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민과 나의 가장 큰 공통점은 영화다. 영화를 좋아하고 즐겨본다는 점. 좋아하는 장르가 비슷하다는 것. 서로의 추천 영화를 스스럼없이 흡수한다는 점. 내게는 그 단 하나의 공통점이 매우 매력적이었다.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단점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었다.
지민이 추천한 영화는 보고 나면 와, 정말 재밌다거나 마음에 와닿거나 공감이 됐다. 짐 자무쉬 감독을 안다는 사실이 '알고 보니 우리는 매우 비슷한 부류의 인간'이라는 동질감을 불러왔고 좋아하는 영화를 읊으며 서로에게 추천하기 시작했다. 지민은 특히 좋아하는 감독들의 모든 영화를 줄줄이 꿰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민은 특정 취향을 친구에게 강요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저 솔직한 소감을 말했는데 소감에는 스토리텔링의 강약점이 모두 들어 있었다. 강하게 추천하는 영화는 약점보다 강점의 비중이 좀 높았을 뿐, 아무리 좋아하는 최애 영화라도 약점을 꼭 얘기했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담백한 추천 스타일이 신뢰가 갔다. 당시에 우리는 누가 더 희귀한 예술가를 많이 알고 있나, 누가 더 많이 보거나 읽었나를 모종의 경쟁처럼 생각하는 예대에 다니고 있었는데, 둘 사이엔 그런 경쟁 없이 오로지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 존재했다. 한편으로는 구김 없이 밝고 솔직하고 한 가지에 꽂히면 오롯이 그것만 파고드는 지민의 개성에 반했던 것 같다.
그렇게 영화에서 피어난 유대감의 유통기한은 대학 졸업 때까지였다. 관객을 잃고 철거된 영화관처럼 우리 사이의 유대감은 각자가 사회생활을 하며 좌충우돌하는 사이 어느샌가 허물어져 버렸다. 지금은 그런 게 있었나? 그랬나? 하는 단편적인 기억만 남았고, 둘 다 그때 얘기는 꺼내지 않는다. 둘이 도서관 구석에서 헤드셋을 끼고 감상하던 흑백영화나 학보사에 한껏 멋 부려 써서 투고한 영화 비평 원고는 마치 전생의 일처럼 희미해졌다.
어쩌면 누가 먼저 말하지 않는지 모종의 게임 중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입 밖에 꺼내어 얘기하면 그때의 추억뿐만 아니라 둘 중 하나가 영영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우리는 아무도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는다. 입 밖으로 내진 않지만 나는 잘 알고 있다. 아마 지민도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그때의 감성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아주 희귀한 것이란 걸.
어떤 영화 스토리도 간단명료하게 강약점으로 요약해 말하던 그 애는 요즘 나사가 하나 풀린 것 같다. 사실 나사가 풀린 건 오래전부터다. 그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새벽 네 시의 지민은 일이 너무 힘들다며 울면서 전화했다.
"일이 끝이 없어."
밑도 끝도 없이 지민은 그 말부터 했다.
"아직 퇴근 안 했어?"
그 말에 지민은 한참을 흐느꼈다.
"너무 짜증 나."
우는 목소리에 발음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지민은 애써 힘주어 말했다.
"너무너무 짜증 나."
새벽 네 시였다. 당시 나도 신입이었다. 서로 피곤한 생활인건 피차일반 아닌가. 나도 너무 피곤해. 끊을게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지민이 다시 평소의 또렷한 발음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촬영 때 쓸 소품을 만들고 있는데 일이 끝이 없어. 이걸 다 6시까지 완성할 수 있을까?"
새벽 6시 반에 방송국 앞에서 집합해 촬영 장소로 출발한다고 했다.
"FD 만 있어도 한결 나은데..."
지민은 방송국 조연출이었다. FD가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신경 쓸 일이 더 많아졌다고 했다. 촬영 하루 전에 장면이 추가되면서 소품도 급하게 만들게 됐는데, 일손은 모자라고, 6시에는 방송국 지하 매점에서 주문해 놓은 김밥 60인분과 물도 챙겨야 한다고 했다.
나는 묵묵히 들었다. 듣는 것 외엔 별다른 할 말이 없었다. 지민은 오늘 어떤 일정이 있는지 줄줄 읊었다. 노랗게 염색한 머리를 정수리에 한껏 틀어 올린 채 창백한 사무실 불빛 아래서 지점토로 소품을 만드는 지민이 떠올랐다. 60인분의 김밥과 물을 챙기고 모든 준비물이 제대로 차에 실렸는지 확인하고, 늦는 사람에겐 전화로 상황을 확인하고 그럼에도 뭔가를 놓쳤을 것 같아서 손에 말아쥔 종이를 펴서 다시 한번 점검하는 지민의 모습을. 차가 덜컹대며 출발하면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종종 차가 흔들리기라도 하면 차창에 머리를 연신 찧으면서도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는 지민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진짜 이번 촬영만 하고 그만둘 거야.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 정말."
통화의 마지막 멘트는 지민의 18번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 정말.
그 말을 달고 살던 지민은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직업을 바꿀수록 지민의 나사는 더더욱 풀리면 풀렸지, 예전의 영민함이 되돌아 오진 않았다. 뭐랄까, 지민이 깊이 파고드는 그 대상이 오래전에는 영화나 음악이었다면 사회인이 된 이후에는 점집이나 사주, 타로집이었다. 가끔 요즘 인기 있다는 특정 웹툰이나 드라마 시리즈에 빠져 있기도 했지만 그건 오래가지 않았고, 귀여운 물건이나 인형 수집에 열을 올리기도 했지만, 그 모든 게 본인이 원하는 답을 주는 건 아닌 듯했다.
나이가 들수록 지민의 관심사는 자꾸만 미래 전망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것도 객관적인 데이터와 증거에 기반한 게 아니라 직관이나 심리적인 해석에 치중한 점술에 관심을 보였다.
나는 오래전 영민했던 지민이 이미 멸종됐다는 걸 잘 알았지만, 여전히 그때의 지민이 그리웠다. 현재의 지민에게 최고의 영화는 누군가 지민의 미래라며 읊어주는 내용을 들으면서 본인의 미래를 상상해 보는 것.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