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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언니

by 임이안

그곳은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으로 지역 특산품은 파도였다. 지민과 짧은 여행을 함께한 사촌 언니는 지민보다 서너 살 정도 연상이었다. 어렸을 때는 왕래가 잦았는데 성인이 되면서 한동안 교류가 뜸하다가 지민의 아빠 장례식에서 다시 만나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다고 했다. 다시 교류를 하면서 지민은 그 언니에 대해 꽤 자주 얘기했다. 내가 얻은 단편적인 정보로는 밥을 잘 사주는 언니였다. 언니는 종종 지민을 불러 맛있는 음식을 사줬는데 파인다이닝 위주였다. 한 번은 유명 셰프의 레스토랑에서 열린 이벤트를 다녀온 지민이 흥분된 얼굴로 처음 본 광경에 대해 얘기했다.


"테이블 위에서 춤추는 사람들 본 적 있어?"


레스토랑 오픈 행사였는데 콘셉트는 가면무도회였는지 스태프들 모두 검은 정장에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맞이했다. 안내를 받아 들어간 거대한 홀에는 중세 시대 왕족의 만찬에서나 볼 법한 길고 긴 테이블이 있었다.


"깜깜하게 암전 된 곳에서 테이블 위 조명이 하나둘 켜지고, 가면을 쓴 댄서들이 우르르 나와 춤을 추기 시작하는데 그 모습이 진짜 압권이야.”


타인들과 섞여 테이블에 둘러앉아 현란한 음악과 번쩍이는 조명으로 더욱 화려해 보이는 댄서의 몸놀림에 감탄하는 지민을 상상했다.


"좋은 언니네."


당시 나는 그 언니가 뭐든 좋은 음식이나 분위기를 경험하게끔 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에 혼자 남은 지민에게 그런 언니가 곁에 있는 것도 좋은 일이었다.

이번에 지민은 콘도 거실에서 찍었다는 사진을 보내줬는데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뷰 맛집이었다. 언니와 여행 가기 전 일주일 전부터 뭘 입을지, 뭘 먹을지 수선을 떨던 지민인데 귀가하자마자 그 애는 정수기 옆에 서서 연거푸 물만 들이켰다.


"무슨 일 있어?"


석 잔째 물을 마시던 지민은 배낭에서 말없이 물건 여러 개를 주섬주섬 꺼냈다. 방문한 식당에서 맛있어서 구입한 반찬과 마른 해산물, 지역 특산품, 그 외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디저트 등이었는데 이미 구입할 때마다 카카오톡 메시지로 생중계를 했으므로 뭘 사 왔는지 다 알고 있었다.

물건을 구입할 때만 해도 희희낙락하던 지민인데 형광등 아래의 얼굴은 어딘지 그늘이 져 있다. 우울과 슬픔,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분노의 그림자. 그 색이 낯설었다.

냉장고에서 지민이 좋아하는 포도 주스와 과일잼이 든 쿠키 등을 꺼내 식탁에 올려놓고, 단거 먹을래? 저녁 안 먹고 왔으면 뭐 시켜 먹을까? 아니면 밥 해서 계란말이와 먹을래? 물어봤다. 지민은 대답도 없이 컵에 포도주스를 콸콸 따르더니 주스를 벌컥벌컥 마시고 쿠키 두 개를 한 번에 입에 넣었다.


"있잖아. 가서 언니 잔소리만 듣고 왔어."

지민은 입 안의 과자를 우물대며 얘기를 시작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언니가 직접 운전하면서 운전면허가 없는 지민이를 옆에 태우고 맛있는 해물탕집도 가고, 순두부집도 가고, 여러모로 즐거운 여행을 만들어준 것 같았는데 막판에 다툼이라도 있었나 싶었다.


"언니는 나한테 자기 애한테 하는 것처럼 잔소리를 해. 어젯밤에 언니와 밤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에서 차마셨거든. 내가 회사 그만둔 걸 얘기했더니 돌연 돌변해서 잔소리 폭격을 하는 거야. 거길 왜 그만두냐, 그렇게 살면 돈도 못 모으고 정상적인 생활이 어렵지 않냐. 엄마가 얼마나 걱정하시겠냐. 이제 어린애도 아닌데, 심지어 중년으로 접어드는 나이인데 돈을 모아야지.

나한테 요상한 데 돈 쓰지 말고 저축부터 하라면서 너 지금 퇴직금 축내는 중이니? 묻는 거야. 언제까지 친구 집에 얹혀 살 거냐고."

지민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더 짜증 나는 건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소개팅 약속을 잡았다는 거야."


"소개팅?"

뜬금없는 단어에 나는 되물었다.


"그래, 형부네 회사에 나보다 서너 살 많은데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나 봐. 남자 쪽에서 키 큰 여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형부가 내 생각이 나서 얘기했대. 언니가 그 남자에 대해 들어보니 성격도 좋고 유머러스하고 직업도 안정적이니까 일단은 만나보라는 거야. 그러면서 너보다 키가 약간 작아도 상관없지 않냐고 하더라. 내가 소개팅 안 하겠다고 하니까 남자 키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지, 계속 키 얘기를 하면서 회유하는 거야. 이제 내가 나이도 있고 결혼 시장이 좁아져서 나보다 키 큰 사람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이래. 외모고 뭐고 다 떠나서 결국은 서로 잘 맞고 의지가 되어주는 게 최고라고."


지민의 얘기에 오래전 얼굴이 떠올랐다. 지민이 대학 때 만난 남자애는 매우 작은 체구에 셔츠와 면바지를 단정하게 입고 다녔다. 여름에는 빨강과 파랑 격자무늬 폴로셔츠, 추워지면 컬러 배합이 예쁜 플란넬 셔츠를 입고 웃을 때 양쪽 입가에 보조개가 파였다. 나란히 서 있으면 지민의 어깨가 더 넓고, 더 위에 있었지만 지민은 행복해 보였다. 지민은 그 애를 매우 좋아했지만 지민의 제멋대로인 성격에 질린 남자가 먼저 이별을 통보했다.


"나는 진짜 혼자 있는 게 편하고 사실 나 하나 책임지는 것도 정말 버겁거든. 문제는 뭔지 알아?"


지민은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묻는다. 새로 불거진 문제를 차단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가능하다면 두 손안에 숨고 싶어 하는 것처럼 길고 호리호리하고 마디가 불거진 열 개의 손가락이 얼굴을 철저히 감싼다.


"소개팅할 생각도 없지만, 언니가 그러는데 이 상태로 나가면 안 된대."


지민은 평소처럼 핑크색 가짜 털이 수북한 짧은 재킷에 짙은 회색 스키니진을 입고 있었다. 노란 머리는 하나로 단정히 묶고 있긴 했지만, 머리끈에는 얼굴만 한 크기의 검은색 대형 털방울이 매달려 있다.


"머리도 어두운 색으로 염색하고, 예쁘게 차려입고 나가야지 소개해준 사람도 덜 부끄럽다나 뭐라나. 아니 그럼 내가 부끄럽다는 거야? 내가 그렇게 물었더니, 나보고 자기 말을 이상하게 해석한다면서, 대체 회사에는 뭘 입고 다녔냐는 거야. 그동안 나한테 얘기 안 했는데, 내가 너무 튀고 부담스럽대."


두 손 사이에서 한숨이 새 나왔다.


"아, 진짜. 내가 성별이 여자니까 예쁘게 차려입으라는 거야, 외롭지 않은 노후를 위해 이성을 만나는 자리에서 사회적으로 단정하고 예쁘다고 여겨지는 가면을 쓰라는 거야. 그렇게 해서 상대의 호감이라도 얻으면 뭐 해? 다 거짓인데. 그리고 사실."


지민이 두 손을 떼고 나를 바라보는데 짙은 색 아이섀도가 눈 밑에 검게 내려와 있어서 흠칫 놀랐다.


"이건 내가 최대로 예쁘게 입은 거야. 나다운 거야. 언니는 그런 거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내가 부끄러운 거잖아. 대체 뭐가 예쁜 건지 당최 모르겠어. 그냥 그 예쁘게 차려입어야 한다는 말이 너무너무 짜증 나."

나는 지민의 등을 토닥였다. 핑크색 털이 생각보다 매우 푹신하고 부드러워 두 번째로 깜짝 놀라면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사람마다 눈이 다 다르잖아. 그 언니는 아마 본인이 생각하는 기준과 네 모습이 달라서 자신의 잣대로 너한테 그런 강요를 한 것 같고. 지금 네 모습이 최고야. 너도 알지?”


내가 동의해 줘서 기뻤을까, 아니면 최고란 말에 좀 쑥스러웠을까 지민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묘하게 기분 나빠. 마치 팔리지 않아 먼지 쌓인 재고 취급 당하는 기분이야. 예전에 머리에 무지개색 뿔이 달린 연두색 유니콘 인형이 진열대 구석에 처박혀 있는 걸 봤어. 번화가의 대형 팬시점이었는데, 새로 출시된 반짝반짝 빛나는 인형에 밀려서 정말 온갖 먼지를 뒤집어쓰고 뿔이나 몸의 색이 형편없이 바래져 있었거든."


지민은 벌떡 일어나더니 대형 리스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껏 나는 방문을 힘차게 밀었다. 안에서 한참 부스럭대던 지민이 품 안에 안고 나온 건 리스만큼이나 몸집이 큰 대형 유니콘 인형이었다. 과장을 약간 보태면 성인 주먹만 한 커다란 눈망울에 크고 작은 별빛이 수놓아져 있었다. 입매도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어서 어떤 행복을 꿈꾼다거나 또는 기쁨에도 차등이 있다면 최상위 기쁨을 만끽하는 표정이었다.

표정에 비해 유니콘의 전체적인 색감은 형편없이 물이 빠져 있었다. 낡고 빛바랜 느낌이라 지민이 어렸을 때 갖고 놀던 인형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지민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빠가 떠난 후에 만났으니까, 얘를 데려온 건 일 년 조금 넘었을 거야. 처음 봤을 때 얘를 거기서 구해주고 싶더라고.”


지민은 유니콘 인형의 뿔을 쓰다듬었다. 출고 당시엔 생생한 무지개색이었을까. 관심을 주기엔 지금은 너무 빛이 바랬다.


“언니가 예쁘게 입어야 한다고 얘기하는데 문득 생각났어. 그 말이 마치 너도 네 뿔을 좀 감추고 살라는

말처럼 들렸거든. 일반 대중에게 네 뿔은 부담스러워. 그러니까 그걸 좀 세련되게 감추고 ‘예쁘게’ 입어. 그거잖아.

내 뿔이 뭐가 부담스럽다는지 모르겠지만. 얘도 뿔이 없었으면 출고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려 나갔을까. 근데 그런 상상도 참 무색한 게 모두가 저마다의 뿔을 갖고 있잖아. 너도 그렇고 그 언니도 그럴 거야. 모두 뿔을 갖고 있으면서 남의 뿔 갖고 뭐라 그러면 안 되지. 안 그래?”


잔뜩 헝클어진 머리에 눈화장이 번져 다소 무서운 표정의 지민이 커다랗고 통통한 유니콘 인형을 안은 채 피식 웃었다.


“뭐야. 웃긴 언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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