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만나기 전 30년 정도의 인생 동안 나는 몇 번의 소개팅을 했을까? 대학교 때는 파스타가 먹고 싶으면 후배, 동기들을 동원해 '오늘 저녁에 소개팅 가능한 사람 있을까? 신촌이나 강남에서'라는 문자를 날렸다. 용케도 그렇게 보내면 한 명은 꼭 생기더라. 지금 보면 뭐 이런 무뢰한이 다 있나 싶지만. 굳이 자기 방어를 하자면 20대 초반 여자의 패기라면 패기 아니겠는가. 생각 참 가볍기 그지없다.
20대 중후반이 되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결혼 시장에 뛰어든다. 이 시기 여성들은 결혼 적령기라고 취급되어 소개팅도 줄기차게 들어온다. 하루에 두 번씩 하는 경우도 왕왕 볼 수 있다. 모든 조건이 다 평이한 사람이면 모두의 조커가 된다. 어떤 남자를 소개해줘도 무난하게 평가받을 거 같은 그런 사람 있지 않나.
여고 여대를 나오고 성격 외모 조건 모두 평이했던 덕에 나는 바로 그 조커가 됐다. 시쳇말로 '소개팅 100번은 해봐야 한다'라고 하는데 10년간 100번은 족히 하지 않았을까 싶다. 1년에 10번이니 그리 잦은 것도 아니지 않나. 이 시장의 이봉주는 나다. 10년간 숨 고르며 꾸준히 마라톤 한 덕에 결국 지금의 남편을 만났으니.
아홉수라고 모든 이들에게 놀림을 받던 해는 막판 스퍼트라며 더 열심히 달렸던 거 같다. 아니, 내가 달리려고 하지 않아도 모두가 달리니 덩달아 달리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홉수엔 결혼 못한다느니 연애도 안될 거라느니 주변 잡음도 심하다. 그 잡음은 어딜 가도 들을 수 있었다. 집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회사에서도, 업무 관계의 외부 사람들로부터도. 딱 그런 간섭만 걸러내는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끼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3월 중순 어느 날. 여의도의 오래된 중국집이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가 현역에서 한창 활동하실 때도 즐겨 가던 곳이라고 한다. 중국집의 관록만큼 지긋한 분들을 모신 저녁자리였다. 평균 나이는 대략 55세. 당시 나는 29세. 얼마나 귀여웠겠는가. 실제로 한 분의 나이는 정말 우리 아빠와 동갑. 이 어르신들은 내가 기자가 아니라 딸이나 조카쯤으로 보였던 게 분명하다. 그날 처음 뵌 한 증권사 전무님이 갑자기 잽을 날린다.
"김 기자는 남자 친구 있어요?"
가드 올려야 하나. 당황한 나머지 바로 카운터로 맞선다.
"전무님. 제가 남자 친구가 있으면 이 좋은 봄날에 여기서 전무님하고 저녁이나 먹겠어요?"
초면인데 너무 맹랑했나 싶다. 이 죽일 놈의 고량주.
하지만 이 또한 하나의 전략. 소위 성공했다는 어르신들은 젊은이들의 이런 당돌한 모습에 오히려 '뻑' 간다. '나한테 이런 여자 네가 처음이야' 그런 심리 아닐까 싶다. 전무님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고는 역카운터를 건다.
"그래요? 그럼 내가 소개팅해줄까?"
이거 애매하게 성희롱 라인인데. 더 나가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지도 모르겠다. 상대는 나름 호의를 보인 게 아닌가. 지금은 풀백(Pull-back)으로 방어할 때다. 몸 좀 뒤로 젖혀보자.
"정말요?"
카운터가 먹히지 않으니 전무님도 당황한다. 아마도 '아니에요~'를 원했겠지. 이 때다 싶어서 어퍼컷이다.
"말 나온 김에 지금 해주시죠? 괜찮은 사람 있나 봐요!"
무례한 호의에 대처하는 방법은 그 호의를 실천해보게끔 멍석을 깔아주는 것이다. 멍석 깔아주면 못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50대 중반의 세상 두려울 것 없는 증권사 임원. 멍석이든 카펫이든 내가 밟는 곳이 꽃길이고 비단길이다.
"그러죠. 우리 본부에 정말 잘생기고 일도 잘하는 싱글 하나 있어. 노량진 사니까 지금 전화해보지."
그게 저녁 8시 30분이었다. 전무님은 정말로 그 싱글남한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지금 이거 실화냐. 술 마시다가 부하 직원한테 전화해서 나오라고 한다고. 그들에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예의와 규범이 있는 거 같다. 이게 바로 그사세라는 건가.
"야 뭐하냐. 어디냐."
"집이라고? 술이나 마시자 나와라."
당시 36세였던 그가 불쌍했다. 누군가는 아이들한테 잘 자 뽀뽀해주고 아내와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시간일 텐데. 단지 싱글이란 이유만으로 퇴근 이후에 회사 전무한테 불려 나오다니.
한 시간쯤 지나고 그가 정말 왔다. 회색 추리닝에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채로. 전무님 말마따나 잘생겼는지는 뭐 확인도 안 된다.
"어 왔냐. 앉아."
어리둥절한 그 남자. 이 자리가 뭔지도 모르고 고량주에 얼굴 빨개진 우리들을 본다. 내가 빨개진 건 술 때문인가 부끄러움 때문인가.
"여기 김기자 어때. 29살이고 아직 남자 친구 없대."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내가 빨개진 것은 부끄러움 때문이 분명했다. 아무리 내가 지금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끼고 소개팅 마라톤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구멍 난 검정 스타킹 신고 소개팅에 나간 것보다 더 창피했다.
전무님과 일행은 나와 회색 추리닝남만 남겨 놓고는 한잔 더 하러 갔다. 젊은 사람들끼리 잘해보라며. 심지어 남자분께 몇만 원 쥐어주고 둘이 한잔 더하라고 한다. 그렇게 그들을 떠나보내고 그 분과 나는 명함 교환을 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어색함을 숨겨봤다. 전무님이 주신 돈은 각자 택시비로 반반씩 나눠 썼다. 그 후로는 그와 문자도 전화도 해본 적이 없다. 일은 잘하고 계시려나 회색 추리닝남. 이제 결혼은 하시고 아이도 생기셨는지요.
아이 엄마가 되고 한 남자의 아내로 몇 년간 살아본 지금, 만약 내 주변에 전무님 같은 상사가 있다면 꼭 한마디 해주고 싶다. '연애는 지들이 알아서 해요.' 연애는 각자 알아서 할 영역. 누군가 개입하고 잘되게 해 준다고 해봤자 되는 거 일도 없다. 소개팅이야 많이 하면 확률은 높아지겠지만 그렇다고 술자리에서 무턱대고 부르는 건 예의가 아니다. 제대로 된 인연을 바랄수록 더 검증하고 신중해야 한다. 월하노인은 아무나 하나. 만약 언젠가 저 남자분을 다시 마주칠 일이 있다면 명함 업데이트를 하면서 커피 쿠폰 하나 전해드리고 싶다. 그날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다고, 죄송하단 의미로 말이다. 전무님 아직도 자리에 계시냐고, 이제는 월하노인이 아니라 그냥 노인 아니냐고도 덧붙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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