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사 May 05. 2020

돈은 좋지만 돈 얘기는 손절하고 싶네요


내 구글 독스엔 '20xx년 현금 흐름 예상'이라는 엑셀 페이지가 있다. 가계부 파일에 딸린 스프레드시트인데, 월별로 성과급 및 기타 수입 예상을 적어 놨다. 매년 갱신할 때마다 만감이 교차한다. 올해같이 육아 휴직을 하는 해는 약간의 상실에 젖는다. 돈, 참으로 사람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것!


세상 어느 누가 '돈이 너무 싫고 환멸을 느낀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 자유로운 시장 경제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추구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고 본능적인 행위다.


돈을 벌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돈 얘기는 많은 사람에게 실패 없는 화제가 된다. 누굴 만나든, 상대의 직급이 어떻든 재테크가 도마 위에 오르면 대체로 대화는 활기를 띤다. 요즘 같은 시장에서는 '코로나 19가 국내외 경제에 미치는 영향' '원유 시장의 향방' '지금은 인버스를 탈 때인가 레버리지를 살 때인가' 등이 주제로 던져지면 썰전 뺨치는 대화가 이어질 것이다.


증권부 기자를 5년 하면서 자연스레 내 주위에는 돈 얘기만 하는 사람들이 득실득실했다. 어디 증권사, 자산운용사의 어떤 상품이 좋다더라, 펀드 매니저 누가 잘한다 이 정도는 양반이다. 연말께 조회 수가 가장 많이 나오는 기사는 뭘까? '증권가 연봉킹'이다. 사람들 참 남이 얼마 버는지 궁금해한다.


증권가만 그런가. 친구들을 만나도 삼성전자 이번에 모바일사업부 성과급이 몇 퍼센트라더라, SK하이닉스는 더 대박이다 이런 얘기에 배 아파하고 자조한다. '아 돈도 쥐꼬리만큼 주는 이 회사 진짜 탈출해야지.' 꼭 결론은 이렇게 나더라.


한동안은 이런 돈 얘기가 어른들의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돈을 안정적으로 버는, 정규직 직원들만이 할 수 있는 어른스러운 이야기. 인턴, 아르바이트생일 때는 할 수 없던 그런 어른들만의 이야기. '주식에 얼마를 넣어서 얼마를 잃었다'는 문장에서 어딘지 모를 의기양양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나는 몇백만원의 손실 따위 감내할 수 있어.' 이 마음이 행간에서 읽히는 건 왜일까. 저 문장 뒤에는 자신의 재력에 대한 자신감이 깔려있다. '우리에게 돈이란 계속 들어오는 밀물 같은 거야. 썰물이 되어도 괜찮잖아. 또 밀물이 들어올 텐데.'


모두가 '돈 돈' 거리는 세계. 직장인이 되기 전까지는 굉장히 생경했던 광경이다. 처음엔 내가 진짜 어른이 된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른이 되려면 멀었던 걸까. 희한하게 몇년을 들어도 이질감은 사라지지 않더라. '나는 죽기 전에 강남에 한 번 살아볼 수 있을까'라든가 'ㅇㅇ아 너네 회사 돈 좀 주지 않냐. 연봉 한 x천쯤 되는 거 아니야?'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짓는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돈 얘기는 금기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정월 대보름에 뜬 달에 '돈벼락 맞게 해 주세요'라고 빌었다가 엄마에게 딱밤을 맞았다. 그 말이 어쩌면 엄마에게 비수를 꽂은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 가정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아이 앞에서는 돈 얘기를 하지 않는다'가 상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중고등학교 때도 미성년자가 사회탐구 경제영역 이외에 돈에 대해 논하는 건 그리 허용된 분위기가 아녔다. 그때 윤리 시간에 배운 말을 빌리자면, 이렇게 돈 돈 거리는 사상을 '배금주의'라고 한다.


배금주의! 이 사회에 만연한 바로 그 돈에 대한 찬양이 배금주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배금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다. 동전 한 면이 더럽다고 해서 그 동전을 못 쓰겠다고는 할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정신분석적으로 접근하면 돈 얘기는 사실 조금 부끄러운 얘기일 수도 있다. 정신분석의 아버지 프로이트는 우리가 똥이란 대상을 '사회적 규칙에 의해 처리해야 한다'는 점에서 돈과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간략히 말하면, 어릴 때 배변 훈련을 제대로 받은 사람은 타인에게 관용적이고 베푸는 태도를 갖게 된다고 한다. 이 시기를 '항문기'라고 한다. 항문기에 어떤 경험을 갖는지가 무의식에 영향을 주고 그게 성인이 되어 돈으로 연결된다. 배변 훈련을 제대로 하지 않고 똥을 참으며 쾌감을 느낀 아이는 돈을 모으고 집착하는 행위로 쾌락을 추구한다. 그러니까, 프로이트에게 돈은 어른들의 똥이다.


배금주의가 만연하다 보니 인간관계, 타인에 대한 평가도 숫자로 평가된다. 대기업에 다니거나 집안에 돈이 좀 있다고 하면 쓸모 있는 인맥, 이도 저도 없는 사람은 굳이 곁에 둘 필요 없는 존재. 그 평가는 항상 상대적이다. 누군가에게 나는 필요한 사람이 될 수도, 무가치한 지인일 수도 있는 거다.


돈 얘기를 하는 목적이 뭔가. 결국 상대가 어느 정도 금전적 여유가 있는지, 재테크로 어느 정도의 이득을 봤으며 또 어느 정도 손실을 봤는지 은연중에 가늠하기 위함이다. '은연중'이라고 굳이 쓴 이유는 저런 심리를 대놓고 마음에 품는 사람은 그다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복잡한 존재라서 무의식 중에 타인에 대해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잘 때만 빼고.


그래서 돈 얘기'만' 하는 사람은 정말 손절하고 싶은 대상 1위다. 당신이 날 두고 얼마나 셈을 하며 가늠하고 있는지 보는 내가 지쳐서 그렇다. 내 가치를 나의 재산과 경제력으로만 평가해준다면 내가 가진, 내가 자긍심을 느끼는 나의 다른 많은 가치들은 먼지만도 못하게 된다. 돈은 좋지만, 과도한 돈 얘기는 똥 자랑에 비견할 수 있다. 항문기는 출생 후 18개월에서 3년까지라고 한다. 참고용.


이전 13화 그냥 라면 하나 먹었을 뿐인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