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나는 오늘도 출근한다.
김부장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는 고요했다.
사무실은 평소와 다름없이 돌아갔고,
타이핑 소리와 전화 벨소리는 여전했다.
하지만 내 안의 공기는 달라져 있었다.
출근용 구두를 신고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마다
발등 위로 묵직한
질문 하나가 떨어졌다.
‘회사라는 명함을 떼어낸 후
나는 대체 무엇으로 정의될 수 있을까.’
사실 나라고
왜 퇴사를 꿈꾸지 않았겠나.
2018년 당시 세상은 ‘퇴사’라는
단어에 열광하고 있었다.
서점 매대에는 무책임하게
떠나라는 책들이 가득했고,
나 또한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나가는
‘묻지마 퇴사’를 꿈꾸던
30대 후반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차가웠다.
이제 막 결혼을 했고,
품 안에는 갓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
가장이라는 이름표가
퇴사 결심보다 무거웠다.
내게 퇴사는 용기가 아니라
무책임에 가까운 도박이었다.
회사를 나갈 수도,
그렇다고 예전처럼
영혼을 다 바쳐 충성할 수도 없는 교착 상태.
그 답답함 속에서 매일 밤
‘퇴사’라는 키워드를 검색하며
남들의 삶을 기웃거렸다.
그러다 우연히 마주친 한 블로그 글.
대기업을 나와 수학 강사가 되었다는
그의 담담한 기록이
명치 끝을 건드렸다.
대학 시절 누군가에게
수학을 가르치며 반짝이던
내 눈빛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학학원 강사나 되볼까?'
그렇게 나는 무작정
그에게 메일을 보냈고,
며칠 뒤 작은 카페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수학 강사가 되니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바뀌던가요?”
내 질문에 그는
뜻밖의 대답을 내놨다.
“아니요. 저를 바꾼 건
수학이 아니라
제가 쓴 ‘책 한 권’이었습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그는 퇴사 후의 지독한 방황을 글로 옮겼고,
그 기록이 세상에 나오자
사람들이 비로소 그를
‘회사원’이 아닌 ‘전문가’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멍하게 앉아 있는
내게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당신도 당신만의 책을 써보세요.”
그날 이후, 내 머릿속엔
‘책’이라는 단어가 떠나지 않았다.
특별할 것 없는 직장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며
자책하다가도,
한편으론 내 이름이 박힌
책 한 권을 갖고 싶다는 갈증이 차올랐다.
결국 나는 적지 않은 수강료를 내고
이름난 작가의 책쓰기 수업을 등록했다.
화려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회의감이 들 때쯤,
작가는 내게 나침반 같은 한마디를 건넸다.
“거창한 진리를 쓰려 하지 마세요.
오직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진실’을 쓰세요.”
그날부터 나의 ‘이중생활’이 시작되었다.
새벽 5시,
가족들이 잠든 고요한 거실에서
노트북을 켰다.
처음에는 단 한 줄을 쓰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한 문장을 쓰고 지우기를 수백 번,
내 이야기가 종이 낭비는 아닐지
스스로를 수없이 의심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내가 왜 그토록 회사에 목을 맸는지,
가장의 책임감 뒤에
숨겨진 불안의 실체는 무엇인지,
그리고 왜 우리는 회사를 다니면서
동시에 ‘자생력’을 준비해야만 하는지...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날것의 언어들을 쏟아냈다.
글을 쓰는 시간은 단순히
원고를 채우는 과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난 10년의
직장 생활을 정돈하고,
상처 입은 나를 스스로 치유하는
‘자아 복구의 시간’이었다.
책은 세상을 바꾸기 전에
먼저 나를 바꿔놓았다.
원고 뭉치가 두꺼워질수록
회사 업무에 일희일비하던
예전의 나는 사라지고,
단단한 ‘내면의 성’을 가진
새로운 내가 서 있었다.
그것은 내 인생의
가장 강력한 백업 플랜이 되었다.
그렇게 10달의 글쓰기가 이어졌다.
야근에 찌든 밤에도,
회식 후 정신이 혼미한 새벽에도
나는 자판을 두드렸다.
한두 줄 쓰기도 벅찼던 손가락은
어느덧 수만 개의 단어를 만들어냈고,
마침내 ‘회사를 다니면서 퇴사를 준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책의 초안이 완성되었다.
그렇게 2018년도 겨울
10개월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회사 밖의 내가 만든 첫 번째 결과물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작은 아주 사소했다.
무심코 읽은 블로그 글 한 편,
용기 내어 찾아간 낯선 사람,
그리고 새벽녘의 서툰 문장 하나.
하지만 그 사소함들이 모여
내 인생의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만약 당신도
지금 길을 잃었다고 느낀다면,
혹은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했다면,
거창한 계획 대신
일단 한 문장만 써보길 권한다.
인생의 진짜 항로는
가장 조용한 시간에,
가장 낮은 목소리로
쓴 글귀 하나로부터 바뀌기 시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