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민은 삼일 남짓 집을 비웠다. 집안에 새로 들여온 해외여행 기념품처럼 집을 지키더니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지민은 그새 방문에 커다란 리스를 걸어뒀다. 수많은 황금색 잎사귀와 꽃으로 엮은 리스는 한눈에도 번쩍번쩍 빛이 났다. 잎 표면마다 많은 양의 반짝이는 가루가 코팅돼 있다.
"너무 크지 않아?"
지민이 리스를 걸던 주말 아침, 볼멘소리를 했다. 지민이 들고 있는 리스는 매우 거대했다. 너무 커서 우리 집 약소한 방문이 그 무게를 지탱하기 힘겨워보였다. 한번 고리에 걸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지민은 리스의 잎사귀 등이 약간 구겨진 것 같다며 리스를 털거나 다시 고쳐 걸거나 하는 통에 옆에 있던 나까지 정신이 없었다. 분명 지민이 리스를 걸고 난 자리에는 황금색 반짝이 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있을 것 같았다.
내 걱정과 무관하게 지민은 나를 힐끔 보더니 웃었다.
"야. 내 덩치를 생각해 봐. 이 정도 크기는 돼야 나랑 어울리지."
방문에 거는 리스와 본인의 체구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종종 그 애는 본인의 큰 키와 체격을 언급하며 뭐든 큰걸 고르곤 했다. 빅사이즈 텀블러나 한 번만 둘러도 얼굴 전체가 파묻힐듯한 벌키한 머플러나 실제 몸보다 오버스럽게 큰 겨울 겉옷이 그랬다. 한편으로는 휴대폰 하나 넣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가방이나 침대 머리맡을 장식한 미니 피규어들도 지민의 삶에 공존했다. 사실 취향에는 제한이 없지만 지민의 경우 취향에도 중간 지대가 없었다.
삼일의 여행을 떠나기 전 지민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낸다며 비좁은 방에 본인의 키만 한 트리를 들여놓았다. 아직 10월 말이었다. 그 애는 내 생각을 읽은 듯 여행을 다녀왔을 때 적어도 자신의 방만큼은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맞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실 지민은 완성한 트리를 혼자 보기 아깝다며 거실에 내놓겠다고 우겼는데 겨우 말려서 12월이 되면 그렇게 하기로 했다. 우리 집 거실은 책장 한 개와 2인용 소파가 있는 단출한 공간이고 나는 집을 장식하는 것에 취미가 없다. 잘 쓰지 않는 물건은 그때마다 처분하며 살아왔고 벽이든 바닥이든 비어 있는 편이 훨씬 보기 좋았다. 그런 내가 보기에 지민의 방은 혼돈 그 자체였다.
그 와중에 지민은 트리가 배달오기 무섭게 순식간에 조립하더니 어디선가 상자를 하나 꺼내 거기에 든 오너먼트를 하나씩 걸기 시작했다. 지민이 핼러윈을 챙기지 않는 게 오히려 고마웠다.
"우리 집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큰 트리를 만들었거든. 크리스마스 선물도 주고받고, 케이크도 미리 주문해서 이브에는 다 같이 둘러앉아 초를 켰어. 우리 부모님 모두 종교가 없어. 그렇지만 12월에 접어들면 매일 집에선 캐럴이 울려 퍼졌고 쿠키도 굽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케이크와 같이 먹고. 너도 알지. 스님인 우리 고모도 종종 놀러 와서 크리스마스 저녁을 함께했어."
트리 위에 별을 달면서 지민은 덧붙였다.
"종교가 무슨 상관이야. 그날은 그냥 좋은 날인 거야. 다 같이 모이는 좋은 날."
지민이 그 말을 하며 웃었다. 지민의 눈매에서 어딘지 쓸쓸한 느낌을 받은 건 내가 그 애의 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고, 한편으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민이 쓸쓸하리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지민의 부재는 양면성이 있다. 지금은 굳게 닫힌 지민의 방문은 그 방의 새 주인을 상상하게끔 만든다. 나는 식탁에 턱을 괴고 앉아 지민의 방문을 바라본다. 지민이 방을 비운다면 그 자리에 까무잡잡한 피부에 검은 곱슬머리를 가진 외국인이 살게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매우 앳된 외모에 지민과 정반대로 무채색 옷을 즐겨 입는 대학생이 그 자리에 올 수도 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그 방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을 상상하는 건 일탈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지민과는 다른 포인트의 타협이 필요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밤새 낄낄대며 통화하거나, 음악을 크게 틀어놓거나, 한밤중에는 세탁기를 돌리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룰을 아무렇지 않게 어기거나, 현관에 택배 상자를 쌓아놓은 채 치울 생각이 없을지도 모른다. 화장실 뒤처리가 어수선할 수도 있고 남자친구라도 데려와 재운다면, 그 생각에 미치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렇다면 화가 들끓어오를 것 같다. 누군가와 공간을 함께 쓴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 뭐든 장단이 있지. 그러게 애초부터 집에 다른 사람을 들이라고 했니?"
어디선가 지민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주위를 둘러봤다. 집안 어디선가 지민이 취향이 확실한 옷을 입고 엉뚱한 말을 지껄일 것 같다. 그 사이 나도 모르게 지민의 존재감에 길들여졌는지 딴생각도 잠시, 허전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지민은 다정한 친구이자 인생 선배를 잃고 우리 집에 들어왔다. 지민의 말에 따르면 지민의 집은 피할 수 없는 소행성과의 충돌 이후 공중분해됐다고 했다. 지민에게 아빠는 뿌리가 견고하고 수려한 나무였는데 그 나무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뿌리째 뽑혔다. 지민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다른 가족 구성원은 입을 맞춘 것처럼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지민의 엄마는 귀농한 이모네로 지민의 오빠는 인도네시아로 전근을 갔다.
집안 곳곳에 아빠의 흔적이 가득해 더는 못 있겠다고 말을 꺼낸 건 엄마였다. 평소에는 해외 근무가 고되다고 피하던 오빠도 인도네시아 근무지에 빈자리가 나자마자 전근 신청을 자진했다. 당시 지민은 꽤 착실하게 회사를 다니던 중이었다. 혼자 서울에 덩그러니 남겨진 지민은 부동산을 다니며 집을 알아보는 듯했는데 조건과 맞는 집을 찾는 게 쉽지 않다고 했다. 마침 우리 집은 방이 두 칸이었고 작은 방이 비어 있었다. 사실 당시 나는 그 방을 세 놓으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잠시 미룬다고 해도 내 생활에 큰 차질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지민이를 그 방에 불렀다. 월세 명목으로 기본 생활비 정도만 지불하고 살다가 지민은 집을 구하는 대로 나가기로 했다. 나는 출근 시간이 이른 탓에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섰고, 지민은 퇴근 시간이 늦은 편이라 우리가 평일에 얼굴을 볼 일은 거의 없었다. 주말에도 각자의 일정으로 집을 비우면 서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시간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빠를 떠나보낸 뒤 지민의 회사 생활은 반년 정도 더 이어졌다. 그 사이 조직 개편으로 늘 바쁘다던 지민은 한동안 얼굴 보기가 힘들더니 매미들이 오케스트라 연주를 하던 초여름날 회사를 그만뒀다.
회사를 다닐 땐 꼬박꼬박 월세를 내며 금방이라도 이사할 것처럼 보였는데 회사를 그만둔 이후로 지민은 집을 보러 다니는 일을 잊은 듯했다. 지민의 망각은 선택적이라 어떤 것은 작정하고 잊고 어떤 것은 집착적으로 챙겼다. 크리스마스가 그랬다. 버켄스탁 슬리퍼도 있다. 짙은 회색의 스웨이드 가죽이 발등을 덮는 디자인이었다. 아빠가 신던 신발이라고 했다. 아무리 지민이 키도 크고 발 사이즈도 크다고 한들, 그 신발은 지민의 발에 커서 걸을 때마다 헐떡이는 듯 보였지만 그런 건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더우나 추우나 그 신발을 신고 다녔다.
설령 지민이 지금 당장 우리 집을 나가게 된다 해도 그 애는 아랑곳하지 않고 핑크색 털뭉치 같은 오버스러운 겉옷을 걸치고 맨발에 버켄스탁 슬리퍼를 신고 카페 같은 곳에서 휴대폰이나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며 이다음을 궁리할 것 같다. 문제는 나였다. 나는 지민이 쓴 노트를 훔쳐본 적이 있다.
'어떤 외로운 소행성이 우리 집을 박살 나게 만들었네. 대기권에서 소멸되지도 않고 굳이 우리 집과 충돌해 아빠를 앗아갔네. 우리 아빠는 어디로 돌아가셨을까. 아빠를 만난다는 보장만 있으면 언제든 나는 아빠를 보러 떠날 거야. 설령 만나러 가는 길이 외로워도 아빠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보장만 있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아빠를 만나러 갈 거야.'
그 이후 지민이 당장이라도 아빠를 만나러 갈 것 같아서 어쩐지 그 애를 볼 때마다 시한폭탄을 보듯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있다. 암묵적인 감시의 대상, 보호 감찰의 대상이라 여기는 그 애, 지민은 삼 일 후 매우 성난 표정으로 귀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