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아주 유명한, 아주 상징적인 예루살렘 올드시티
"기독교면, 예루살렘이 오히려 매력이 없을 수도 있어요. 그냥 문화 유적지, 중동의 한 도시로 보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요."
이스라엘 여행을 가기 수달 전, 먼저 여행을 다녀온 비기독교 지인이 한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 일까.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인데.'
그로부터 수개월 후, 그 지인의 말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은 전 세계에서 가장 종교적인 도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세계 3대 종교는 모두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여기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도시 자체의 종교적 의미도 깊고 그 역사도 3천 년 이상은 됐다.
종교의 흔적이 모두 문화재, 관광지가 되어 신성함을 찾기는 그리 쉽지 않다. 사실 현재 성지순례라고 해서 가는 지역들은 대부분이 로마제국이 기원후(A.D.) 313년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이후에 세워진 교회, 성당들이다. 예수님이 승천하고 나서 300년이 넘은 후의 일이다. 그 자리에 여호와, 예수가 있었는지는 '오직 주님만이 아신다.'
여기에는 AD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의 공이 컸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헬레나는 AD 320년 경에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땅을 방문하고 그곳 사람들의 안내에 따라 '여기가 예수님이 묻히신 곳'이라고 안내를 받은 데에 성분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를, 감람산에서는 '이 곳이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에 예수승천교회를 세웠다. 헬라나 찾은 자취 역시 300년간 희미해진 '구설'이었던 셈이다.
구설이든 뭐든, 어쨌든 이 도시는 성지다. 전 세계에서 몰려오는 열정적인 신도들로 예루살렘은 매일 붐빈다. 그런 신도들조차 관광 상품의 일부로 여겨지기도 한다.
절대신에 대한 열정과 신앙심, 사랑만을 보기에도 바쁘고 벅찬 동네다. 곳곳에 기독교 건축물, 유적 등이 가득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눈물을 흘리고 입을 맞추며 기도하는 신자들을 목격할 수 있다. 황금색 지붕이 반짝이는 성전산과 그 옆의 통곡의 벽에는 각각 무슬림 신자들과 유대교 신자들이 각자의 신에 열정적으로 기도한다. 토라를 아예 외워서 주문 외우듯 기도하는 유대인들도 부지기수다.
특히 신에 대한 사랑을 가장 역력하게 목격할 수 있는 곳은 성전산(Temple Mount)과 통곡의 벽(Western Wall)이다.
모리아산은 유대교에게는 성전산, 무슬림들에게는 무슬림 사원이나 알 하람 아쉬 샤리프라고도 불린다. 유대교 설화에서 이 돌은 과거 세계가 창조된 근원이기도 하다. 탈무드에 따르면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실 때 사용된 흙이 이곳에서 나왔다고 한다. 또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그의 아들 가인, 아벨, 또 그들의 자손 노아는 모두 여기서 제사를 드렸다.
모리아산은 창세기 22장에서 유명해졌다.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부름을 받고, 자신의 아들 이삭을 산 제물로 바치고자 산에 올라갔다. 아들은 제물로 쓸 양을 찾았지만, 아브라함은 '주께서 마련하셨다'라고만 대답했다. 그를 죽일려던 찰나, 여호와는 아브라함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제단 근처에는 아들을 대신할 숫양 한 마리가 예비되어 있었다. 아들의 목숨까지도 내어 드릴만큼 하나님을 경외한 아브라함은 아직도 믿음의 조상으로 불린다.
이런 구약의 기록에 근거해 기독교, 유대교와 이슬람 국가들은 끊임없이 싸운다. 이들 모두 모세 5경을 비롯한 구약에 종교의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모리아산이 있는 예루살렘, 그중에서도 성전산 근처는 이들에게 성지 중의 성지다.
성전산은 현재 무슬림만 들어갈 수 있다. 역설적으로 바로 옆에 위치한 통곡의 벽을 붙잡고는 유대교 신자들이 여호와에 대한 사랑으로 토라를 들고 서서 하루 종일 기도한다. 때로 이들은 여호와를 찬양하는 기쁨에 넘쳐 춤추며 찬양을 하기도 한다.
통곡의 벽은 헤롯 대왕이 기원전(B.C.) 20년에 스룹바벨 성전을 개축 및 증축할 때 세워진 건축물의 일부다. 기원후 70년에 로마군의 점령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을 때 이 성벽도 대부분 무너졌다. 지금의 통곡의 벽은 조금 남았던 부분에서 수세기간 계속 세워 올린 것이다. 남아있는 성벽이 예루살렘 성전의 서쪽 벽이었기 때문에 영어로 서쪽의 벽이라고 불린다.
수세기에 걸쳐 벽 위로 쌓아 올렸기 때문에 벽돌의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가장 밑에서 7단까지는 헤롯 대왕이 성전을 개축할 때 쌓은 부분이고 그 위의 4단은 우마야드 왕이 기원후 7세기에 쌓았다. 그 위 14단은 오스만 터키 시대에 올려졌다.
헤롯 성전 파괴 이후 약 250년 동안 유대인은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없었으나 비잔틴 시대에 이르러 성전이 파괴된 날 하루만 입장이 허용됐다. 유대인 전승에 의하면 이 날은 히브리 달력으로 아브(8월)의 9일째 되는 날이다.
디아스포라로 지내던 유대인들은 매년 아브의 그날이 되면, 통곡의 벽에 모여 성벽을 두드리며 슬피 울곤 했다고 했다. 그렇게 서쪽 성벽은 ‘통곡의 벽’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관광객들이 통곡의 벽 근처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사진을 찍는 건 실례가 될 수 있다. 대신 통곡의 벽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투어 상품을 이용하면 초기 성벽 유적을 볼 수 있다.. 입장 시간은 대체로 정해져 있으며 터널 관광을 마치고 나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었다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1번 지점 쪽으로 나오게 된다.
기독교 성지순례자라면 반드시 들르는 곳 중 하나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걸어갔다는 비아 돌로로사다. 비아 돌로로사는 라틴어로 '고통의 길' '슬픔의 길'이라는 의미다.
비아 돌로로사는 헤롯의 안토니우스 요새에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는 약 400미터의 길로 예루살렘 무슬림 지구와 유대인 지구를 관통한다.
거리는 총 14개의 주요 지점으로 구성됐다. 제1 지점은 예수께서 재판을 받은 빌라도 법정, 제2 지점은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주색 옷을 입으며 로마 군인과 민중에게 희롱을 받으신 곳이다. 제3 지점은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처음으로 쓰러진 곳, 제4 지점은 마리아를 만난 곳으로 알려졌다. 제5 지점은 시몬이 예수님을 대신해 십자가를 지고 걷기 시작한 곳, 제6 지점은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준 곳이다. 제7 지점은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쓰러지신 곳, 제8 지점은 예수께서 슬퍼하는 마리아를 위로한 곳이다. 제9 지점은 예수께서 세 번째로 쓰러지신 곳, 제10 지점은 옷 벗김을 당한 곳, 11 지점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달린 곳이다.
제12 지점에서 예수님이 운명하셨다. 그때에 큰 지진이 있었다고 성경에 나와있는데 실제로 이 곳에서 바위에 금이 간 것을 볼 수 있다. 13 지점은 예수님의 시신이 염하기 위해 놓인 곳이다. 제14 지점은 예수께서 묻혔다가 부활하신 곳으로, 10 지점부터 14 지점까지가 모두 성분묘교회에 있다. 성분묘교회에서는 매주 금요일 오후 3시에 수도사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행렬을 재연하기도 한다.
이 14개의 지점 모두 실제로 예수님이 걸었는지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비아 돌로로사의 지점들은 16세기 유럽의 크리스천들이 루머 등으로 추정해 정해놓은 곳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대부분 종교 문화재가 얼마나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지 우리로선 알 수 없지만, 순전한 마음으로 신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중동에 작은 동네까지 방문한 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도시는 충분히 감격스럽다. 다만, 사도 바울의 가르침대로 이미 우리 몸 그 자체로 성전이 된 것,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예루살렘을 '성지'라고 하는 건 신앙과 모순되지 않나 싶다.
예루살렘에는 다양한 종교와 인종과 함께 3천 년의 파편화된 역사, 그리고 첨단의 현대가 모두 병존하고 있다. 구시가지(Old Town)와 신시가지가 너무나 다르고 구시가지조차도 아랍인,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등 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뒤섞여있다. 수천 년간 지속된 뺏고 빼앗는 역사가 현재의 예루살렘을 만들어냈다.
성경에서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은 그 시대도 알 수 없는 구약성서의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된다. 창세기 13장 18절에 나오는 살렘 왕 멜기세덱이 다스린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다. 기원전 13세기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시기에는 여부스족이 살았다. 이후 기원전 1천 년 경에 다윗이 시온 산성을 정복하고 다윗성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 후 다윗 왕이 수도를 헤브론으로 옮겼고 예루살렘은 오히려 이때부터 번성하기 시작한다. 솔로몬 왕 시기에는 2배 이상 커졌다. 하지만, 기원전 587년 바벨론의 네부카드네자르 왕이 예루살렘을 파괴한 이후 이 곳은 폐허가 됐다.
기원전 63년 로마는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기원전 37년 로마의 도움을 받은 헤롯왕은 예루살렘을 솔로몬 당시보다 3배가 넘는 규모로 확장했다. 하지만, 70년 로마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또 한 번 파괴한다. 이때 서쪽 벽 중 일부가 파괴되지 않고 통곡의 벽으로 남아있다.
그 후로도 예루살렘 땅을 둔 뺏고 빼앗는 전쟁은 계속됐다. 로마는 기원후 600년대까지 이 지역을 점령했고 이후 정통 칼리파가 이 지역을 다스리게 된다. 1099년 제1차 십자군 전쟁 이후 잠시 기독교 국가가 생기기도 했으나 100년도 지나지 않아 술탄국이 다시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그리고 1517년부터 이 지역은 오스만 제국 지배로 넘어가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이슬람 문화권에 속하게 된다.
19세기에 이르러 전 세계 디아스포라 사이에 유태복고주의, 즉 시온주의(Zionism) 바람이 불었다. 여호와가 약속하신 그 땅에 다시 가야 한다는 의미로, 이로 인해 1948년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인 이스라엘이 새로 건설된다. 예루살렘은 분쟁의 도시로, 과거에도 그랬고 아직도 그 싸움은 끝나지 않은 상태다.
수천 년 역사를 가진 이 도시는 그만큼 정체성도 다양하다.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기독교 지구, 무슬림 지구, 아르메니안 지구, 유대인 지구 4개 구역으로 나뉜다. 각각의 지구에는 해당 종교를 가진 주민들이 살고 있다. 지도나 그림으로 보면 칼같이 나뉘어 있는 4개 지구지만, 실제로 걷다 보면 지금 여기가 어떤 지구인지 파악하기가 힘들다.
북동쪽에 위치한 무슬림 지구가 가장 크며 다마스쿠스 게이트, 헤롯 게이트, 라이온 게이트(성 스데반 게이트) 등이 이 지역과 올드타운 밖을 연결해준다.
북서쪽은 기독교 지구로 뉴 게이트, 욥바(Jaffa) 게이트 등이 있으며 남서쪽은 가장 작은 아르메니안 지구가 있다. 마지막으로 남동쪽은 유대인 지구로, 무슬림 지구와 유대인 지구는 예루살렘 올드타운의 상징인 성전산을 경계로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