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은 결혼을 하고 한 사람은 두 사람을 잃었다.
고씨는 아주 흔한 외모를 가지고는 처음 만난 날부터 뭔가 알 수 없는 말투,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주절댔다. '~랄까?'를 문장 끝마다 붙이고 말 중간중간에 '칙쇼(젠장이란 뜻의 일본 욕)'를 연신 외쳤다. 아, 이따금 '오레사마'라고 자신을 지칭하기도 했다. 소위 '오타쿠'였다. 고씨 본인도 스스로 고타쿠라고 불렀다. 성이 고씨니 고+오타쿠다. 일본어학당에서 만났으니 말 다했다.
애당초 사람한테 먼저 다가가지 않는 성격이라 친해질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고, 이실직고하자면 굳이 친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학당이 뭐하는 곳인가. 서로 얘기하는 곳이다. 회화시간에 쉽게 물어보는 말이 '남자 친구(여자 친구) 있어요?' 이런 질문이다. 이런 질문을 해야 학급 분위기가 살아나기도 한다. 하얀 피부에 단정한 미소를 머금고 다니던 타나카(아마도 가명) 센세가 고타쿠상한테 물어본다.
'고상, 여자 친구 있어요?'
'네. 있습니다.'
아 일본인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튀어나오는 감탄사는 어찌 막을 수 없었던 걸까. 타나카 센세는 '헤에~ 있어요?' 하고 반문해버린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일본에서 이런 리액션이 마냥 비난이 아니라는 점. 그냥 일반적인 반응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리 불쾌해하지 않고 고씨는 마저 말을 이어간다.
'네 있어요. 2년 정도 사귀어왔어요.'
고씨의 여자친구는 치위생사다. 고씨보다 2살 어린데 혼자 사는 고씨를 위해 자주 집에 찾아와 우렁각시 노릇을 해준다고 한다. 고씨가 뭐라고? 외모도, 말투도, 취향도 일반적으로 인기가 많은 스타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만의 매력이 있는듯하다.
6개월 수업을 같이 듣다 보니 자연스레 고씨의 여자친구 분 사진을 볼 기회가 생겼다. 와. 고씨는 전생에 고주몽이라도 됐단 말인가. 치위생사답게 하얗게 드러낸 치아와 그 미소가 인상 깊은 분이었다.
어느 날 고씨가 수업이 끝나고 곧장 학생식당으로 간다고 한다. 데이트 있지 않냐고 물었더니 그래서 밥을 미리 먹고 간다는 거다. 응? 밥 먹고 만나는 데이트인가? 반문하니 그의 대답이 20대 초반 내 심장을 파고들었다.
'아니. 삼겹살 먹기로 했는데 밥 안 먹고 가면 내가 너무 많이 먹으니까 미리 라면으로 배 좀 채우고 가게. 그래야 여친 많이 먹이지.'
고씨 역시 20대 초중반의 궁핍한 학생. 신경림 시인이 읊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20대 초반에 삼겹살 먹는 날은 기념일 수준 아닌가. 돌아서는 그의 등 뒤에서 우는 건 그의 여자친구가 아니라 나였을지도 모른다.
그 날뿐만이 아니었다. 어떤 날은 매점에서 초코파이 대여섯 개를 사 오더니 수업시간 내내 우걱우걱 먹고 또 어떤 날은 점심에 학식에 가서는 고봉밥을 퍼서 밥으로 배를 채우는 광경을 종종 목격했다. 모두 데이트하는 날의 광경이다. 데이트가 없을 때는? 그도 그냥 평범한 20대 남성의 식욕을 가졌다.
어학당 한 학기가 끝난 이후 나는 고씨와 다시는 연락할 일이 없었다. 딱히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것도 아니고 단지 반 동료였을 뿐이니.
그러다 몇 년이 지나, 아니 거의 10년이 지나 종로의 한 금융사 빌딩 앞에서 그를 마주쳤다. '헉 설마 고씨?'
반갑게 인사를 하자 그 역시도 매우 놀란다. 여하튼 가볍게 인사를 한 뒤, 잘 지내시냐는 질문에 그가 멋쩍게 웃으면서 대답한다.
'다음 주에 결혼해.'
오오 대박! 이어지는 그의 대답이 또 마음을 후벼 판다. '그때 그 여친이랑. 12년 넘게 만났다.ㅎㅎ'
축하한단 말을 연신 거듭하고는 고씨의 가치에 대해 새삼 곱씹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위한 진정성과 배려심. 10년 넘게 만나며 그 여자친구 분이 그걸 몰랐을까. 자신을 위해 삼겹살도 포기하고 라면으로 배 채워서라도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남자인데. 그분 참 결혼 잘하신 거다.
데이트 전에 배를 채우는 행위는 나에게 이런 의미었다. 상대를 배려하는 일. 물론 같이 먹는 밥이 더 맛있기도 하지만 경제적으로 여의치 않을 때는 미리 집밥 좀 먹고 나가면 데이트 비용을 아낄 수 있지 않은가. 요즘 참 보기 힘든 이타적인 일이다.
얼마 전 아끼는 남자 동생에게 다른 여자 후배를 소개해줄 일이 생겼다. 그 여자 지인은 외모도 매우 수려해서 업계에서 '미녀 ㅇㅇ'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닐 정도다. 화려한 외모에 명문대, 강남 언저리 출신이라 본인에 대한 자부심도 엄청난 친구다.
평소 나에게 '선배처럼 행복한 결혼 생활하고 싶어요'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친구였다. 결혼에 대한 로망과 환상도 큰 모양이었다. 본인에 대한 프라이드가 높으니 당연히 남자 보는 눈도 까다롭겠지. 그래서 고르고 고른 사람이 이번에 소개를 해준 남자 후배였다. 둘은 동문이었고 나이도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아 잘 통하리라 믿었다. 사는 지역도 겨우 10분 거리니 조건으로 따지면 브래드 피트와 앤젤리나 졸리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지젤 번천급이다. 뭐 다들 결별했지만.
요부터 말하면 그래, 이들 역시 결별했다. 결별이라기보다는 첫 만남에서 그냥 면전에 침을 뱉은 꼴이 됐다. 역시 조건은 사랑의 보증수표가 아닌 것.
너무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가 높았던 걸까. 이 여자 후배는 약속시간에 무려 30분을 지각했다고 한다. 여자들이 준비하는 데에 좀 더 걸릴 수 있으니 그렇다고 치자. 근데 약속 장소는 본인이 정했고 코스로 시키면 인당 10만 원은 나오는 파인 다이닝. 30분 늦으면서 늦는다는 연락도 없던 상대방에 남자도 상당히 기분이 나빠졌다. 코스는 무슨 단품으로 대충 시키자. 적당히 파스타 중 제일 싼 걸 시켰다.
여자 쪽 표정이 말이 아니다. 파인 다이닝에 와서 파스타 꼴랑 하나요? 메뉴를 찬찬히 살피더니 한 그릇에 3만5천원하는 가장 비싼 파스타를 골랐다. 이름하여 어란 파스타.
이미 기분이 상할 대로 상했으니 대화가 잘 오가지도 않는다. 한창 먹다가 그릇을 보니 여자는 잘 먹질 못한다. 거의 70% 정도 남긴 상태. '입맛이 없으신가 봐요?'라는 남자의 질문에 여자가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아 네 집에서 라면 먹고 왔더니 배가 안고프네요.'
결국 그 여자 후배는 그 이상 먹지 못하고 다 남겼다고 한다. 남자가 계산을 하고 있자 갑자기 어디서 전화가 왔는지 핸드폰을 귀에 대고는 레스토랑 밖으로 나갔다. 들어가세요 한마디 하고는 예약한 택시를 타고 슝 갔다고 한다. 슝.
이날 나는 파리에 빙의해서 이 남자 후배에게 빌고 또 빌었다. 그런 애인 줄 몰랐다고. 걔 파스타 값 내가 보내주겠다며 말이다. 남자 후배는 그냥 한마디 하고 만다. '그냥 인생 수업 들었다고 생각할게.'
데이트 전에 라면을 먹고 간 건 같은 행위인데 결과가 전혀 다르다. 고씨는 결혼에 성공했고 이 여자 후배는 남자는 물론 선배의 신뢰도 완전히 잃었다. 앞으로 나는 이 친구를 어떻게 봐야 하며 이 친구는 나를 어떻게 대할 것이란 말인가. 아 그래서 '소개팅 잘했어요' 연락은 왔냐고? 그럴 리가 없지. 그럴 개념이 있었다면 소개팅에서 저런 매너를 보이진 않았을 거다.
같은 라면이 다른 결과를 낳은 이유는 섭식자의 마음 상태. 한 명은 사랑하는 여자친구를 위해서 먹은 거였고 다른 한 명은 이따 소개팅이야 어찌 됐든 난 일단 곯은 배부터 채운다는 생각이었다. 관계가 발전하고 유지되는 것도 이 마음가짐 차이다. 내 마음이 타인을 행해있냐, 아니면 나 자신만 보고 있냐. 타인을 생각할 때 나는 좀 더 희생과 배려를 하게 된다. 그 희생과 배려는 대체로 열매를 맺고 나 자신을 향한 마음은 관계의 가시로 변하기 일쑤다.