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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는 것

by 임이안

그날은 유난히 피곤했다. 두 번은 없다는 말처럼 회사일은 지난달과 이번달에 같은 성격의 업무를 하더라도 매번 다른 피로감을 동반한다. 그동안 나는 일을 열심히 하고 거기서 받는 인정에서 만족을 얻은 것 같다. 요즘 들어 이렇게 열심히 일해도 개인적인 삶의 만족감은 늘 한결같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아등바등 회사일을 한들 개인의 만족감은 한결같이 낮다. 그렇게 한결같을 수 없다.


"그건 내가 유튜브로 타로카드를 보는 것과 똑같지 뭐, 안 그래?"

퇴근하고 지민이 만들었다는 김치찌개를 먹고 있었다.

노랗고 긴 머리카락을 정수리 위로 틀어 올린 지민이 가슴팍에 키티가 크게 그려진 핫핑크색 티셔츠를 입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지민의 머리핀에도 키티의 얼굴이 거대하게 붙어 있어서 지민의 얼굴을 쳐다볼 때마다 자연스레 키티 얼굴에 눈길이 먼저 간다. 키티는 지민이 애정하는 반려동물 같다. 입이 없는 건 친구의 말을 경청하기 위함이라는데, 정말 그렇다. 지민의 반려 캐릭터 키티는 지민의 자유로운 생각과 말을 판단 없이 듣는다. 지민의 방은 이미 꽤 많은 부분이 키티로 도배돼 있다. 키티가 우리 집 거실까지 침범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 생각한다.

지민의 이모가 알려줬다는 레시피로 만든 김치찌개는 재료가 부드럽게 익었고 얼큰하고 따뜻해서 그날의 긴장이 한결 누그러지는 기분이다. 오늘의 피로가 지민이 손수 만든 따뜻한 저녁에 녹아내린 것 같다. 그건 이제 흔적도 없어졌다. 지민에게 고마워서 나는 지민의 뜬금없는 비유를 들어주기로 한다.


"사실 바뀌는 게 없거든. 매일 최선으로 일해도 바뀌는 게 없고, 매일 영상 속 카드를 뽑고 조언을 들어도 바뀌는 게 없어. 이 생활은 변함이 없어. 나이 먹는 거 빼면 말야. 너도 매일 나이만 먹고 있을 뿐이지, 안 그래?"

지민은 나이 든다는 말을 할 때 유독 눈썹을 찌푸린다. 생각만 해도 너무 싫다는 듯한 제스처다.

"특히 생각의 굴레에 갇히면 더더욱 힘들어. 그게 제일 무서운 거야. 그 굴레에선 어떤 것도 의미가 없고 보람도 없고 즐거움도 없거든. 근데 거기서 빠져나오는 법이 있어."

"뭐야?"

"내가 받은 친절을 세어보는 거야."

"친절을 센다고?"

"세는 건 기억하는 거야. 친절에는 사람의 영혼이 깃들어 있거든. 네가 받은 친절을 잊지 않고 기억하면, 그 영혼도 고마워서 거기에 보답을 해줘."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거?"

"그래, 맞아."

지민이 눈을 크게 뜨고 긍정한다.

"내 생각에 친절은 독자적인 영혼을 갖고 있어. 오늘 아침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아래층 할아버지가 먼저 인사를 해주셨거든. 그 웃음과 말소리에 깃든 친절의 영혼이 내게 와닿은 거고, 내가 그걸 기억하면 찰나의 영혼도 꾸준하게 내 안에 긍정적인 기운으로 머물게 돼."

"그러면 우리가 자주 가는 그 빵집 알바생은 정말 친절한데, 그 친절을 기억하면 그 긍정의 기운이 내게로 오는 거야?"

"그렇다니까. 세어보는 건 기억한다는 행위와도 같아. 네가 오늘 어떤 친절을 받았는지 세어봐. 세면서 기억하는 거야. 오늘의 친절에 대해서."

기억을 더듬는 내게 지민은 힌트를 주듯 말했다.

"회사에도 있을 거야. 난 예전 회사에 마주치기만 하면 생글생글 웃으며 인사하는 대리가 있었거든. 요즘 참 드물잖아. 회사란 조직에서 인사란 관습이 사라져 가는 거 알고 있었어? 근데 그렇게 인사하는 사람을 보면 고맙더라고. 안 그래?"

"음, 맞아. 나는 버스 탈 때 기사 아저씨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데 기사 아저씨가 내 인사를 받아주시면 기분이 좋아."

"오래전에 받은 친절도 생각해 봐. 한 번은 몸이 안 좋아서 지하철 역사 제일 끄트머리에 쭈그려 앉아 구토를 했어. 출퇴근 시간대도 아니었고 서울 외곽의 역이라 역사가 꽤 한산했거든. 그 공간에는 정말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말없이 손수건을 건네주던 소녀가 있었어. 체크무늬 교복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물과 손수건을 건네주고, 역무원 아저씨를 불러줬어. 당시에 속도 안 좋고 저혈압으로 오한이 들어서 몸이 정말 힘들었거든. 얼마나 고맙던지. 당시 경황이 없어서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한 게 정말 아쉬워. 그렇지만 지금도 종종 그때 받은 친절이 생각나. 그렇게 도움 받던 그때를 생각하면 말야, 뭔가 부질없네, 보람 없네, 무의미하네 하며 요동치던 잡념이 좀 잠잠해지는 기분이거든.

또 종종 안부를 물어오던 오래전 직장 동료 제이도 있어. 사무실에서 제이는 내 옆자리에 앉았어. 비슷한 시기에 퇴사를 했고, 몇 개월 뒤에 동네 토익 시험장에서 우연히 만난 거야. 그 애는 큰 키에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걸었는데, 고사장에 내걸린 반배정표 앞에 너무나 낯익은 자세의 키 큰 남자애가 서 있는 거야. 나도 모르게 먼저 아는 체를 했거든.

너, 제이니?

이후에 제이와 간간히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늘 제이가 먼저 연락을 해왔어. 먼저 손을 내밀어주는 기분이었지. 제이의 연락을 받으면 왠지 제이가 내민 손을 잡는 기분이었거든.

제이는 안타까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나는 지금도 제이의 인사가 생각나.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연락도 제이가 출장 다녀오면 보자고 했는데 제이는 돌아오지 못했어.

내가 기억하는 제이의 친절은 그 애가 내게 물어보던 일상의 안부야. 다시는 들을 수 없는 안부. 그래서 그만큼 그립고 귀중한 안부.

이렇게 외출했다가 귀가해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건 말야. 다시 돌아와서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다는 건 말야. 얼마나 고맙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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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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