60만평 규모의 포도밭(와이너리)
루이즈 부르주아의 "I Do, I undo, I Redo"
야외미술관 옆 노천카페도 미술관의 영감을 받은듯 세련됬다

말르모흐에서 1시간 반쯤 한적한 시골길을 드라이브를 해서 도착한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 지역의 샤또라코스트(Chateau La Coste) 야외미술관은 2백만 평방미터(약 60만 평)의 포도밭을 안도다다오가 전체적인 마스터플랜과 함께 입구와 아트센터, 옛 예배당등을 설계하여 만든 복합예술공간이다. 루이즈 부르주아, 리처드 세라, 프랭크 게리, 장 밥티스트 파트등의 작품들이 야외산책길을 따라 곳곳에 숨겨둔 듯 전시되어 있다. 자연과 예술에 섞여 서로 놀듯이 사진을 찍어주며 산책하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한창 배고플 시간이다. 마침맞게 자리 잡은 아트센터 내 레스토랑에서는 일곱 명의 대가족수 덕에 메뉴판에 있는 모든 메인메뉴를 시킬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얻었다. 훤칠한 미남들의 친절한 서빙과 함께 유명세프들이 요리해 온 각 메뉴의 접시들은 역시 남부답게 모든 재료가 신선하고 풍성하면서 그윽한 깊이가 느껴지는 맛이었다. 모두들 이번 여행에서 최고의 맛을 선사한 곳이라며 연신 감탄을 쏟아내면서 엄지를 치켜세운다. 아내도 이 정도라면 주변 지인들에게 추천하고 싶다며 즐거워한다. 멋진 야외파티였다.


까시스(Cassis) 해변

이곳까지 왔으니 지중해에 몸은 담그고는 가야 한다며 찾아간 까시스해변은 고급휴양지답게 먼지하나 없이 타일처럼 반짝이는 대리석도로에 해변을 끼고 동그랗게 펼쳐진 노천카페들이 한가로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작은 해변이 주는 아늑한 매력이다. 성수기 휴가철에는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라며 현지의 프랑스사람들도 이곳의 비싼 물가에 쉽게 휴가를 즐기기 어려운 곳 중 하나라고 하니 참 아이러니하다. 좀처럼 바닷물에 몸을 적시지 않는 아내도 오랜만에 딸들과 함께 아이들처럼 물장구치며 즐거워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간의 노고가 따사로운 햇살아래 적셔지는 지중해 바닷물로 깨끗이 씻어지길 바란다.


발랑솔(Valensole) 라벤더평원

드디어 라벤더평원으로 간다. 가능한 최대한 늦게 방문하여 조금이라도 더 피어난 꽃들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나름 세심하게 안배한 일정이었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푸른 하늘과 흰구름 아래 펼쳐진 사방 가득한 보랏빛 향연에 감탄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아직 덜 핀 라벤더밭도 있지만 대부분 보랏빛 꽃잎을 피우고 있었다. 온몸에 라벤더향이 베인다. 6월 중순에 라벤더 잔치라니! 너무 운이 좋았다.

어떻게든 사진에 담아보려 셔터를 눌러대지만 미천한 사진실력으로는 도저히 담기가 어렵다.


광활하게 펼쳐진 또 다른 평원에서는 처음 접하는 야생라벤더가 가득하다. 농장에서 키우는 라벤더색상보다 약간 연한 붉은빛을 띠고 있는 야생라벤더는 거친 듯하면서도 부드럽게 여러 색감이 섞여있는 자연스러운 멋이 있다.

핑크빛 보라의 은은한 색감은 해 질 녘 노을빛 아래서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한껏 라벤더에 배부르게 취하고 나니 이제 남부 프로방스 어디라도 가볍고 편안한 마음으로 갈 수 있겠다.

더욱이 다음 장소는 아름다운 마을 무스띠에 라니 기대가 커진다.


무스띠에(Moustiers Sainte Marie)

무스띠에 마을 두 절벽사이에는 황금빛 별이 빛나고 있다. 전쟁 속에서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의지해온 신앙의 상징으로 만들게 된 별이야기가 전설같이 전해진다. 마을을 지나 절벽 꼭대기에 있는 노트르담 드 보부아르예배당(Chapelle Notre-Dame de Beauvoir)을 향한 가파른 계단은 예수님이 걸었던 십자가의 길(Chemin de Croix)을 재현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참배해서인지 석회암 돌계단이 반짝거릴 정도로 닳아있다. 미끄러질까 조심스럽게 챙겨주는 딸들과 함께 한 발씩 내딛는 발걸음 속에서 나도 모르게 경건해진다.

프로방스지방의 마을은 주변의 돌들을 그대로 사용해서인지 자연과 하나 되어있는 느낌이다. 지붕의 오렌지빛도 색이 바래 거의 바위색상과 비슷하다. 산인지 마을인지 얼핏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과 잘 어우러져 있다. 그리고 어딜 가나 참 깨끗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 땅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그 속에 녹아들어 함께 살아온 삶의 모습이고 태도가 아닐까 싶다.


베르동협곡(Gorges du Verdon)과 생트크루아호수(Lac de Sainte-Croix)

이미 방송으로 유명해진 베르동협곡(Gorges du Verdon)은 조금 늦게 도착해서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야외활동은 할 수가 없었다. 수백만 년 동안 석회암협곡을 깎아낸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베르동강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려는 순간, 부득불 꼭 강에 발이라도 담그고 가야 한다는 에너지 넘치는 처제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럿이 함께 하는 여행의 즐거움이다. 깎아질 듯 높이 솟은 석회암절벽은 유럽의 그랜드캐년이라고 하는데, 이미 라벤더평원에 한껏 취한 덕에 막상 그 정도의 감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막내는 이번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은 곳이 바로 이 베르동협곡이었다고 하니 이 또한 여행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이제 말르모흐 숙소에서 파리로 돌아간다. 숙소 정원에도 라벤더가 활짝 피었다.

벌써 한낮의 온도는 40도에 가깝게 오르락내리락거리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맑고 푸른 하늘과 강렬한 태양아래의 쉽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준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인상파화가들이 봐왔던 그 빛, 그들은 그들의 눈에 비친 것들을 그렸고 그 빛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들 또한 아름답다.




<참고정보>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Les Plus Beaux Villages de France)'은 프랑스의 소규모 마을들이 역사적, 문화적 유산을 보존하고 관광을 활성화하기 위해 설립된 민간 협회이다.

• 1982년, 당시 콜롱주라루즈(Collonges-la-Rouge)의 시장이었던 자크 시라크가 설립하여 프랑스 시골 마을들의 급격한 인구 감소와 생활 방식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하여 고유의 유산과 건축물을 보존하고, 지역 특색을 살려 관광 자원으로 활용함으로써 마을의 가치를 지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 협회는 매우 엄격한 기준에 따라 마을을 심사하며, 신청하는 마을 중 평균 20% 미만이 선정될 정도로 까다로운데 주요 기준은 아래와 같다.

• 인구 2,000명 이하의 소규모 마을일 것.

• 최소 2개 이상의 역사적 기념물이나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을 것.

• 마을 주민과 지방 정부의 적극적인 유산 보존 의지가 있을 것.

• 마을의 미적, 건축적 조화가 뛰어나고 경관이 아름다울 것.

• 현재 현황: 현재(2025년 9월 기준) 프랑스 전역에 걸쳐 174개의 마을이 이 목록에 등재

이 협회는 단순히 아름다운 마을을 선정하는 것을 넘어, 마을의 역사와 정체성을 보존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도모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함.


고르드(Gordes): 1982년에 선정. 협회 창립 초기부터 등재된 가장 유명한 마을 중 하나

루르마랭(Lourmarin): 1990년에 선정

라코스테(Lacoste): 1997년에 선정

레보드프로방스(Les Baux-de-Provence): 1983년에 선정

무스띠에 생트마리(Moustiers-Sainte-Marie): 협회 창립이전 1981년 초안에 등재된 초기 멤버

(이상은 Ai검색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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